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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어라!(성령강림후열다섯째주일, 2014년9월21일)

하늘기차 | 2014.09.21 17:31 | 조회 2587



                                                하나님을 믿어라!
성령강림후열다섯째주일                                                                                                                              막11:20-24;사5:1-5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이 마태 복음21장에서는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와 귀신들린 아이의 병을 고쳐주시는 내용 중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상황이 전혀 다른데, 아마도 제자들이 그 이야기의 상황을 미쳐 놓쳐버린 것 같습니다. 아니면 예수님께서 두 가지 상황에서 같은 말씀을 하신 것 일 수도 있구요, 그러나 모두 믿음에대한 것입니다. 하여간 오늘 말씀에서는 제자들이 무화과 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보고 놀라자,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산아!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해 보셨나요? 안 해 보셨나요? 어린아이들이라면 그렇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비유는 그 의미를 밝혀야 합니다. 그 상징적 의미를 이 시대 정황 속에서 보물을 찿듯이 찿아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즉 신뢰, 믿음에관한 것입니다. 어떻게 믿는 것이 믿는 것일까요? 자기 신념, 아니면 자기 확신 일까요? 열정적으로 부르짖는 ‘믿사옵니다’일까요? 기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치 않는 ‘절대 긍정’, 이것이 믿음일까요? 주님이 ‘하나님을 믿으라!’했는데, 적지 않게 자기 신념을 하나님 신앙으로 착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알라딘 램프의 요정이거나, 도깨비 방망이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예를들어 우산 장수와 아이스크림 장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줄 까요? 하나님을 믿는 기도는 욕심과 신념 체계에서 비롯된 기도, 자기 정성의 기도 그거 아닙니다. 정한 수 떠다 놓고 두손 모으는 그 순전함, 그 열정이야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에서 ‘하나님을 믿어라!’는 것은 나의 계획, 나의 소원이 아니라,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좋은 뜻이 있고, 좋은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산인들 안 뽑히고, 바다인들 안 메꾸어 지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욕심, 자기 계획, 자기 신념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경륜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미 13절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마침 배가 고파서 길 옆의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열매가 있을까 하고 가 보았는데, 입 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서 오늘 본문 말씀인데, 그러니까 제자들이 전 날 아침에 저주한 무화과 나무가 새까많게 말라버린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어라!’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전 날 아침의 이야기와 오늘 아침의 이야기 사이에 무슨 사건이 벌어졌는가 하면, 성전을 청소하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장사하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내 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버리고, 상을 둘러 엎어버리신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으시자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성전을 청소하시고 난 후 다음 날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실 때 무화과 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본 것입니다. 지금까지 유대교를 받쳐 왔던 성전, 제사, 율법은 말라버리고 새로운 믿음을 여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주님께서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옛 질서는 부서져야 했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는 말라버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오늘 말씀에서 땅을 일구고, 돌도 골라내고서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고, 그리고 수확기에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며 망대도 세우고 포도주틀도 만들어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는데, 들포도가 맺혔다고 합니다. 무화과 나무도 그렇고 포도나무도 모두 목재로 사용되는 나무가 아닙니다. 모두 열매가 풍성이 맺어야 좋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무화과 나무도, 포도 나무도 모두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은 울타리도 걷어 내고, 담을 헐어 먹힘을 당하게 할 것이고, 가지치기도 북을 돋우지도 않아 못 쓰게 할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 농부는 물론 하나님이시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지키시며 인도하셨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자 비도 내리지 않게 하시고 찔레와 가시나무 만 자라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올 해 우리교회 포도나무가 열매를 한 20 송이 정도는 열리지 않았나 싶어요. 참 대단하더라구요.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전에는 늘 몇 송이 열리다 말았는데 말입니다. 근데 제대로 먹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잘 익기도 전에 하나, 둘 씩 따서 먹는 바람에 완전 온존히 익은 열매는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아쉽습니다. 근데 내 년에도 그렇게 열릴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열리니까, 내년에 더 잘 열릴 수 있도록 거름도 주고, 북도 돋우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5장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
         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3절 말씀에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깨끗하지 않고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포도나무를 가지치기 하듯이 우리의 삶도 가지치기를 해야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지치기를 하는가 하면 요15장의 포도나무 비유는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을 깨끗이 가지치기를 합니다. 그릇은 깨끗하게 비어 있어야 무언가를 담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깨끗하기 위해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의 모든 근거를 정리하고 떠났습니다. 떠나지 않고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배의 노를 힘껏 젔는데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보니까 배가 매여있습니다. 매인 것을 풀지 않고는 저 먼 은혜의 바다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기존의 모습으로는 안됩니다. 옛 생각과 자기에게 있는 것 가지고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벗어버리려면 죄송하지만 죽기를 각오해야 합니다. 갑각류나 뱀과 같은 생물들은 탈바꿈을 합니다. 그런데 가제 같은 종류는 발 마디가 많아서 껍질을 벗기가 그렇게 힘이든다고 합니다. 껍질을 다 벗으면 탈진하여 다른 천적에게 잡아먹히기 십상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껍질을 벗는 이유는 몸이 계속 자라기 때문에 자기 껍질에 갇혀 죽지 않기위해서는 허물을 벗어야합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게 껍질을 벗어야합니다.
 
   죽기로 껍질을 벗은 분들이 성경 곳곳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얍복강에서 밤새 하나님과 씨름하며 엉덩이 뼈가 위골되기도 합니다. 특히 모세는 전 생애를 걸고 하나님 앞에 섭니다. 모세의 120년 인생은 뚜렷이 3부분으로 나누입니다. 처음 40년은 이집트 왕궁입니다. 행7:22은 ‘이집트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서, 그 하는 말과 하는 일에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탁월한 모세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또 23절에서는 나이가 40세가 되자 ‘그 마음에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의 사정을 살펴 볼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동족이 고통받는 노동 현장으로 갑니다. 오늘로 치면 비정규직, 일용직, 외국인, 새터민, 아르바이트생들이 일하는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그 곳에서 이집트 사람에게 히브리 사람이 매를 맞는 것을 견디지 못해 이집트 사람을 쳐죽이고 모래 속에 묻어버립니다. 다음날에도 노동현장으로 나아갔는데, 이 번에는 같은 히브리민족 끼리 싸우길래, “왜 동족을 때리냐!”고 말참견을 하자, “언제 우리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로 재판관으로 세웠”느냐고 하면서 어제는 이집트인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 한다고 대듭니다. 이 사실이 바로에게 알려지자, 바로는 모세를 죽이려고 찿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을 칩니다. 모세가 민족에대해 눈을 떠 무엇인가 동족의 해방을 위해 나서보려고 하지만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죽음의 위협을 피하여 광야로 내 몰립니다.
  
   모세는 40년 광야 생활로 들어섭니다. 지난 40년 인생을 깨끗이 떨구기 위해 40년의 인고의 세월을 광야에서 지냅니다. 고난의 시간이요, 침묵의 시간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족의 제사장 이드로의 사위로 들어가 미디안 광야 구석구석을 돌며, 호렙산 등성이를 오르내리며 장인의 양을 칩니다. 1년도 아니구, 10년도 아니구, 매미가 일주일 지상부 생활을 위해 땅 속에서 7년을 생활한다고 하는데, 모세는 어두움 속에서 40년을 지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다니던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이전에 보지 못하던 놀라운 일을 목격합니다. 마른 가시넝쿨에 불이 확 하고 붙었는데, 그 넝쿨은 타지 않고 그대로 이고, 불만 활활 타오릅니다. 나이 80에 이 기이한 현상이 무엇인지 좀 더 알아 보려고 가까이 다가섭니다. 나이 80에 이 세상일에 놀라워 할 일이 있을까요? 80이 된 모세를 놀라게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세상 일로는 더 이상 모세가 놀라워 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 타지않는 가시떨기에서 세상일이 아니라 하나님체험을 한 것입니다. ‘왜’ 타지 않는지 ‘보리라!’고 합니다. 모세는 ‘왜?’라고 합니다. 그리고 ‘보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믿음의 시작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수도없이 ‘왜?'라는 질문을 하였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이런 광야로 내 모셨을까, 왜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구원하지 않는 걸까? 왜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실까? 모세는 그 ‘왜?’를 '타지않는 가시떨기'에서 본 것입니다. ‘왜, 타지 않는걸까?’ 하면서 ‘보리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고 알 수 있도록 힘쓰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타지않는 가시떨기 있는 것으로 가까이 다가섭니다. 그 때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생의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왜?’‘사무엘아, 사무엘아!’ 이 부름은 이스라엘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시몬 베드로야!’는 고기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인생의 역전이 되었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면서 1년, 세례도 받고, 보통 세례 받고 그만 중도하차 하는 경우가 가장 많은 것 같은데, 집사직분도 받고, 교사로, 성가대로 열심히 교회 봉사도 하다가, 조금 씩 시들해 지면서 교회를 떠납니다. 그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별 의미가 없다’, ‘신앙이 와 닿지 않는다’. ‘다니나 않다니나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그런면에서 먼저 믿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지 마치 난 향 과 같이 고운 믿음의 향이 새록새록 피어나야 하지 않나, 마치 깊고 맑은 샘처럼, 새벽의 정적을 깨우는 종소리처럼 그렇게 드러나야 하지 않을까요? 이 사람 좀 다르네, 이렇게 살면 망하지 않나? 이 사람 뭐하는 사람이래? 이래도 돼는거야? 거참 이상하네? ‘타지않는 가시떨기’같아서, 신비롭기 까지 합니다. 이 사람에게 접근해 옵니다. 예수 믿으라고 소리소리 질러도 돓아보지 않던 사람들이, 이 사람에게 다가옵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나 십습니다.
 
   그렇게 다가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신발을 벗으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고는 나를 떠나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거룩함을 본 것입니다. 그 거룩함에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고 죄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이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천사가 재단에 피어있는 숯불을 자기 입에 갖다 데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전 인격, 전 존재, 전 자아를 다 벗어버렸습니다. 80의 인생 동안의 모든 가치, 교육, 경험, 관계, ,  전 인격, 전 존재의 바탕이 흔들린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끊임없이 ‘왜?’라고 하며 하나님을 찿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찿은 것이 아니라, 여지껏 하나님이 자신을 찿고 부르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80년의 세월 속에 끊임없이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근데 이제야 ‘타지않는 가시떨기’ 불꽃을 보며 하나님이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이제서라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 생각, 우리 시간이고,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는 ‘그 때’입니다. 마치 포도주가 잘 숙성하여야 제 맛과 향과 색이 나듯이, 하나님의 멋진 동역자로, 일꾼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 바짝마른 가시떨기는 모세 자신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아무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가시떨기에 불이 붙은 것입니다. 사명의 불이요, 소명의 불이요, 하나님 나라의 불꽃이 제대로 붙은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타오른 불은 죽기까지 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염원했던 동족의 해방을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겠다고 하자, 자기가 감히 어찌 바로에게 갈 수 있으며, 어찌 히브리민족을 바로에게서 이끌어 낼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보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무화과 나무를 보며, ‘왜?’라고 하지 않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합니다. 왜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무너져야 되는지를 아직 모릅니다. 그러니 ‘어떻게?’라고 합니다. 아직 예수님의 제자들이 설 익었습니다.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40년의 어두움 속에서 자신을 환히 비추어줄 불꽃을 ‘타지않는 가시떨기’에서 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왜’라는 질문을 한다면, 여러분은 세상을 경이롭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속에서 얼마나 신비롭게 직접 일하시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왜?’란 질문을 지금 하고 있다면, 생명과 평화의 근원과 본질을 향한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7일 만에 세상을 창조했지?’, ‘어떻게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어?’ 와 같은 질문은 헬라적인 합리적, 논리적 사고구조에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하였을까?’ ‘왜, 물이 포도주로 변했을까?’라는 질문은 히브리적인 종교적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왜?’라는 질문을 통해 신비롭게 드러나십니다.

   늘 우리는 같은 사람, 같은 자리, 같은 예배, 같은 봉사를 하지만, ‘왜?’라는 질문을 통해 세상을 경이롭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아닌 다른 ‘타자’, ‘피조물’에대한 존중과 배려와 관심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스스로 지혜로워집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그 안에 소담하게 담겨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롭게 여기며, 모든 것을 오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난 것입니다. 이러한 불꽃, ‘타지않는 가시떨기 불꽃’은 바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르는 허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천사가 점화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타지않는 불꽃이 여러분 안에서 활활 타오르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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