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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는 사랑(성령강림후아홉번째주일, 2014년 8월10일)

하늘기차 | 2014.08.10 14:30 | 조회 2066



                                                                   다 하는 사랑
성령강림후아홉번째주일                                                                                                                            삼상7:1-4;마22:34-40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의 신앙은 전체적으로 바닥이었습니다. 성경말씀 그대로 자기 생각하는데로 사는 시대를 살은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말하면 약육강식의 시대였던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사울이 늘 블레셋 사람과 치열하게 싸우다 보니 힘세고, 용감한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러니 그런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자기에게로 불러 들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을 관리하다 보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 질 수 밖에 없었고, 하나님의 싸움이 아니라, 사울과 그 측근들, 군사력의 싸움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전리품을 챙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중심적인 흐름 속에서도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세상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방법으로 자기 힘을 키워가는 지는 몰라도, 그러니까 그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도 반드시, 꼭 하나님 중심의 신앙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이 귀해서 그렇게 하나님 뜻에따라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포도나무비유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생활을 하면, 기도제목을 내가 네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이것은 기도의 중요한 틀 중의 하나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기도 제목을 주는데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게을러서, 습관이 되어, 세상 일에 매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로 서지 못합니다. 사탄은 기도를 방해합니다. 제일로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사사 시대에 ‘한나’라고 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한나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혼자 힘들어 하다가 자식없는 서러움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 기도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삼상1~3장은 한나의 신앙을 따라사무엘이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4~6장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싸움 중에 율법궤를 빼앗겼다가 다시 찿아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고, 그리고 8장에서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 왕으로 기름을 붓는 사사시대에서 왕권시대로 넘어갑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한나 그리고 율법을 빼앗긴 이야기 와 이스라엘이 왕권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3절에서 사무엘이 온 족속에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지도자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미 엘리와 함께 있으면서 사무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3:19 이하에서 보면 주님이 사무엘과 함께하였고, 사무엘이 한 말이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다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엘리 시대에는 없었던 일, 즉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시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를 드러내실까요? 만화나 SF영화에서처럼 하늘의 구름타고, 아니면 하늘에 스피커가 달려있어서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로 드러내실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은 여러 사람, 무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드러내시며, 일하시며, 열매맺습니다. 당시에는 바로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드러내시며 일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 한 사람을 통해 일을 시작하십니다.

   2절 말씀을 보니
        “궤가 기럇여아림에 머문 날로부터 약 스무 해 동안, 오랜 세월이
         지났다. 이 기간에 이스라엘의 온 족속은 주님을 사모하였다”고 합니다. 근데 바로 다음에 우상을 없애버리고 주님만을 섬기라 하면서 온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나와서 기도합니다. 무언가 이상합니다. 이 기간에 주님을 사모하였다고 하는데,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우상을 버리라고 합니다. 개역성경을 보니 마찬가지로 사모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을 보니 ‘이스라엘 가문은 모두 야훼께로 마음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궤가 기럇여아림에 20년 동안 있는 동안 어떠했는지가 모호합니다. 그래서 현대인 성서를 보니 ‘슬퍼하며 여호와를 찾았다’고 합니다. 아! 그러니까 본문의 맥이 통합니다. 이해가 좀 되어갑니다. 그래서 NIV성경을 보니 ‘한탄하며 하나님을 찿았다’고 합니다. KJV도 역시 ‘애통해 하며 하나님을 찿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 다음의 본문들이 이해가 갑니다. 표준새번역과 우리 개정역은 너무 완곡하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율법궤가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왔는데, 여전히 탄식하며 하나님을 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데 이스라엘은 전혀 변함없이 옛 삶을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궤를 빼앗길 때의 모습이나, 다시 찿아 2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도 여전히 이스라엘이 무척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3절 말씀을 보니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온전한 마음
         으로 주님께 돌아오려거든, 이방의 신들과 아스다롯 여신상들을 없
         애 버리고, 주님께만 마음을 두고 그분만을 섬기십시오”합니다. 율법궤가 있으나, 없으나 같은 삶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율법이 이스라엘 삶에 중심이 아닐 뿐만 아니라,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 때에 율법을 전쟁터로 끌고 간 것을 보면, 율법도 하나의 터부일 뿐이지 그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예배와 기도, 그리고 성경이 우리 곁에 있지만 신앙의 가치, 그 소중함이 우리 일상 속에서 어느 정도 중심에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이 나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말입니다. 사무엘은 그래서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돌아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궤가 장소적으로는 그 중심에 위치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보기는 보는데, 다른 것도 같이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돌아오라 합니다. 돌아오더라도 ‘온전히’ 돌아오라고 합니다. 뒤 돌아보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건져주십니다. 건져주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닌 것이 내 안에서 주인 노릇하고 있으면 그만 내 보내시기 바랍니다. 체면치레 하느라고 예의 갖추어 나갈 때 까지 문열어놓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끌어내야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우상은 무엇인가요? 한 마디로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요? 오늘 말씀에 20년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20년을 허송세월 한 것입니다. 근데 20년이 지날 즈음에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20년 동안 아니 사사시대의 거의 대부분의 동안에 그렇게 지긋지긋하도록 말씀을 안들었는데, 말씀을 종처럼 듣는 사무엘이 등장한 것입니다. 3절에서 사무엘이 온 족속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이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사무엘이 말하고 이스라엘이 들었다고 합니다. 단지 들은 것이 아니라 없애버리고 주님만을 섬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는 것 처럼, 이스라엘이 들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믿음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5,6절에 보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두 미스바에 불러 모았다고 합니다. 물을 길어다가 여호와 앞에 부었다고 합니다. 장막절 절기를 지키는 것인데, 절기를 지키는 것이 끊어졌다가 사무엘을 통해 다시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동안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며 온 이스라엘이 회개를 합니다. 엘리가 죽고, 율법궤가 빼앗기고 하는 참담한 지경에 이른 이스라엘이 사무엘의 말대로 돌아 선 것입니다. 어디에서 돌아선 것인가요? 우상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우상에서 돌아설 수가 있을까요? 소위 우상에대한 집착에는 그 보다 더 깊은 내적 동인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미쳐 인식하지 못하는 원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우상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한 미국의 텔레비전 토크쇼에서 세계적인 가수요, 모델이요, 영화, 등 엔터테이너인 마돈나를 출연시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하는 사람과 마돈나가 서로 상투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마돈나는 사회자의 상투적인 칭송을 받아들이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회자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혹 이 모든 것은 포기하고서라도 얻고 싶은 것이 혹시 있습니까?"
 
순간 마돈나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이내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고, 입술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마돈나는 숨을 한 번 들이마시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 다. ‘엄마가 있었으면….’
그녀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잃어버린 상실의 아픔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인 마돈나 루이스(옛 포틴)는 1963년 30세의 나이에 유방암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 땐 너무 어린아이였다"고 고백한 것처럼 어린시절에 어머니를 여인 마돈나의 상실감은 엄청났던 것입니다. 그녀가 상실한 어머니는 그녀가 소유한 부와 명예와 쾌락을 모두 포기하고서라도 선택하고 싶은 가장 소중한 생의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추구해온 것은 참된 만족에 대한 환영(幻影)이었을 뿐이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실존적으로 텅 빈 공간을 만족시켜 줄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마돈나에게 어머니가 계셨다면 만족했을까요? 아마도 어머니가 계셨다면 아마 또 다른 갈급함이 있지 않았겠나? 다른 우상이 나를 주관하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우상은 무엇인가요?

   오늘 3절 말씀에 우상을 버리라고 하는데 어떻게 내 의식에 잡히지도 않는 우상을 버릴 수 있을까요? 바로 3절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주님께만 마음을 두고 그분만을 섬기’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지혜입니다. 여기에 생명의 은혜가 있습니다. 이 길 밖에 없습니다. 막12장에 보면 한 율법사가 어떤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가요 하고 묻자 예수님이 첫째도 사랑, 둘째도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선은 하나님 사랑이고, 그 다음은 이웃 사랑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우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내적 깊은 것에서 나를 얽매고 있는 것도 이 두가지 사랑으로 다 풀릴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 사랑이라 하면서, 근데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라고 했나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사랑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해 본적이 있나요? 목숨을 다하라고 합니다. 목숨을 내어놓아 본 적이 이나요? 뜻을 다하라고 합니다. 뜻을 다 해 본적이 있나요? 이게 맞아요, 아까 마돈나 이야기를 했는데, 그 내면에 공허한 갈급함을 체우려고 무언가를 미친듯이 합니다. 최근 윤일병을 집단으로 폭력을 가했던 동료들이나, 성폭력으로 여자 아이가 죽임을 당하고 생매장을 당하는 과정을 보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하는데, 그렇게 하게 끔 한 그 내적 동인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악한 짓을 다 한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사로잡힌 모습입니다. 맨 정신에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다들 군대 가기 전에는 귀한 엄마 아빠의 평범한 아이들이었습니다. 근데 군대라고 하는 폐쇄적인 폭력, 그러니까 죽임을 훈련하는 폐쇄적 집단에 들어가 그렇게 사로잡힙니다.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악의 희생자들입니다. 그래서 다 해야 한다는 이 말씀이 괜한 말씀이 아닙니다. 사랑을 다 하지 않으면 우리 삶이 돌아설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랑을 할 수 있어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에게 속해있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 속해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다 할 ’ 따름인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8복 말씀도 사람들은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말씀이 아니라고 하며, 제자들, 즉 사도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하는데, 제자들도 사실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8복을 뒤로해서 읽어보면 그 8가지 축복들이 우리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하나라도 없을 경우 이 사회, 가정, 이 나라, 세상이 아름답고 선하지 못 할 수 밖에 없어 반드시 이루어져야하고 우리가 감당해야할 말씀인데, 자꾸 못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몰라서 하는 세상적인 생각입니다. 자꾸 사탄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다 하는’ 것입니다. '다 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고 ‘다 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마22:39에 보면 둘째 계명도 이와 같은데 하며, 첫째 사랑과 둘째 사랑의 중요성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계명도 역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이웃을 사랑할 때 네 몸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 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 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요즈음 수요일에는 다윗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다윗이 율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면서 춤을 추는데 삼하6:14에 보면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보통 춤을 추는데 다하지는 않지요. 즐기거든요. 아! 청년 때 수련회에 가서 밤세 춤추던 기억이 납니다. 청년의 젊은 에너지입니다. 그렇다고 온 힘을 다한다고는 표현하지 않습니다. 근데 다윗은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춥니다. 성경말씀을 자세히 보면 ‘주님 앞에서’라고 합니다. 다윗은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골리앗 때문에 전전긍긍할 때 사울 앞에 출정의 변을 토로하면서 다윗이 목동일 때에 자기가 치는 양들이 사자나 곰에게 위협을 당할 때면 목숨을 다해 양들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사자나 곰이 한 마리라도 물어가면 바로 쫓아가서 그 물어간 놈이 사자든 곰이던 쳐 죽이고 그 입에서 양을 꺼내 살리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 보다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고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물맷돌 다섯 개를 집어들고 골리앗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자기를 다 하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에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보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 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다 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다 하는’에 혹 원리가 있다고 한다면, ‘먼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교회는 20~30년 전에는 교회 성도들이 먼저고, 나중이고 할 것 없이 교회일이라고 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하면 온 교회 성도가 아이들 까지도 당연히 다 모여 먼저 교회일, 주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먼저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인 것 같지만 성경은 그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먼저’, 이고 ‘다 하는 ’ 것입니다. 저는 교회의 신앙이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 봅니다. 목사가 교회 신앙 무너지는 것을 회복시켜야하는데, 참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다 하는’ 신앙의 삶을 살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일생에 ‘다 하는 사랑’, 그러니까 ‘먼저’하는 신앙의 점을 찍지 못한다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무엇에 메여 ‘다 하’지 못하는지요,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서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다 하는’교회요, 성도님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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