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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성령강림후두번째주, 2015년 6월7일)

하늘기차 | 2015.06.07 15:05 | 조회 206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성령강림후두번째주                                                                                     요일4:16-21;롬8:14-17

    성령강림주일에 말씀을 전하면서 보혜사 성령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며,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 하면서 요14:23절 말씀을 인용하여 여기서 말씀하는 모든 것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라는 것이 백과사전 식으로, 백화점 식으로 잡다한 모든 것이 아니라 성령이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한다는 말씀 앞에 바로 23절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
         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풀어보면 사랑에대한 것인데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와 내가 하나입니다. 이것이 모
         든 것이며, 전부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 예수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처럼 우리가 말씀을 지킴으로부터 오는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이 관계를 성령께서 인치십니다. 도장을 꾹 찍는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사랑, 생명의 정의로움, 생명의 평화로움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삶에 함께하시며 간섭을 하시며, 증언하시며, 도우시고, 지키시며, 인도하십니다.

   사랑은 하나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까 연인과의 사랑, 형제 간의 사랑, 이웃 간의 사랑, 직장 동료의 우애, 친구 사이의 우정 등, 모두 하나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의 행위는 하나인 것을 드러내는 언행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지 못함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나뉘었습니다. 카인이, 그리고 그 후손들이 성을 쌓고 폭력으로 자신들을 지키고 보호합니다. 성령의 도우시고,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심과 다릅니다. 이 하나됨, 사랑의 근원적 모습을 떠난 사람들에게 찿아온 것은 두려움, 그리고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수 많은 장치들을 만들어내는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장치들로인하여, 다른 존재와 갈등하며 고통을 줍니다. 생명의 하나됨으로부터 오는 평화가 깨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14:27 말씀에서 예수님은 세상과 다른, 세상이 줄 수 없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 첫 번째 절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이신 하나님입니다. 홀로 하나이신 분이 아니라, 3위일체로서, 이 세상 역사와 우주, 모든 피조물과 성령과 아들 예수와 하나입니다. 따로 홀로이면 사랑일 수 없습니다. 다 같이 하나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다 같이 라고 해서 두리뭉실, 구별 없는 하나가 아닙니다. 종종 이야기 하지만 하늘, 땅, 해와 달, 온갖 생물들이 모두 하나님을 닮아서 하나입니다. 각 기 개성을 가진 스스로의 자존감을 가지고 존재하는, 그러나 홀로 하나가 아니라 조화, 하모니로서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랑입니다. 그리고 평화입니다. 이 평화와 조화가 깨지면 두려움과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사랑의 완성에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어떻게 완성할까요? 사랑에 완성이 있을 수 있나요? 오늘 말씀은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 쫓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두려움은 어디에서부터 왔나요? 오늘 말씀에 징벌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관련이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공동 번역은 두려움이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벌을 받을 것,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청소년 시절, 학교 교무실에서 부를 때, 겁이 덜컹납니다. 왜 나를 부르지, 내가 무엇을 잘 못했지 합니다. 사고를 많이 치거나 말썽을 많이 부릴수록, 아이쿠 또 뭔 잘못을 했지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과의 관계가 두터운 아이는 선생님이 부르면 흔쾌히 달려갑니다. 선생님이 자신을 야단칠 거라는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과 가까운 아이는 전혀 선생님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한 중동 지역의 큰 전쟁을 치른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찿아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첫 마디가 무엇인가 하면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두려워하고 있을까요? 역시 생각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부족은 당시 사방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부족들에 둘러 쌓여 있어서, 언제나 호시탐탐 그들의 먹이감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나이는 먹어 가고, 후계자는 아직 없고, 그러니 부족원들 중에 혹 이탈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다 십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을만한, 그동안 자기를 철저하게 보필해 온 충직한 엘리에셀을 족장 후보로 세우려고 합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아들이 아니라,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후계자로 세우려 한 것은 두려움이 엄습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상속자는 아들이어야한다고 다시 계약을 갱신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그렇습니다. 생각이 아니라 믿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 믿음을 인정해 주십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의로움인 것입니다. 그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아니라, 믿음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믿음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얼마 후에 창15:12에 보면 ‘깊은 어두움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고 합니다. 그러니 다시 생각 속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연약한 믿음을 옳다고, 그게 맞다, 그렇게 나를 의지하며 신뢰하며 살아야 한다고 친절하게 아브라함에게 찿아오셔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로마서 8:14에서 매우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생명이신 하나님과 하나되는 사랑, 그러니까 풀어보자면 생명의 정의로움, 생명의 평화로움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삶에 함께하시며 간섭을 하시며, 증언하시며, 도우시고, 지키시며, 인도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그 수 많 생각의 가닥에서 뻗어나가는 두려움이라는 격랑의 강줄기로 빠지지 않게 선하고, 의로운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요14:26절 말씀처럼 보혜사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시고, 깨우쳐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생각나게하시는 길로 가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자기의 생각으로 나아갑니다. 사울이 그렇게 자기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은 가다가 돌아서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믿었고, 그 어설픈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 그렇게 가는 것이 맞어 하신 것입니다.

   신앙을 훈련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기 위해 그것이 성령의 깨우치심이고, 생각나게 하시는 것인지 아닌지 수 많은 반복을 통해 조금 씩, 그 강줄기를 찿아 나아감으로써 두려움의 탁류에 빠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세상의 평화 말구, 가짜 지도자들이 주는 거짓 위로 말구, 주님이 주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맛 보며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 지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참 하나됨, 참 평화, 참 사랑의 길로 나아가는 것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 15절에서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소위 양자의 영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양자라고 하는 이 말에 당시 로마의 양자제도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한 사람이 혈연이 아닌 사람을 양자로 삼으면 과거의 모든 가족관계나 권리는 소멸되고, 새로운 아버지 아래에서 새로운 가족으로서 새로운 법적 권리를 갖게 됩니다. 또한 그가 과거에 가지고 있던 채무도 완전 소멸되며, 새로운 존재로서 과거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새로운 존재로 살게됩니다. 또한  양부가 가진 재산의 상속자가 되는데, 나중에 친 혈육이 태어나더라도 양자의 권리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오스는 딸 옥타비아가 있었음에도 네로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세우는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네로가 양아버지의 딸 옥타비아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이미 양자로 입적을 하였기 때문에 둘이 남매관계가 되어 결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시대의 양자는 친자 보다 법적 권한이 보다 선명하고 확실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어떤 존재로 바뀌는지를 로마의 법의 관점에서 바라 보았습니다.

   그런데 로마에서는 양자가 아직 법적 판결이 안나 호적에 안 올려진 상태에서 아버지가 별세할 경우가 있습니다.그러면 많은 재산과 보화들이 욕심나 모든 친척들이 이 양자는 양자가 아니라 종이라고 누명을 씌웁니다.그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면, 원래 입양할 때 7명의 증인이 있는데, 이 중 한 사람만 와서 이 사람이 양자가 분명하다고 증언을 하면 양자의 권리는 보장되고 상속권까지 받게 됩니다.바로 이렇게 우리가 이제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성령이 바로 자유자입니다. 반드시 성령의 인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종으로 언제든지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결국 두려움에 빠지고 맙니다.

   그 동안 고린도전후서를 다 읽고 이제 마지막 12, 13장이 남았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는가장 각별한 교회였습니다. 아마도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십습니다. 11장 20절 말씀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누가 여러분을 종으로 부려도, 누가 여러분을 골려도, 누가 여러분을 얕보아도, 누가 여러분의 뺨을 때려도, 여러분은 가만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 빛의 천사로 가장한 지도자연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고린도 교회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사도 마울은 거짓 복음에 젖어드는 고린도교회를 안타까이 바라보며 수 차례 고린도에 가려고 했고, 편지도 4 번이나 보내고, 디도와 디모데를 보내기도 하고, 자비량  선교를 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고린도 교회를 회복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는 처음부터 큰 부담으로 다가 왔습니다. 이미 아테네 선교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저 철학적인 논쟁에만 매인 자책감에 빠져서 고린도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전과 성적 타락과 우상으로 가득 찬 당시 가장 상업적이고, 번성한 항구도시였는데, 이러한 고린도에 도착하여서 복음을 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오직하면 저 사람은 ‘고린도 사람’같에 라는 말이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을 지칭할 정도였으니 그 말 한 마디에 고린도라는 도시가 어떠한 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시에서 복음을 전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행18:9,10절 말씀입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내가 너
         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고 합니다. 그 후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힘차게 전도를 하는데, 고전2:3,4절 말씀에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이라고 합니다. 두렵고 떨렸지만 지금 이렇게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것은 성령의 능력이라고 첫 번 째 편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31:19에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
         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입니다.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스스로 경외하는 자유자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으로부터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길은 성령의 내적 감동입니다. 우리들을 뒤 덮는 수 많은 관계와 정보와 환경 속에서 자신의 생각에 붙들려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우리로하여금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임을 깨우치시고, 세상의 생각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오는 생각을 떠오르게 하며, 깨우치고, 생명 평화, 생명 자유, 생명 정의의 길로 인도하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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