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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성령강림후열두번째주일, 2014년8월31일)

하늘기차 | 2014.08.31 14:38 | 조회 2485

 

                                                                              어떤 사람
성령강림후열두번째주일                                                                                                                                        눅10:29-37
 
   시작은 영생에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였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냐?”고 묻자,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 
         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 같
         이 사랑하여라’하였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또 주님께서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율법사가 한 마디 더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영생이 무엇인지 몰라서 물었을까요? 이 사람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 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세상의 종교나 철학과 달리 성서가 말하는 영생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옵니다. 그 관계를 구약의 율법사들은 오직 율법으로 만 봅니다. 그런데 영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창세기에서는 에녹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하늘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예언자 엘리야도 죽음없이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은 다 죽습니다. 죽음의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습니다. 죽음은 피조물의 피조물 다움의 정체성입니다. 짧다고 하면, 아주 짧은 시간을 생명으로 살다가 그 다음에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죽음이 없으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될까요? 죽지 않고 이 육신으로 영원히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서의 영생은 불사가 아닙니다. 요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믿음을 통해 관계하고, 그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또 요17:3에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죽은 후에 천국 간다고 하는 것은 영생을 아주 편협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죽음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할 때 요11:25,26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
         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찿아오는 생명의 모습입니다. 오직 한 분 창조주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아버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국을 자꾸 죽어서 가는 곳이라 하며 여전히 공간적으로 만 이해하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의회 의원이며, 율법사 바리새인인 니고데모하고 대화를 나눌 때 이 우주와 역사, 생명과 사랑,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에대해 자꾸 종교적으로 예수님께 이야기를 하려고 하자 예수님은 요3:12,13에서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
         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못을 밖습니다. 하늘 이야기 그만 하라는 것입니다. 전혀 모르면서 추상적으로, 있지도 않은 말 꾸며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간혹 갔다 왔다고 하면서 자기가 본 천국에대해 얼마나 편협하고 여전히 더 많이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표출하는지 모릅니다. 오직 하늘에서 내려온 자는 아들 예수님 밖에 없다는 말씀은 예수님 만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관계를 통해 누리는 생명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영원히 산다는 이 영생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대해 우리의 이성이나, 감성, 철학과 도덕, 종교, 제도를 통해서는 전혀 풀어낼 수 없어 비유로 말씀해 주십니다. ‘씨뿌리는 자’, ‘가라지’, ‘포도원’, ‘착한 종’, ‘감추인 보물’, ‘겨자씨’, ‘누룩’, ‘그물로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 등 , , , 그런데 오늘 이 율법사는 이 영생을 구약의 개념으로 특히 율법으로 풀어내려고 합니다. 문제는 율법을 그 율법의 정신이나, 뜻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만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율법사는 ‘영생’에대해 물을 때, 이미 그 답을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정말 영생에대해 모르면, 우리는 ‘영생이 무엇인가요?’하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묻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무엇을 해야 했고, 그것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더 잘 행하기 위해 십의 일, 특히 안식일, 제사드리는 방법, 정결예식 등 아주 세분화 하여, 자칫 한 눈 팔면 행할 수 없을 정도로 규례와 조항을 수 도 없이 명문화하여 지켜 행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율법사가 ‘무엇을 해야’ 라고 물은 것은 역으로 그러한 모든 규례와 조항을 결함없이 잘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마음을 다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닿는 것 이라고 하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그리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는데(신6:5;레19:18), 저는 이 본문에서 이 율법사가 보통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물을 때, 이 영생을 사랑하는 것과 연결하는 것을 보면 이 율법사의 행함이 사랑에 닿아있고, 그렇다면 이 율법사는 영생에대해 율법 안에서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한 발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자,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바로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사들의 행함의 한계를 봅니다. 이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웃이 아마 여러분들도 짐작이 갈 것입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을 쉽게 이해하기위해서입니다. 이 율법사는 오늘로 치면 법조인이지요. 판사이든지, 검사이든지, 아니면 기득권에 붙은 변호사인지, 이 분들의 거처는 강남, 그리고 강남의 대형교회에 다닐 것입니다. 이러한 법조인의 이웃은 누구일까요? 오늘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내 이웃은 누구인가요?’하고 묻고 있습니다. 내 이웃을 내가 아는 것 아닌가요? 왜 굳이 예수님에게 내 이웃이 누구인지 물었을까요? 예수님께 자신의 존재감을 보이려는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뉴스에서 강남 교회의 권사님들이 어느 뷰티 살롱에 모여서 자녀들의 혼담과 자동차와 아파트와 밍크코트, 명품에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도 우리의 일상을 이야기 하지만 그 경제적, 사회적 위치나 자리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이 일상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의 영향렫이나 그 파급은 적지 않는 것입니다.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사회적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그러한 질서는 없습니다. 오늘 율법사가 이야기하는 이웃은 그렇게 함께 가진 것을 풍요롭게 나누는 가까운 교회 성도들, 서로 혼담과 자본의 흐름의 정보를 교환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겟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저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이웃은 누구인가요? 여러분의 가족은 누구인가요? 여러분의 교회는 누구인가요? 한 번은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고 계시는데,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이 예수님에게 찿아왔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온 것을 보면 아마도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십습니다. 제자들이 가족이 찿아 왔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고 하시며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고서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세상을 바라보는 지평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테두리 안에 갇히어 계시지 않습니다. 아마 주님이 이들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 라고 하신 말씀에는 더 넓고, 깊은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이 우주 전체 삼라만상을 가족으로 여긴 것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체스코는 예수님처럼 그렇게 자연과의 합일을 살아낸 분으로서 예수님의 그 가족의 개념을 그대로 보았고, 그렇게 살아간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우리는 벌써 아메리칸 인디언, 아프리카 토인들, 우리 시골의 어머니에게서 온 세상을 한 가족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쉽게 인디언들과 토인들은 이 땅, 흙을 어머니라 보았습니다. 이 어머니를 언젠가부터 살해하기 시작했고, 이 땅에 사는 무수한 자연의 형제, 자매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학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4대강 사업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구제역가축 몰살, 조류 독감으로 인한 조류 몰살 등,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 갓 태어난 송아지를 처참하게 살해하는 모습을 보고 도저히 우유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대량 사육, 대량학살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머니인 자연과, 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온갖 자연의 형제 자매를 몰살, 학살하고 있습니다. 멈추지 않는다면 이 것을 우리 인간이 그대로 받을 것입니다.

   성전에 대해서도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미 하나님 떠나고 안 계신 눈에 보이는 성전에 매여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지으시겠다고 하면서 성전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대해서도 율법의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키려 했던 종교인들에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 했습니다. 주님은 문자를 넘어 온 우주와 역사, 생명과 정의 와 평화를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에 언급되는 제사장과 레위인에대해서는 예수회 소속의 리차드 로어 신부의 이야기로 대신하겠습니다. 리차드 신부는 우주가 처음 창조될 때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가 본래부터 온 우주 삼라만상 안에 편만하게 계셔서, 신앙에 열심인 사람들에게 조금 씩 베풀어 주거나, 완전한 사람에게 상으로 베푸시며, 빈 공간을 채워주는, 교회에서만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드러면서 프란체스코의 신비가 엘리트주의나, 개인주의를 철저하게 극복하는 이유는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대할 것을 강직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번의 프란체스코 교황이 오셔서 세월호 분들을 끝까지 품으며, “인간적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 없다”고 한 것이 어떤 신앙을 타로 온 것인 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고통,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고통과 연대하는 것이 프란체스코의 출발점이지, 결코 사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을 구하는 것이 그의 출발점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프란체스코의 묵상의 삶은 단순한 내성(內省), 달콤한 경건, 사적인 구원, 혹은 반(反)사회적이거나 사유화된(privatized) 메시지로 빠져들지 않았습니다. 묵상의 삶이 그런 사적인 차원에 함몰되면, 나는 다른 모든 것들과 연합하지 않은 채(역사, 온 우주 만물, 그리고 오늘 이 시대의 삶), 나 자신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상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체스코의 모토는 “나의 하느님과 만물”(Deus Meus et Omnia)이라는 것입니다. 부연한다면 리차드 로어는 프란체스코가 가난한 이들과 가난에 대해 그토록 철저했던 이유는 영성이 타자들과 분리되고 섬김이 없고 구체적인 사랑이 없으면 흔히 사람들을 엄청난 에고 팽창(ego inflation)과 환상으로 인도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남들로부터 거룩하고, 특별하며, 올바르고, 안전하거나 높은 도덕적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받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에고에 대한 깊은 자기애적(narcissistic) 호소력을 갖고 있어서, 이런 잘못된 동기들은 하느님에 관한 장광설과 예배를 멋대로 이용하면서 하느님을 실제로 회피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었냐고 물었을 때,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자비를 베푼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어떤 사람’입니다. 그리고 부연 설명을 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광화문에 안산에, 팽목항에, 각 도시 지역 지역 마다에서 어떤 사람들이 강도 만난 세월호 침몰로인해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가족의 이웃이 되고 있습니다. 33, 34,35절에 보면 이 어떤 사람이 어떻게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먼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리처드 할로웨이 라는 분은 이 측은하다는 표현이 너무 완곡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독문을 함게 읽었는데, 시72편의 말씀인데, 같은 시로 된 교독문인데도 찬송가 교독문은 마음에 와 닿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에서 그대로 발췌하여 읽으니 그 구구절절함이 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번역은 참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측은하다’는 말은 실제 헬라어에서는 ‘애간장이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시대에는 피 흘리는 것 자체가 부정이어서 사람들은 그 강도 만난 자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지만, 이 사마리아인은 ‘애가 끊어져’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당시의 율법의 법도와 규례를 뛰어 넘어, 그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따라서, 그래서 본문에서 처럼 ‘가까이’ 간 것입니다.

   이렇게 세월호 참사를 당한 가족들에게 어떤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율법을 넘어 섰다고 했는데, 오늘 이 어떤 사람들은 지금 거짓 언론과 T.V등 대중매체들은 대통령에대한 가짜 동정심을 등에 업고 가족들을 매도하는데, 그리고 사법체계와 소위 종북몰이, 빨갱이라는 거짓 이데올로기로 모두 덮어버리려고 하는 때에, 정치가 이 아픔을 평화의 몸짓으로 풀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어서 시간 만 지나가면 될 것이라는 ‘가만히 있으라는’ 묵언의 연계를 뚫고, 가족들이 있는 광화문, 안산, 팽목항, 청와대 앞 청운동 사무소에 까지 가까이 가서 만나고 위로하고 품어주고 합니다. 오늘 34절 말씀을 보면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어떤 사람’입니다.

   이 어떤 사람들 중에는 이영호님을 돌본 의사, 거짓 비방에서 이영호님을 보호하는 변호사, 30일 단식을 선언한 방인성 목사님, 스님, 학생, 영화인, 연극인, 연에인, 동네 아기 엄마, 할머니에 이르기 까지 그 거짓을 뚫고 가족들에게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런 중에 엊 그제 방송인 중에 한 사람인 김제동씨가 청운동 가족들을 찿아가서 위로를 나누었는데, 이 김제동씨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이 사람이 세월호 가족들에게 이웃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촌에서 자랐는데요. 집에서 기르던 송아지 한 마리만 팔아도 그 어미 소가 밤새 울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게 시끄럽다거나 하지 않고, 다들 소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유족들에게 '이제 그만 좀 하라'고 하는 건 맞지 않습니다. (슬픔의) 기한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눈물이 멈출 때까지입니다.”

“수학여행은 놀러 가는 게 아니라 학습의 연장이죠. 그럼 그 아이들을 지켰어야죠. 석유도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기둥이 될 아이들을 놓쳤으면 누가 놓쳤는지 얘기해줄 수 있어야죠. 배가 침몰한 건 교통사고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아이들을 구조하지 못한 것은 국가의 책임입니다. 이건 곧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김제동씨의 목소리가 가장 높아진 건 '(아이들이) 국가유공자도 아니고 놀러 가다 죽은 것'이라는 일부 악플에 관해 언급할 때였습니다. 그는 "애들 없는 국가가 어딨냐고 하면서, 우리 아이들이 커서 군인도 되고, 경찰도 되고 나라를 지킬텐데, 다 커서 연애도 하고 했을 것"이라며 "아이들이 바로 국가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김제동씨의 이야기는 이웃이 무엇인지, 정말 이웃으로 다각가지 않으면 그러한 말이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이 누구냐고 물을 때, 이 바리새인은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대답, 생각, 논리에 있어서, 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완벽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신앙의 함정이 무엇인지, 아씨시의 프란체스코가 왜 가난과 고통과 함께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대변해 줍니다. 그러자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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