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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복을 받은 사람(성령강림후열세째주일, 2013년9월7일)

하늘기차 | 2014.09.07 10:59 | 조회 2416

                                                         주님께 복을 받은 사람
성령강림후열세째주일                                                                                                                                             창26:26-33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들에게 내리신 복은 물질적인 풍요, 자손의 번성, 땅의 지평이 넓혀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정말 아브라함의 재산은  조카 롯과 싸움을 일으킬 정도로 불어나 서로 경계를 긋고, 나뉘어야 할 정도로 넘처납니다. 아브라함이 한 창 하나님의 축복으로 풍요로워지기 시작할 때, 가나안 중동 지역에 큰 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을 통해서 뺏고 빼앗깁니다. 이 싸움 와중에 조카 롯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가나안 왕들에게 포로로 잡혀갑니다. 조카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군사를 거느리고 추적하여 그들을 다마스커스 북쪽으로 몰아내고 빼앗긴 모든 것들을 다시 찿아옵니다. 롯이 속해있던 소돔 왕이 아브라함을 영접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돌려주고 빼앗아 온 물건들은 다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대의 것은 실오라기 하나나 신발 끈 하나라도 가지지 않겠습니
         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 덕분에 아브람이 부자가 되었다고는 절
         대로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 당시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번성, 풍요가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인간의 지혜나, 능력, 노력이나 관계 그 어떤 것도 개입해 들어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놓쳐서는 안되는 부분입니다. 풍성함, 풍요로움은 물론이고, 잊지 말아야할 것은 내가 받은 생명은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개입이나 지혜로 얻는 것이 아니라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의 물질적 풍요의 축복은 역설적으로 아들 이삭의 탄생에대한 이야기에서 멈추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풍요로움을 자식이 없어 상속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종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세우려 하기도 하였고, 하나님의 축복이 인간의 방법과 지혜나 능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풍요를 지키기 위해 부족을 다스릴 후계자가 필요했고, 그래서 몸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인간적인 방법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새롭게 하나님과 처음 갈대아 우루를 떠날 때의 약속을 갱신을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 약속에대한 믿음을 인정해 줍니다. 성경은 그 것을 ‘그 믿음을 의롭다’라고 인정해 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을 세속적인 축복으로 변질시키려 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약속을 놓고 화해를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풍요로움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확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창11:30에서 볼 수 있듯이 아내 사라는 임신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아이를 잉태치 못하는 주제’는 믿음의 조상들의 트랜드입니다. 이삭, 야곱 모두 그 부인들이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생명을 낳지 못하는 석녀입니다. 이 모습은 우리 인류의 모습의 징표입니다. 인류가 참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평화, 사랑, 관용, 기쁨, 소망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평범한 한 사람을 택하여 은혜로, 선물로 값없이 생명을 잉태케 합니다. 이 생명 탄생의 주제는 출애굽기와 신약을 거쳐서고 마지막 계시록을 통해서는 생명을 잉태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방해하는, 생명을 죽이는 세력과의 싸움으로 확대됩니다. 유아살해입니다. 예수님도, 모세도 그리고 계시록을 통해서도 생명은 극적으로 구출이 됩니다. 생명은 인간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과 지혜와 능력을 통해 태어나고, 자라며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제거하는 싸움의 주제는 오늘 이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이 땅 4대강에서, 제주도 강정의 구렁비 바위, 거제도 팽목항 앞 바다와 광화문에서 생명을 잉태하느냐, 생명을 죽이느냐 하는 싸움은 계속이 되는데, 이 생명을 낳는 주제가 인간의 힘겨루기로 보여지는 것 같지만, 이미 출애굽의 바로와 모세의 힘겨루기를 통해서 상징적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일하십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인이며 복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축복을 말년에 한 껏 누리는데, 하나님은 그 풍요를 다른 쪽으로 돌리십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모든 것입니다. 그동안 받은 모든 은혜, 풍요의 정점은 아들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지 않고, 후계자로 세워 부족을 잘 다스려 그 부와 땅의 경계를 더 넓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눅12에서 어떤 부자가 창고에 그 해의 소출을 모두 다 쌓아두기 위해 창고를 더 크게 지으려고 할 때 예수님은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이 그 영혼을 도로 찿는다면 그 풍요로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라고 질문을 하며 이 사람을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께 부요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부요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알아봅니다. 그러나 거짓 축복은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당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이삭을 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스마엘과 이삭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이삭과 이스마엘의 차이가 여기서 극명하게 갈라집니다. 하나님은 쫓겨나는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물질적 풍요를 약속하셨거든요. 당시 중동의 풍요의 신인 바알 숭배자들과 아브라함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 풍요로움의 축복의 방향을 틀어버리셨을까요?

   추석 명절입니다. 추석 명절의 ‘더도 말고 덜도 말라’는 덕담에는 놀라운 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인류 보편의 복입니다. 추석 보름달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이 추석에 여러분의 가정에 더도 덜도 아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의 재산이 점점 커집니다. 근데 그 반대로 생각하면 다른 누군가가 적게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유한한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에게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관리하고 유지하며 확장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타협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축복은 개인, 부족의 풍요로움에서 서로와 서로의 경계, 한계를 존중해 주는 평화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 축복은 이미 에덴 동산의 선악과를 통해서 인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한계를 넘어가지 말라는 것은 다른 타자의 실존,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이 지금 도를 넘어 회복이 불가능한 점을 넘어가려 합니다. 국가 간에, 자연과의 관계에서 자본의 힘에 붙들려 회복 불가능의 상태로 돌진하고 있지않나 우려됩니다. 터닝 포인트를 넘어서면 돌아서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마치 배가 기울어지는 균형을 넘어가면 침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영적인 회복 불가능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창세기의 부제는 늘 이야기하지만 그 주제가 평화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의 축복을 보면 어느세 벌써 물질적 풍요에서 평화로 넘어가는 것을 이야기 곳 곳에서 보게됩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의 풍요가 아니라 모든 것의 풍요, 즉 조화,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꼭지점을 이루고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통해 사악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신비로움을 타고 확장되어가고 있습니다. 계12장은 그 생명을 살리느냐 죽이느냐의 싸움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시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으로 여자에게서 태어난 생명이 보호받습니다.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물질과 더불어, 단지 개인과 부족, 나라가 아니라 인류를 향하고, 자연과 우주 역사를 향하여 지평을 넓힙니다. 아니 이미 태초부터, 창조되기 이 전부터 그 지평은 평화, 조화였습니다. 그 조화, 평화가 깨지자 하나님은 한 사람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하십니다. 그래서 가족, 친척 본토를 떠나라 한 것입니다. 떠나지 않으면 그 풍요로운 하나님의 평화의 축복은 개인화 사유화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드렸지만 물질적 풍요는 영적 풍요로 넘어가야 맞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끝없이 우리를 욕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시는 영적 축복은 넘치고 넘쳐도 아름답습니다.

   창세기의 영적 축복, 영적 풍요로움, 그러니까 조화, 다시말해 평화를 믿음의 조상인 야곱과 에서의 화해를 통해입니다. 창33:10입니다.
        “형님, 형님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
         십시오.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
         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요셉이 12형제와의 화해는 인류의 유일한 생존을 위한 보편적 가치를 말해줍니다. 또한 창45:7,8절에서는 요셉과 11형제들이 화해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
         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
         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
         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
         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
         로 세우신 것입니다”
 
   평화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 평화입니다. 이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사랑으로 풀어내는 싸움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꺼리도 없습니다. 자꾸 이 평화, 생명의 싸움을 종교적 언어로 제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프란체스코가 어느 특별한 수도회나, 어느 제도에 속하지 않고 자유로이 자연 속에서,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며 우주와 역사 그리고 자연 속에 계시는 하나님과 조우하며 대화한 것은 그 평화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생명과 평화의 축복은 야곱의 아들인 요셉의 꿈을 통해 그 지경이 확장되어 이스라엘이 400년 동안 이집트에서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이 섭리와 경륜을 우리의 합리적 판단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뛰어 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뜻이요, 신비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러한 평화의 축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26:1에 보면 이 전에 아브라함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이삭 때에도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흉년이 반복됩니다. 흉년이 들면 생명이 살 수가 없습니다. 아이를 잉태하지 못하는 주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가믐을 피하여 이집트로 이민을 가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이집트로 가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살라고 한 이 땅에서 살아라.네가 이 땅에서 살아야, 내가 너를 보살피고, 너에게 복을 주겠다”고 합니다.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이집트로 가지 않고 그랄에 그대로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어 물이 없는데, 신비롭게도 이삭이 그흉년든 황폐한 곳에서 우물을 팝니다. 성경을 보니 무려 5번이나 우물을 팠는데, 그 때 마다 모두 물이 나왔습니다. 물이 없는 땅에서 물이 나온 것입니다. 이 물은 말씀의 물입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고백함으로 얻은 물입니다. 마른 땅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본 블레셋의 아비멜렉왕은 “주님께서 당신과 함게 계심을 똑똑히 보았”다고 합니다. 또 “당신은 분명히 주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정말 이삭은 평화의 사람입니다. 매 번 블레셋사람들이 이삭이 판 우물을 매꾸거나, 빼앗거나 하지만 이삭은 그 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이웃 블레셋과 평화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때처럼 하나님은 이 평화를 다시 뒤집어 엎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평화가 지금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흐르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축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상속입니다. 이삭은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당연히 상속자는 맏아들 에서입니다. 그런데 그 질서가 깨집니다. 아버지 이삭이 아들에서에게 내가 이제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모르니, 죽기 전에 너에게 축복을 해 줄터이니, 사냥을 하여 그 짐승으로 요리를 잘 해 가지고 와서 나를 즐겁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아내 리브가가 엿 듣습니다. 그리고는 야곱을 에서처럼 위장시켜에서 대신 축복을 받습니다.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잘 알겠지만 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자가 받을 축복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에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축복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어머니 리브가와 축복을 받는 시나리오를 짭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형 에서에게서 교묘히 넘겨 받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아버지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사기행각을 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축복을 합리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멈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축복은 신비로운신 하나님에게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또 변하지 않고는 축복도 없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사과 떨어지듯이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속은 유전이 아니라 힘써 받아야할 상속입니다. 또한 단순히 개인이나 가족 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섭리를 따르다 보면 순탄치 않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장자인 에서에게 축복을 주려고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계획이 참담하게 무너집니다. 찰떡 같은 축복이 가정의 불화를 만들어냅니다. 신21장에도 보면 반드시 맏아들이 상속자가 되어야한다고 못을 박고 있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그 법을 넘나듭니다. 창27:33에 보면 축복이 에서가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알자 이삭은 충격을 받고 부들부들 떨었다고 합니다. 에서는 축복을 달라고 절규를 합니다. 축복을 내리고 싶은 아버지와 그 축복을 받고 싶은 아들 사이에 Phatos, 혼돈이 생깁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꿈이 산산조각이 납니다. 기존의 질서를 지키려는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바램이 한 순간에 다 무너져 내립니다. 이미 하나님은 벌써부터 야곱의 축복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에서는 그것을 감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나이가 늙어 미쳐 깨닫지 못했든지.

   하여간 그 평화의 사람,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는 사람, 자신을 내어놓는 이삭의 말년입니다. 어찌 하나님의 축복을 인간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으며,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이삭도 리브가의 행동을 보면 내심으로는 에서 보다는 야곱이 더 적격자인 것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보다는 단지 가부장적인 사회적 관행에 따라 자기 자신에 충실하려 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인류, 역사, 우주, 온 피조물, 소외되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 향하여 마음을 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의 축복이 더도 덜도 아닌 이 한가위 추석 명절에 여러분과 여러분들의 가족에게 넘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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