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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궤를 가지고 오라... 말라’(성령강림후열한번째주일,2014년8월24일)

하늘기차 | 2014.08.24 15:25 | 조회 2333



               ‘율법궤를 가지고 오라... 말라’
성령강림후열한번째주일                                                                                                                                       삼상14:16-23

   몇 주 동안 사울왕에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실 별로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우리의 치부를 들추어 내는 것 같아서, 자꾸 죄에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덕이 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어내려가는 동안에 전에 못 읽었던 사울의 또 다른 모습을 보고 마음에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미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급한 마음에 제사를 드리는 죄를 범한 터 였는데, 13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군대가 얼마나 허술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19절에 보면 이스라엘에는 대장장이가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쇄를 녹이어 주물로 본을 떠 농기구나 병기를 만들 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블레셋과 주변의 부족들이 이스라엘을 고립시킨 것이지요. 자신들은 다 철기를 사용하면서, 이집트에서 급히 벗어나 가나안으로 들어 온 이스라엘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철을 다루는 기술을 전수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보습이나 곡괭이를 벼리는데 삼분의 이 세겔9(24만원 정도), 도끼와 낫을 벼리는데 삼분의 일을 내고 농기구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니 칼과 창은 국물도 없습니다. 그러니 전쟁에 나가 싸우는 군인들에게도 사울과 요나단 외에는 칼과 창이 없습니다. 다윗이 시냇가에서 물맷돌을 들고 골리앗에게 나아간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하여간 오늘 말씀에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이 단기 필마로 블레셋을 급습하여 블레셋 진영을 초토화 시킨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실 사울이 약속을 어기고 먼저 제사를 드리는 죄를 범하고 사무엘에게 심한 면책을 받은 후여서 사울과 이스라엘은 엉거주춤한 상태였습니다. 분노하여 이스라엘의 마음을 모아 적을 물리치던 영적 기백이 한 풀 꺽인 상황이었는데, 아들 요나단이 무기를 든 병사와 함께 블레셋 진영을 급습하여 모두를 격멸한 것입니다. 성경은 겨릿소 한 쌍이 반 나절에 갈아 엎을 만한 들판에서의 전투였다고 합니다.  

   요나단의 살신성인의 용기로 이스라엘은 다시 힘을 얻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영은 산지여서 블레셋을 내려다 보는 형국인데, 블레셋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한 눈에 내려다 보던 파숫군이 이 사실을 사울에게 알렸습니다. 사울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우리 진영에서 빠져 나갔는지를 조사해 보라 합니다. 살펴보니 아들 요나단이 치고 나간 것입니다. 사울로서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제사장 아히아에게 율법궤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가지고 오라 합니다. 제사장과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했던 것 같은데, 그러한 와 중에 블레셋이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못 잡고 헤메는 모습이 사울에게 포착이 됩니다. 그러자 사울이 제사장에게 궤를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합니다.  가지고 오라 했다가,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소지품 처럼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오라 하였는데, 70인 역 성경에서는(최초로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서)율법궤가 아니라 에봇이라 되어있습니다. 우리 새번역에도 각주에서 ‘에봇’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리로 가지고 오라는 동사는 무거운 율법궤 보다는 가볍게 가지고 올 수 있는 에봇에 맞는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당시 여호와의 뜻을 물을 때 사용된 도구는 ‘하나님의 궤’가 아니라 에봇이었습니다. 잠 16:33에 보면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더고 합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걸치는 외투인데 그 외투의 가슴에는 흉패가 있어 그 안에 ‘우림과 둠밈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도구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 대제사장 때 율법궤를 전투하는 진영으로 가지고 왔다가 빼앗기는 낭패를 당했기 때문에, 그러한 잘 못을 다시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여하간 율법궤를 기럇여야림에서 기브아로 잠시 가지고 올 수도 있었을 텐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 하다가 전세가 이스라엘 쪽으로 넘어온다 싶으니, 그만 도루 가지고 가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는 순간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울이 왜 이렇게 망가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겸손한 사람인가요? 오히려 다윗은 이스라엘에 처음 등장할 때 골리앗을 물리친 영웅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더 망가지기 쉬울 것 같은데, 사울의 외적 겸손은 자기를 감추는 겉 모습이 아니었나 십습니다. 사울은 이렇게 계속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마음을 다하여 섬기라, 즉 하나님께 닿기 보다는, 그 마음을 자신과 사람들에게 돌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처음에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끝 까지 나귀를 찿아 나서는 모습, 그리고 그 나귀를 찿을 때, 사환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 사무엘이 우림과 둠밈을 통해 제비뽑기로 자신을 왕으로 지목했을 때에도, 자신의 가문과 혈통을 낮추는 모습, 하나님의 영성에 취하여, 자기를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놓는 모습, 또 왕으로 뽑혔을 때,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에 말 없이 자신의 불편함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모습, 야베스가 공경에 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보여준 의로운 분노, 승리 후에 정치적 보복을 하지 않는 모습 속에 정말 하나님과 그 마음이 닿아있는 사울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입니다.
  
   그 후 사울은 자기의 본래 모습에 다가서지 못 한체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의 겸손하고 착한 행실은 어찌보면 겉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본래의 자기 모습에 다가서야 하는데, 대부분 겉에 둘러쌓인 껍데기 모습에 충실하고 그 껍데기 모습이 자신의 본래 모습인 양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아니 자기 본래 모습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사울은 자기 겉 모습에 호도되어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면서 나중에는 충신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까지 하였고, 더 나아가 무당에게 찿아가고, 급기야 스스로 생명을 끊습니다. 사실 사울의 안 좋은 모습을 보며 본문, 설교 제목을 잡을 수 없어 이리저리 이틀을 소비하다가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여전히 자신을 기만하는 사울의 모습을 보며 화가 났고, 그래서 이 말씀으로 본문을 잡았는데, 그러나 다시 보면, 그 모습이 내 모습이라는 생각에 조심스레 왜 사울은 자기 마음과 생각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나 하는 생각에 골몰하였습니다.

   그러는 중에 최근 한국기독교연수소 김준우 교수가 곧 번역에 착수할 ‘Immortal Diamond’(우리의 참된 자아를 찿아서)라는 책을 소개하는 글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책을 쓴 리차드 로어 신부는 예수회 소속인데, 이 책에서 신부님은
        ‘회칠한 무덤처럼 단단하고 완악한 우리의 거짓 자아(에고)는 너무나 방어
         적이며 어떤 변화도 싫어해서, 그것을 깨어내는 데는 엄청난 충격(추락이
         나 사랑)이나 오랜 자기 성찰의 수련이 필요하다’ 역설하면서
         ‘제도종교들이 인간의 거짓 자아(에고)를 팽창시켜 바리새인으로 만드는
         경향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거짓 자아를 깨고 참된 자아를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프란체스코의 다른 사랑’이라는 책에서 유혹에대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수도원의 유혹이며,
          금욕주의는 사막의 교부들의 유혹이며,
          도덕주의나 독신주의는 가톨릭의 유혹이며,
          지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신학생의 유혹이며,
          사적인 경건과 오류 없는 믿음은 개신교의 유혹이며,
          우리 모두에게 가장 흔한 유혹은 올바른 집단에 속하고 올바른 제례를
          드리는 것을 하느님과의 개인적 만남 혹은 삶을 변화시키는 만남의 대체
         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인간의 껍데기의 완강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 뿐 아니라 나 자신, 우리, 신앙인, 아니 인간은 이러한 비 본래적인 모습에 천착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허탈감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공허한 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우리들에게 성경은 끊임없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고 합니다. 마음을 다 한다고 할 때, 그 다함은 우리 기독인에게 있어서는 그 마음이 하나님께 닿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주로 간절할 때, 마음을 다합니다. 그 때 우리 성도들은 그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에서 부족함이 없으면 마음을 다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렵고 힘들 때, 마음을 다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닿고자 합니다. 우리의 아픔과 고통이 신앙적으로는 하늘과 닿을 수 있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12년간 혈루증 앓던 여인이 그 병을 고치기 위해 있는 재산 다 탕진했지만 아무 효력이 없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는데, 예수님이 자기 마을로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 찿아 옵니다. 막5을 보면 이 여인이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라고 도객을 합니다. 근데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4절에 보면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고 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닿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실천한다는 것은 그 당시 주님이 칭찬하였듯이 믿음의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었는 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율법은 여인이 정기적이지 않은 때에 피를 흘리는 것을 죄로 여겼고, 그래서 격리 시켜야 했기 때문에(레 15:19), 혈루증 앓는 여인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아간다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을 부정하게 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돌 맞을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은 모든 것들을 마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닿으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출혈이 멎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치 옷을 만지자, 전기가 찌리릿 하고 오면서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진 것은 신앙의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막6:56에서도 보면 예수님이 마을을 다니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그 옷술만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하였고, 그렇게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겉옷에 달린 옷술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영적 경륜이나, 능력을 드러내는 상징물이기도 하여서 랍비들은 겉옷의 귀퉁이의 술을 길게 늘여 발에 밟히기 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십자가가 마치 능력이 있는 것처럼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기도 하는 것처럼 당시에 겉옷의 술은 그러하였고, 예수님도 그렇게 옷에 술을 달았을텐데, 겉 옷을 만졌다는 것은 바로 그 술을 만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그렇게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정말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의 뒤에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입니다. 정말 놀랍게도 이 여인은 자기 몸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멈추는 것을 느꼈습니다. 너무 놀랍고 감사하였지만, 겉으로 내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물러나려했는데, 그만 주님이 덜 컥 이 여인을 부른 것입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랍비의 겉 옷의 술을 허락없이 만질 경우 처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단지 그 가족들은 옷 술을 만져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냐고 했을 때 이 여인은 겁이 덜컥 났을 것입니다. 조용히 물러서려고 했는데 모든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이 들통이 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이 여인과 예수님에게 집중이 되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사람들이 많아서 서로 밀치느라고 그런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겉 옷 술에 마음을 다하여 손을 댄 여인의 손 길을 느낀 것입니다. 종종 말씀을 드리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당에 나올 때, 아무 생각없이 다른 여섯날의 그 바쁜 마음으로 주께 나아오는 것과 아침부터 설레이는 마음으로, 은혜를 사모하며 주께 나아오는 그 마음을 섬세하신 하나님은 아시며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이 여인에게 자유와 평화와 지병으로부터의 회복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이제 이 여인은 더 이상 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종교지도자들과 이웃들, 그녀를 왕따시키는 지역의 모든 분들에게 완전한 치료받은자로 선언해 주셨습니다.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를 ‘딸아!’하였습니다. 가족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겉 옷을 만질 자격이 있다고 모두에게 드러내시며 병을 고쳐주실 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화를 주셨습니다.

   혈루증을 치료 받은 여인은 진정 마음을 다 하여 주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이 여인의 모습을 보며, 또한 사울을 봅니다. 그러면서 생각나는 것은 우리가 정말 마음을 다하려면 처음의 그 모습을 잃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울이 처음의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처음 받은 은혜를 잃어버렸습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집사도 되고, 권사도 되고, 장로님이 됩니다. 구역장도 맞고, 교사로 봉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 본래의 모습인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단지 껍데기입니다. 인위적인 종교의 껍데기를 두른 것입니다. 그 껍데기를 벗으려면, 처음에 자기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첫 예배를 드렸던 그 순전함, 첫 번째 드렸던 그 기도, 첫 번째 받았던 세례, , ,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교회는 많은 귀한 일들을 하였다며 칭찬을 받았지만, 정녕 잃어버린 것은 처음 사랑이었습니다. 그 순전함, 그 마음을 다하는 헌신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신다고 합니다.

   저는 사울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나의 처음을 돌아봅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내 마음을 다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갑니다.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게 닿기를 바라며 그리고 지금 주님이 이 땅에 오시면 어떤 자리에 게실까를 생각하며, 이제 오늘 우리의 시대가 직면한 생태 기후적 전 지구적, 문명사적인 전환 속에서, 과연 마음을 다하여 십자가 앞에 선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봅니다. 중세와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2,000년의 종교 역사 속에, 과연 그 무수한 신앙고백과 신학과 윤리적 덕목과 교회가 쌓아온 총체는 이 우주, 역사 속에,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적 삶 속에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독교였는지를 물어봅니다. 그 많은 무게감을 갖고 있는 교회와 신앙의 덕목들의 결과가 무색할 정도로 인류가 지금 생태 기후적 문명사적 전환의 위기를 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태 기후적 위기를 맞아 여전히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종교 안에 머물러 있는 모습은 마치 사울이 율법궤를 가지고 오라 하다가, 다시 가지고 가라 하는 그 모습이 아닌가, 그러한 우리의 하나님과 닿지 않는 신앙이 전 지구적 생태 기후적인 문명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지금이라도 이제는 온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리고 지구 촌 속에, 그리고 오늘 이 나라가 처해있는 사회 현실 속에 어떻게 신앙을 고백해야할지 에봇을 가지고 왔다가 다시 가지고 가라는 그러한 사울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을 묻고, 듣고, 따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안에 머무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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