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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평화의 성령(성령강림후여섯번째주일, 2014년7월20일)

하늘기차 | 2014.07.20 17:28 | 조회 2462



                       생명과 평화의 성령
성령강림후여섯번째주일                                                                                        롬6:20-23;8:5-6
                                                         
   생명과 평화는 그 근원과 바탕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여기에 무엇을 더하고 덜할 것이 없습니다. 롬6:20-23은 이러한 영적 삶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에서 우리가 죄의 종일 때 우리는 의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의로움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 무슨 열매를 거두었느냐고 반문하면서 죄에 종노릇하면 열매가 없다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단언을 합니다.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일, 종교적인 일, 종교적 신념을 위해 모든 세월을 허비한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결국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죄에서 해방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역설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었는데 다시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종이 되나요?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그러니까 죄의 종, 세상의 종으로 살던 삶에서 하나님의 종의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험으로 이야기하자면 유대교의 율법에 살고 죽던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전 인격, 그 동안의 삶의 모든 총화를 뒤로하고 자신이 멸시하고, 경멸하며,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을 유대교를 갉아먹는 벌레 쯤으로 생각하던 사울이 자신의 가던 길에서 돌아 선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사울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멸시하던 예수의 추종자가 된 것입니다. 사울은 빌립보서 3:7~8에서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
         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여긴다고 합니다. 철저하게 완전 탈바꿈하여 사울이 아니라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삶에서 사도 바울은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고전6:9에서는 죽은 것 같으나 살아있고,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죽음이 사도 바울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주님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죽음이 예수님을 어떻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죽음이란,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성경을 통해 이야기하는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과 혼돈과 거짓과 살인, 폭력에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 삶을 살아있다고 하며, 그렇지 않은 삶을 죽은 삶이라 합니다. 생명을 거두시며 주시는 하나님, 그 생명을 사랑으로 키우시는 하나님의 선한 뜻과 닿아있지 않은 삶은 죽은 삶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왜 안 죽어 할지 모르지만, 바로 하나님과의 단절로인한 죽음. 그러니까 아무런 생명의 삶, 생명의 열매를 맺는 삶이 아니라, 열매없는 죽정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죽은 삶입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반면에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는 삶이 있는 것입니다.

    최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무차별 폭격 하는 모습에, 그리고 그 폭격을 산 언덕에 둘러 앉아 그 폭격의 불꽃야경을 마치 인터넷게임을 보듯이 즐기는 이스라엘 일부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후쿠시마 이후의 일본의 핵방사능의 오염의 치명적인 심각성이 얼마나 하나님의 창조생명을 파괴하고 있는지, 그럼에도 그 죽음의 폭력을 은폐하고, 거짓 보고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백주에 강도질하는 것 같은 세월호 이후의 처리 과정을 보며, 또 최근 갓 태어난 어린 송아지를 살 처분하는 동영상을 보았는데, 호주의 리버사이드 도살장에서 우유를 위해 태어나는 송아지를 5일이 지나 걸음마를 Elf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이동통로를 통해 도살장으로 이동시킬 때, 전기봉으로 더구나 안면을 자극하기 까지 하면서, 또 꼬리를 들어 올려 도살장으로 몰거나, 번쩍들어 던져버리는 잔혹한 모습을 보았는데, 이렇게 호주에서 우유를 위해 살육되는 송아지만 70만이라고 합니다.

   바로 도시의 소비자들을 위해 살처분당하는 송아지들입니다. 귀한 생명입니다. 도시는, 도시 문명은 다른 생명의 죽음을 바탕으로 유지가 됩니다. 창세기의 말씀대로 바벨론의 도시문명의 폭력이 오늘 이 시대에도 똑같이 더 가공할 힘을 가지고, 얼마나 죽음의 힘이 전 세계적으로 전방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폭력적인 도시문명의 틀 안에 갖혀 죽음의 동조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무력함을 보게됩니다. 우선적으로 먹던 우유를 중단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죽음의 일들은 하나의 힘으로부터 옵니다. 바로 죽음의 힘, 거짓의 힘, 미혹하는 힘에게서부터입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를 혼란케 한 거짓 지혜의 힘입니다. 여럿이 아니라 하나에게서부터 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첫 사람에게서 비롯된 죽음의 힘이 두 번 째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심판을 받았다, 다시말해 하늘에서부터 온 예수 그리스도로 의 십자가와 부활로 죽음의 권세는 멸하여졌다고 선언합니다.

   사도 바울은 죄의 종으로 사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종된 삶을 사는 것에대해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합니다. 아니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교인들에게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다고 합니다.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하며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다고 한 말이 여러분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이 듭니까? 아니면 그것은 2천년 전 로마제국 아래에서 힘겹게 순교가, 그러니까 죽음이 바로 곁에 와서 문을 두드리는 그러한 교회생활하던 사람들의 삶이고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만약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가 여러분들에게 맺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포도 나무 비유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 처럼 그저 가마솥 아궁이에 불쏘시개 역할 정도일 수 밖에 없는 삶이 아닌가 십습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요? 거룩함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요? 속된 것과 구별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엇이 삶을 구별지을 수 있나요? 하나님의 선한 뜻, 그러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부터 다윗에게, 예언자들의 선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리고 초대교회의 신앙 공동체를 통해 이어져내려 온 언약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삶이 아닌가? 또한 사도 바울이 롬14:17에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는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할 때 그렇게 말씀을 따라 살다보면 구별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십습니다. 그러한 삶의 과정을 통해 궁극에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청년부 성경공부 중에 꿈쟁이 요셉에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요셉의 삶은 꿈이 인도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꿈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그러니 은혜요, 선물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삶에서 볼 때 그리 행복한 삶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셉은 꿈에 이끌리어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우물에 생매장 될 번 했고, 노예로 팔리고, 유혹을 받고, 감옥에 갖히고, 이집트의 최고 권력의 자리에 까지 올라, 어릴적 꾸었던 꿈대로 실제 형들과 부모가 자기에게 찿아 와서 무릎을 꿇는 놀라운 일들, 궁극에 화해, 평화가 찿아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여기서의 꿈은 어떤 꿈을 이야기하는 건가요? 하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 질문 자체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나눈 후에 자기가 생각하고 이루고자 했던 개인의 꿈과 성경이 이야기하는 꿈이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내 개인의 성공, 스스로 땀흘려 자수성가하는 거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꿈은 당시 가족들 더 나아가 인류의 평화를 위한 꿈. 그러니 우리의 삶 속에서도 단순히 내 개인이 아니라, 이웃, 나라 민족, 인류, 자연, 하나님의 선한 뜻을 향한 비죤을 바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으로 자신의 삶의 지평이 넓어집니다. 삶의 지평이 저 멀리, 저 높이 향하여 있으면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꿈도 함께 그 지평으로 깊게, 넓게, 높게 평쳐진다는 것입니다. 궁극에 생명과 평화의 열매가 자신의 일상 속에서 맺혀지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오늘 8:5절 말씀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생각을 한다고 하며, 롬6:22은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에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8:6은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라고 하니다. 또 6:22은 역시 계속해서 그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합니다. 모두 성령에 인도함을 받으며 살 때 생명과 평화의 삶을 살게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내 마음을 움직일 때, 그 인도함을 따라야 합니다.

   사울이 왕이 될 때 성경에 보면 성령이 임하여 예언자들과 함께 찬양하며 춤추며 소리내어 예언을 하였다고 합니다. 또 새 마음을 주었다고 합니다. 또 밭에서 일하다가 암몬족속에게 굴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내려, 무섭게 분노를 터뜨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울이 왕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생각에 붙들리며, 사람들을 의식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것이 도를 넘어 하나님의 뜻을 뒤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세워 사무엘을 통해 다윗이 아직 어릴 때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위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후 다윗은 지난한 세월을 보내는데, 골리앗을 무찌르고, 백성의 영웅으로 등장하는 모습은 사울과는 정 반대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의 영웅적인 모습이 아니라, 어떻게 골리앗을 대하였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사울이 왕으로 호명받았을 때, 나귀짐 뒤에 숨는 지난친 겸손은 사실 사람들을 너무 의식하는 모습이 아닌가, 결국 그의 성격이 나중에 자기 부하들을 의식하여 나중에 하나님 보다 자기 휘하의 부하군인들을 더 두려워하였다는 고백은 의미심장합니다. 성령은 받았지만 성령의 감흥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삼상10:7에도 보면 사울왕이 춤추며 노래하며 예언하며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사무엘은 그 때 무어라고 말을 하는가 하면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할 때 인도하는데로 따라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감동이 있지만 사람이 더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죽을 때 까지 죄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바라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여간 그 후 사울의 곁에 있었지만 시기 질투로 다윗을 미워하게 되는데, 그 때에도 삼상18:15를 보면 사울이 역시 다윗을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여도 자신 스스로 그 성령의 감화를 받지 않고, 자기 연민에 빠지면 결국 자기 장점도 결국 자기 자신에게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피해 쫓기어 원수 국가인 블레셋의 왕에게 부역하는 참담함도 있었고, 결국 사울이 죽고,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바로 올라가 왕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자, 헤브론에 머물러 유다 지파 만의 반쪽 왕으로 지나다가 7년 6개월 후 드디어 북 이스라엘의 11지파로부터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를 받으며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를 받습니다. 부하 장군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일, 이스라엘의 숫자를 세며 스스로의 공과를 가늠하다 하나님의 진노를 산 일.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의 전을 세우려다가 하나님께서 원치 않자 접은 일, 오히려 네가 나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영원히 변치 않는 집을 지어주겠다는 축복을 받은 일. 마지막에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한 일. 그 모든 과정 속에 목동으로서, 아들로서, 신하로서, 왕으로서, 무엇 보다 하나님의 부름받은 사명자로서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갔습니다. 8:5절의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요, 롬6:22의 거룩함에 이르는 삶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야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인도할 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데, 우리를 감화, 감동시키시니다.  성령이 내 마음을 움직입니다. 감동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까? 바로 그렇게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영의 역사는 단순합니다. 그러나 그 활동이 우리 가운데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래서 ‘나는 곤고하다!’하며 탄식한 것입니다. 자꾸 우리 마음이 지금 미움, 분노, 억울함, 원수, 거짓, 게으름... 쪽으로 향하면, 그런데 이럴 때 보면 스스로 그쪽으로 가면서 힘들어합니다. 그 힘들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똑 같습니다. 힘들고 하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밤새 충혈된 눈으로 식사도 거르면서 빠징고 기계 앞에서 기계처럼 손잡이를 긁어내리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도박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손가락을 자르고는 딱 한 번 만 하겠다고 다시 화투짝을 잡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약을 하면서 할 수 없이 하는 것이라며 팔뚝에 주사기를 꼽는 자포자기하는 모습이 바로 사탄이 우리를 이끄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사랑, 용서, 관용, 기다림, 희망, 함께나누는 쪽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이렇게 내 안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과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자꾸 그러한 어두움의 길로 가게 하는 싸움이 일어날 때, 그 때 성령에게 맡겨야 합니다. 성령은 참 신비로운 분이십니다. 느끼지도, 맛을 보지도, 볼 수도 없지만 우리가 진정성을 가지고, 보통 이 진정성은 인간이 지혜롭지 못해 생명의 위기가 닥칠 때, ‘하나님 나좀 살려주세요’라고 하며 드러나기는 하지만, 하여간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맡기면, 맡긴다는 것은, 의뢰한다는 것, 믿고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변호사에게 우리의 재판을 맡기는 것처럼 성령께 우리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최악이라 할 때, 그 때 나의 생각, 뜻, 능력, 의지, 감정, 노력, 그동안 쌓아왔던 인간관계, 나의 경험을 내려놓고 가만히, 옆에서 보면 도대체 이 사람에게 이런 심각한 문제가 있나 할 정도로 평안하게, 어린아이처럼 아무 염려, 아무 생각없이, 왜냐하면 엄마가 다 알아서 해 준다는 신뢰 안에서 뛰어노는 것처럼, 동네에서 놀다가 힘 센 아이한테 얻어맞고서 집으로 엄마를 찿아 뛰어들어오는 아이처럼 그렇게  머무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끝.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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