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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로 삼으시는 영(성령강림후네번째주일, 2014년7월6일)

하늘기차 | 2014.07.06 15:58 | 조회 2389



                                          자녀로 삼으시는 영
성령강림후네번째주일                                                                                                     롬8:12-17

   예수님께서 마18장에서 용서에대한 이야기를 하자 베드로가 그런데 상대방이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더 용서해 주어야 하냐고 하면서 일곱 번 까지 해야합니까 라고 묻자 예수님이 일곱 번 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아마 베드로로서는 ‘어~휴!’했을 것입니다. 일 곱 번도 힘이드는데, 70 X 7 = 490번을 어떻게, 아니 이 것은 70에 7은 무한대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용서를 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머리를 가로 저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이 바로 1만 달란트 빚진자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과 같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왕에게 1만달란트를 빚진자가 왕 앞에 끌려왔습니다. 그런데 빚을 값을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종에게 가진 것 뿐 만아니라, 가족들도 다 팔아서 갚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 종은 한 번 만 기회를 달라고 하자,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서,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자를 만나 빚을 값으라 하며 멱살잡이를 합니다. 그러자 그 동려가 한 번 만 기회를 달라고 하지만 이 종은 그 동려를 돈을 갚을 때 까지 감옥에 갖혀있게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목도한 왕의 다른 종들이 이 사실을 주인에게 다 이야기 하자 왕은 그 종을 다시 불러 ‘악한 종아!’ 하면서 다시 감옥에 가둔다는 이야기입니다.

   1달란트는 6천 드라크마입니다. 그런데 1드라크마가 하루 품삯이라고 하니 5만원이라고 하면 5만X6천 = 30억입니다. 그런데 1 만 달란트를 빚졌다고 하니 300조, 이 것은 천문학적인 숫자이지요. 다시말하면 값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을터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값으로 계산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지고 있는 영적 빚의 값어치입니다. 꼭 영적 값어치라 하지 않아도,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자연을 통해 거저 받은 햇빛과 공기와 물을 따지면 상상을 초월 합니다. 은혜입니다. 고개를 설래설래 졌거나, 마음에 결심을 하여 이루어질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자의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선물입니다. 생명의 가치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렇게 거저 받은 것을 다 값으려 한다면 도저희 값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8:12에서 이 빚은 육신의 빚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생명으로 받은 빚을 값을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빚을 져도 아버지가 어찌 아들에게 빚 갚으라 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낳았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하나입니다.

   은수 동생이 생겼습니다. 은수가 동생 희수를 이뻐하는 것이 옆에서 보입니다. 어제 이혜경집사님 집들이 할 때 은수, 희수도 같이 왔는데, 그리고 교회에서도 은수, 희수가 참 편하게 엄마, 아빠의 사랑을 잘 나누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수가 동생이 생기구나서 한층 더 여유로워지고, 어른스러워진 것을 느껴요. 그냥 어리광만 피웠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어제 확인 한 바로는 희수가 ‘엄마’ 한다는 것입니다. 엄마들이 다 아이들에대한 거짓말을 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제 정말 희수가 옹아리를 아주 힘차게 해요, 어제 제가 ‘엄마’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실은 ‘엄~~’하고는 말꼬리가 사라졌지만 말입니다. 그게 엄마로서는 엄마로 듣는게 당연하지요. 그런데 제가 은수가 희수를 질투를 하지 않느냐고 하니까 그런 것 없다는 것입니다. 질투를 하기도 하거든요, 엄마 아빠 안 보는 곳에서 꼬집기도 한데요. 그런데 은수하고 희수의 나이 차이가 6살이나 나기 때문에 그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속으로 느꼈어요. ‘아! 시간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수가 엄마, 아빠 사랑 충분히 받고서, 그러고 동생을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년인가, 재 작년에 장집사님이 은수 동생을 보려고 애를 써는데 잘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거든요. 지금 돌아보면 아! 이것도 하나님 뜻이구나, 더 아름다운 가족을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에게 시간의 지혜도 줍니다.

   오늘 은수, 희수 이야기를 한 것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로 부름을 받았고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여간 장기혁집사님과 오현경집사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을 품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희수가 장기혁집사님을 아빠로, 오현경집사님을 엄마로 부를 수 있는 한 가족 안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하여간 육신으로부터가 아니라 믿음의 딸입니다. 은혜의 딸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통해 받은 딸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한 은혜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에 붙들려 평생 죄의 종으로 죄를 먹으며 살 수 밖에 없는데,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통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러면서 강조하는 것은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종은 자기 삶에대한 권한이 없습니다. 주인의 뜻에 따라야합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산다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 일상의 삶의 연계 속에 이리저리 매여 살기 십상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종으로서가 아니라, 자유하는 자로 살 수 있을까요? 성경은 여러 곳에서 자유인과 종에대하여 아브라함의 두 아들로 비유를 합니다. 이 때 자유자와 종의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분은 지금 종으로 살아갑니까? 자유자로 살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갈4:23에서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육신을 따라 태어나고, 본처에게서 난 아들
         은 약속을 따라 태어났”다고 합니다. 약속의 말씀이지요, 이에대해 29은 또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육신을 따라 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박해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이 육신을 따라 난 것과 약속에 따라 난 것에대해서는 이삭의 아들 야곱과 에서를 통해 잘 드러납니다. 에서가 약속, 기업을 이을 상속을 무시하고 자신의 장자권을 배가 고파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아무 생각없이 야곱에게 팔아넘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유자로 살려면 약속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 약속이 어떤 약속인가요? 아브라함으로부터 믿음을 따라 마치 강줄기와 같이 믿음의 고백들을 통해 지금도 흘러오고 있습니다. 신7:8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를 하십니다.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당신들을
         이집트 왕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
         어 내어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지중해 패권을 잡고 있는 이집트에게서, 그 거대한 제국의 힘, 바로에게서 히브리민족을 구하여 자유케 하신 것은 조상과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조상과 맹세했다고 합니다. 왜 우리가 약속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이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약속의 힘입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어 죽기 까지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통해 믿음의 조상들이 자유함을 얻고, 이 약속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종으로서가 아니라 자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속의 자녀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셨을까요? 우리를 불쌍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비참한 노예생활을 하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매여 사람구실 못 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 불쌍히 여긴다는 말 속에는 인문학적인 개념이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인류가 벗어날 수 없고, 해결 할 수도 없는 죄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죽음이요, 두려움입니다. 피조물로 살아가는 동안에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며, 실존입니다. 그러한 수 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를 자녀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에 ‘자녀로 삼으시는 영’, 한글 개역으로는 ‘양자의 영’을 받아서 우리가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갈4:6은 자녀로 삼으시는 영에대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
         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다고 합니다. 아들의 영,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실제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막14:36에서 보면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도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린다고 하면서 죽음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하십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시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수님 처럼 ‘아빠, 아버지!’하고 정말 간절하게, 신실하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부를 수만 있다면,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가 아니면 그렇게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처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아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내가, 우리 가족이, 이 나라가 살 수 있는, 그러니까 잊어버린 생명의 은혜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녀로 삼으시는 영으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종의 반대는 자유인, 근대적 개념으로는 시민이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 구속받는 종의 삶의 반대 개념은 시민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유로움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에대한 신뢰입니다. 그렇다면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성경은 긍휼, 불쌍히여김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히브리민족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죄로인해 세상에 매인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불쌍히 여김에는 죄의 문제, 영적인 문제, 하나님과의 단절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인간의 학문, 철학, 예술, 문명, 인류의 모든 총 재화로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1만달란트를 빚진 것입니다. 그것은 값을 수 없는 빚이요, 그래서 은혜입니다. 갚으라는 빚이 아닙니다.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받으시고,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아빠, 아버지’라고 부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은혜요, 긍휼이요, 섭리입니다. 그래서 자녀로 삼으시는 영이 아니구서는 ‘생명의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갈4:6에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마음이라는 말을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마음을 새롭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의도, 뜻이 계신 것입니다. 마음이 새롭지 않으면 자녀이면서도 자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을 살면서도 믿음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서가 아니라 세상의 종노릇 하며 사는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들을 이렇게 사랑하실까요? 자녀란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을 이렇게 사랑하실까요? 사도 바울은 7절에서 자녀이면 상속자라고 합니다. 따라서 기업을 물려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 자기 생각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기업, 즉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물려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하는 숙제도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인정하는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벧2:9에서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민족,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 하시면서 어둠에서 불러내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선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주님의 영광 만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게 하나님의 상속자로 부름을 받았으니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도 함께 받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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