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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메뚜기가 아니다(성령강림후열네째주일, 2014년9월14일)

하늘기차 | 2014.09.14 17:08 | 조회 2733


                                      우리는 메뚜기가 아니다
성령강림후열네째주일                                                                                                     민13:25-33
  
   이스라엘이 정탐한 가나안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땅의 성읍이 견고하며, 더욱이 주민들은 강하고 거인족이 살고 있어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들어갈 수 없다고 할 때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메뚜기 같다고 하며 잔신들을 비하합니다.
   
   작년인가요 싸이라는 가수가 ‘강남스타일’이라는 말춤추는 노래로 전 세계를 열광시켰습니다. YOUTUBE 접속 수가 최고였다고 하니 그 열기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류열풍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싸이가 처음 데뷔할 때 그의 CD 제목이 무언지 아시나요? ‘psy from the psycho world’입니다. ‘미친 세상에서 온 미친 놈’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세상이 미친 것 같은데 세상은 날더러 미쳤다고 한다’고 합니다. 미친놈 행세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스타가 되고, 돈도 버는 것입니다. ‘나도 삼류 너도 삼류, 모두가 삼류, 우리 모두 내숭떨지 말고 솔직해지자’고 하면서 삼류답게 놀아보자는 것입니다. 싸이의 노래와 춤이 청소년들과 염세주의적인, 패배주의에 빠진 젊은이들을 일시적으로 후련하게 해 줄 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허위와 허식이요, 거짓의 몸짓입니다. 우선 싸이는 삼류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는 미국의 버클리 음대에서 대중음악을 전공 했고, 부모님도 결코 삼류가 아니라, 지금의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나도 삼류, 너도 삼류, 모두가 삼류인생이라며 즐기자고 외치지만, 정작 자신은 기득권 일류입니다.

   자본의 시스템 속에서 망가져 가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풍자하며 댄스뮤직을 만들어 자본의 흐름을 타며 돈을 벌고, 명성을 얻습니다. 이 거대한 자본의 욕망 앞에 모두 지쳐, 무기력해져, 무너져 가는 사람들을 부추기며, 삼류를 괜찮다고 하는 것입니다. 메뚜기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즐기라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문화를 즐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싸이가 있습니다. 싸이가 아니라 ‘사이’입니다. 지난 1월에 우리 교회에서 싸이가 아니라 ‘사이’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유기농 펑크 포크 창시자’라고 자칭을 하는데, ‘싸이’는 스스로는 삼류가 아니면서 우리 모두 3류라고 거짓으로 우리를 매도하며 장사를 하는데, 이 ‘사이’는 삶에 있어서의 관계의 소중함을 노래 속에 해학적으로 담아내며, 우리의 평범한 삶의 소중한 가치를 아름답게 표현하는데, 그 날 어떤 분은 그 공연 속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구요, 저 역시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삶의 틀들은 점점 우리를 삼류로 몰아가는데, ‘사이’는 우리에게 삼류가 아니라, 아름다운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우리 윤빈이도 알고있는 ‘냉동만두’라는 노래 가사를 잠깐 보면요,

내가 부르는 노래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요리로 치자면 냉동만두, 냉동만두 같은 거죠
내가 부르는 노래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된장으로 치자면 미소된장, 미소된장 같은 거죠

진짜로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는
밥 딜런, 밥 말리, 존 레넌도 좋지만
부산 해운대 리베라 백화점 청소하시는
육숙희씨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노래 . . . 여기서 육숙희 여사는 ‘사이’의 어머니이구요, 그렇게 노동일 하시며 열심히 사시는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로, 삼류가 아니라 나의 삶, 내가 제일로 잘 할 수 있는 것을 펼치며, 자본에 노예가 되지 않고 산다는 노랫말입니다.

또 ‘당근밭에서 노을을 보았다’라는 노랫말을 보면
당근보다도 못 할 꺼면서
요렇게 조렇게 머릴 굴려서
당신의 시 보다도 시적인
대~단하시구려 시인 K
. . .
새우깡 라깡 데리다 주고 어머니 앞에서 고백해 봐요
당근 밭에서 춤추고 있는 노을은 노을보다 아름다워라
. . .
가난해도 괜찮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얘기를 해도 믿질 않으니 이것 참 환장할 노릇 . . .

   저는 ‘싸이’가 아니라 ‘사이’를 통해 위로를 받았고, 삼류가 아니라, 그렇다고 일류는 더 더욱 아닌 우리의 삶이 아름답다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자본이 이 세상을 주도하며 사람들을 메뚜기로 변질시켜버리는 속에서도 자본 아닌 삶을 선택하여 자유롭게 노래하며 살아가는 ‘사이’는 가짜가 아니라 진정 ‘사이’입니다. 우리 사이의 관계, 공동체를 넉넉하고 풍요롭게 해줍니다. 색과 향과 맛의 조화를 넘치게 합니다. 다양한 가치를 맛 보며 살게 해 줍니다.
   하여간 대부분의 정탐꾼이 스스로를 메뚜기라고 자신을 비하하였는데, 그러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들을 무어라고 이야기하고 있나요? 민14:7,8에서 보면 우리가 탐지한 땅은 매우 좋다는 것입니다. ‘좋다’는 하나님 마음입니다. 기독인은 세상을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봅니다. 나쁘고, 거짓되고, 부정하더라도,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좋은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을 분탕질하는 세력이 아무리 거인이라 할지라도, 자본이 거인의 진격으로 침략해 온다할 지라도, 우리는 메뚜기가 아니라, 8절처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야하는 우리로서 나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거기에 바탕을 두어야하는데, 자꾸 자신을 비하하거나, 자기를 과대포장하기도 합니다. 자기 모습 그대로 자기를 보아야 하는데, 오늘 이 시대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해버리고, 너도 잘 한 것 없고, 나도 잘난 것 없으니, 좋은게 좋은 것이고, 너 좋고, 나 좋으면 됐다며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부정하고, 적당하게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기독인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 사랑은 보지 못하고 가나안을 바라보며 자신들을 메뚜기 같다고 여깁니다. 한 술 더 떠 그 사람들도 우리를 메뚜기처럼 여길 것이라고 추론 까지 합니다. 자기를 삼류인간으로 끌어내리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땅을 우리에게 줄터이니 거역하지 말라는 것 맞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설교준비를 하면서 그 표현이 무언가 2%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아서 이스라엘이 이 지경이 되었고, 우리가 세상 속에서 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가 라는 것입니다. 무언가 쌍방의 소통이 없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짝 사랑 만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제나 한결 같이 사랑하는데, 그 사랑을 받는 이스라엘은, 지금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그 사랑을 받아, 말씀대로 실행하는가 라고 할 때 고개가 갸우뚱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구, 무언가 느낌이 안 와 그 본문 앞에 딱 걸렸습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 성경을 모두 찿아 읽어보았는데, 그러면 그렇지 우리 새번역이 좀 너무 편하게 번역하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번역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면’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면’입니다. 사랑하는 것과 기뻐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랑은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기뻐한다는 것은 개별적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서성이며 망설이며 주님의 기뻐하심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거인들 앞에 메뚜기떼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니, 거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기뻐할까요? 막1:11입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하나님 기쁨은 습3:17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
         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라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 보겠습니다. 렘9:24입니다. 근데 먼저 그 당시의 참혹한 모습을 21, 22이 말해주고 있어 먼저 읽겠습니다.
        “대저 사망이 우리 창문에 올라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
         는 자녀와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 너는 이같이
         이르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시체가 분토 같이 들에 떨어질 것
         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떨어지고 거두지 못한 뭇 같이 되리라”고 합니다. 이 죽음의 일들이 단지 고대의 때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생한 모습과 중첩이 됩니다. 4대강으로부터 세월호의 죽음에 이르기 까지 말입니다. 이러한 죽음의 상황 속에서 과연 하나님은 누구를 기뻐하는가 하면 바로 렘9:23, 24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
          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
          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고 합니다. 뒷 부분 한 구절을 새번역으로 풀어 보면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는 그 일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읽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아직 다 읽지 못하였는데,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라는 책입니다. 와타나베 이타루 라는 일본의 어느 시골에서 천연의 누룩과 효모와 균으로 자연농법의 밀가루를 발효시켜 빵을 만들고 있습니다. 2008년에 천연의 곰팡이가 잘 필만한 오래된 고택을 시골에서 택하여 그 곳에서 빵을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타루가 그렇게 천연의 빵을 만들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 유기농산물 유통회사에 취직을 하는데, 거기서 원산지 표시 허위, 뒷돈 거래 등의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고 빵집을 경영하고자 마음을 먹습니다. 4년 반 동안 지역의 빵집을 전전하며 제빵기술을 익히는데, 첫 빵집에서 새벽 2시부터 빵만들기를 시작하였는데, 아침 8시 시장기가 드는데, 밥먹자는 이야기를 안해 물어보니 알아서 스스로 주먹밥 같은 것을 싸와서 적당히 일하면서 먹는 것이 었습니다. 그리고는 오후 5시에 일을 끝내는 것이었습니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그렇게 일을 한다는 것에 어이가 없어합니다. 이타루는 왜 이렇게 죽도록 일을 해야하는지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타루는 자본을 깨달아 갑니다. 아! 노동자의 근무시간이 늘면 늘수록 이윤이 늘어난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잔업, 야근, 특근의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런데 자본과 노동 사이에 과학의 발전으로 각 산업분야에 기술혁신이 일어나는데, 이상한 것은 기술혁신을 통해서 노동자가 이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노동시간이 줄어 좀 더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에게 고스란히 그 이윤이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노동시간과 기술혁신이라는 자본의 흐름 속에서 이타루가 깨달은 것은 기술혁신을 통해 빵을 100개 만들던 것을 200개 만들면, 이전에 100원에 팔았다면, 소비자들에게 100원에 파는 것이 아니라 80원에 판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가게에는 그러한 기술, 기계가 없어서 여전히 100개 밖에 못 만드는데, 이 쪽에서는 기계를 도입하여 200개를 파니 100원 하던 것을 80원 만 받아도 다른 가게에서는 10,000을 버는데, 기계를 사용하는 가게에서는 80원 씩 받아도 16,000원을 번다는 것입니다. 무려 6000원을 더 버는 것입니다. 경쟁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가게에서도 얼마 후 기계를 도입하여 빵을 200개를 만드는데, 이 번에는 80원에 파는 것이 아니라 70원에 팔아도 100개 만들 때 보다 4000원을 더 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다른 가게에서 가격을 낮추고 하여서 결국 이윤이 기계를 들여놓기 전과 별 차이가 없게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타루는 중요한 아야기를 합니다. 싸구려 노동, 싸구려 음식, 싼가격이 상품을 잘 팔리게 하지만, 그 이윤이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 싼 상품이 가격경쟁력이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제 살 깍아먹기가 되어, 그 적자는 결국 노동자들의 몫이 됩니다. 그리고 빵공장에서는 아무리 오랜 시간 노동하여도 빵집 고유의 빵만드는 기술을 습득하지 못합니다. 이타루는 이러한 악순환을 벗어날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되면서 좋은 재료, 충분한 휴식, 즐거운 노동을 생각합니다. 지속 가능한 직업, 행복한 삶에대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빵에 교묘하게 사용하는 첨가제, 영향강화제, 농약, 색소, 인공이스트, 수입되는 밀가루를 거부하고 자연농법의 밀가루를 사용하고, 순 자연 발효, 자연균을 사용하여 빵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물질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부패하는데, 인공적으로 배양된 이스트는 밀가루를 일정 기간 썩지않게 하여 인공 식품 가공물들을 부패시키지 않게 하여서 일반 가게에서 사고 파는 싸구려 먹걸이들은 소비자들의 건강을 헤치며, 또 먹거리를 만드는 사람에에게 있어야 할 기술과 존엄을 빼앗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타루는 이러한 인위적으로 부패하지 않게하여 이윤을 확대하려는 것이 자본의 논리라고 하면서, 돈이야 말로 모든 피조물들이 시간이 흐르면 자동으로 부패하는데, 자본은 부패하기는 커녕 끊임없이 돈을 확대하며 끊임없이 불러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타루는 먹거리를 만드는 사람의 노동자의 존엄성, 소비자의 건강을 지키는 자본의 논리와 반대되는 거꾸로의 빵만들기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의 밖으로 탈출을 시도하여, 천연의 균들이 만들어내는 기분좋은 빵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빵집경제를 이타루는 ‘부패하는 경제’라고 부르면서 그 핵심은 발효, 순환, 이윤남기지 않기, 빵과 사람 키우기 라고 합니다. 그 빵집에서는 빵을 30가지 종류를 만든다고 합니다.

   근데 어느 신문 기자가 그 빵집을 찿아가 인터뷰를 하였는데, 매출과 순이익이 얼마인지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연매출이 2013년에 2억7천 만원이었고, 직원이 8명인데, 직원 월급은 1인 당 연봉이 2,000만원이고, 부부는 둘이서 3,000만원이라고 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왜 당신들은 직원들 보다 적게 받느냐고 물으니, 직원들은 4일 일을하고, 우리는 3일 일을 하기 때문에 저희 부부가 받는 임금이 직원들 보다 적다는 것입니다. 정말 자본과 거꾸러 가는 빵집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보다 더 급히 꺼꾸러 달려갑니다. 예수님이 포도원 이야기를 할 때 마지막 결산을 하며 하루 임금을 8시간 일 한 사람과 1시간 일한 사람을 같이 주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 나라를 우리의 지혜로는 알 수도 없고, 우리의 힘으로도 들어갈 수 없는 신비로운 나라입니다.

  하여간 저는 이 이타루 빵집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늘 이 시대에 메뚜기 처럼 살지 않을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가를 봅니다. 오늘 자본의 전횡, 오직 한 가지 가치 만을 유일하게 허락하는 자본의 흐름 속에, 어떻게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그리고 나누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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