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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며 즐거워하라(부활절제7주, 2015년5월17일)

wishong | 2015.05.18 02:12 | 조회 1859

 

떨며 즐거워하라 (6:1-8, 요일 4:18-21)

    

 

사람들은 누구나 두려워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두려워하며 사십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엄청난 지진과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 그리고 언제 누구에게 닥칠지 모르는 사고의 위험이 언제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만도 예비군 훈련장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으로 아까운 젊은 목숨들이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순간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할만큼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성경에도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정말 많이 나오는데,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모두 365번이나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일년 365일이 그렇게 늘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는 조금 다른 차원의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제가 누구인지 모르시는 분들이 이 자리에 분명히 계실 것도 같은데, 저는 교회에서 아동부와 청소년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예배를 드리기 직전에도 두 번의 예배를 드리고 왔는대요. 지난 4월과 또 이번달에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는 말씀의 주제는 바로 예배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정작 그 예배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예배자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예배란 어떤 의미일까요? 아이들에게 예배란 재미도 없고 엄마 아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와 앉아있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저에게도 때로는 예배가 일이 되어서 예배가 끝나면 , 이제 일 끝났다.’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재미있나요?” 오랜만에 한목소리로 크게 대답하더군요. “아니요~”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배는 원래 재미가 없어요. 예배는 재미로 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예요.”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두달에 걸쳐 예배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또 예배에 대해 고민하면서 우리에게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묵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왜 매주일 이곳에 모여 예배를 드리시나요? 여러분에게 예배란 어떤 의미입니까?

 

오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는 소명장으로 유명하고 또 잘 알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 가운데 대부분의 예언서들은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이런 소명장들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이런 소명은 예언자들이나 받는 것이지,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장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예배란 무엇인가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배란 무엇일까요? 예배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부르심의 자리이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곧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에는 정말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시작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의 통치시절 하나님은 웃시야 왕을 사용하셔서 남유다가 영토나, 경제력, 군사력에 있어서 아주 부유하고 강하게 하셨고, 그야말로 남유다의 전성기를 보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나라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지도자가 죽는다라는 것은 남유다 왕국에게는 커다란 위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믿고 의지했던 한 지도자의 죽음은 마치 부모의 죽음과 맞먹는 그런 슬픔이고 큰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남유다는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답답한 위기의 순간에 오늘 이사야가 향한 곳은 어디였습니까? 그때 이사야는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고 성전 안으로 들어갑니다. , 예배의 자리로 나아갔다는 뜻입니다. 예배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겠다고 결심하고 나아오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웃시야의 죽음으로 낙담한 이사야는 성전에서 이 땅의 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보좌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사야 61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바라보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과연 소망이 있어보이나요? 심하게 말해서 대한민국은 이미 끝났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상식적이지 않은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있고, 그 일들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로부터 웬만한 사람은 그 누구하나 은행에 빚을 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도 엄청난 부채를 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만 바쁘고 정치나 경제, 그 어디에도 참다운 지도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웃시야 왕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뜻하지 않은 불안과 위기의 순간이 우리에게도 있고, 때로는 웃시야 왕의 죽음보다 더한 절망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배는 과연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요?

 

절망의 자리에서 성전으로 나아간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보았고,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는 모습과 주님 곁에서 천사들이 큰 소리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그 노랫소리가 얼마나 큰지 문지방의 터가 흔들릴 정도였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란 이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소위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유명해진 사람에게서도 어떤 아우라나 영광 같은 것을 보고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은 그런 세상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러한 영광가운데 계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그 영광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할까요?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뵙다니!”

 

여러분은 이런 두려움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이 예배당에 나오지만,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두려우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그 영광 앞에 경외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초라하고 부정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 앞, 그 거룩한 땅에서 그가 신고 있던 신을 벗을 수 밖에 없었고, 하나님을 뵙기가 두려워서 얼굴을 가렸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이사야 역시도 거룩한 하나님을 뵙게 된 것이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라고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부정한 사람인지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았던 베드로의 첫 고백도 바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였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죄인이라는 의식이 없이 살아갑니다.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눈에는 다른 사람들의 죄만 보이고, 그들을 정죄하기에만 바쁩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의로워 보이는 깨끗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죄인으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것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6-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스랍들 가운데서 하나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서, 그것을 나의 입에 대며 말하였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라졌다.”

 

숯불이 입술에 닿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핀 숯불은 순결케 함의 상징입니다. 그것이 입술에 닿은 사람들은 입술이 거룩하여지고, 그것이 가슴에 닿은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과 열정이 거룩해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인지, 우리가 진정 그분의 백성인지는 우리에게 바로 이 하나님의 불에 데인 흔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날 제단 숯불에 데인 사람이 되어서 새로운 사명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다메섹 도상의 바울이 알 수 없는 빛으로 그의 눈을 데였을 때, 그가 세상에 대하여 눈이 멀고 복음의 사명자가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 냉랭해졌던 우리의 마음이, 때로는 처음 신앙을 잃어버려 미지근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예배를 통하여 그분의 영광을 보고, 그분 앞에 엎드리고, 또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숯불로 깨끗하게 되어서 다시금 뜨거운 마음으로 사명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불로 정결케 되고 뜨거워진 이사야에게 드디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려집니다.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우리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마치 혼란했던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이 그들의 왕되신 하나님을 버림으로써 사람들이 각기 자기 뜻에 맞는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욕심을 따라 살아가며, 또 좌절하고 절망하며 살아가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 내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분명한 사명의 길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웃시야 왕의 죽음과 같은, 이 세상의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깊은 절망과 슬픔 가운데서도,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통해 삶의 목적과 방향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함을 경험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자리로 나아가는 힘을 얻게 됩니다. 바로 전까지도 자신에게 소망이 없다며 두려워하였던 이사야가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은혜를 확신했을 때, 그분에게서 받은 그 뜨거운 사랑을 체험했을 때, 그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면 어디든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백은 너무나 거룩하고도 두려운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용서하시고 온전케하시는 그분의 사랑에 감동된 자의 고백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독특한 표현들이 종종 있습니다. 시편 211절 말씀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여라.”

이 말씀을 개역개정판으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되 그분 앞에서 떨며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즐거움은 서로 어울리는 감정이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두려움 가운데 떨면서도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두려운 마음으로 어떻게 즐겁게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또 빌립보서 212절 말씀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원은 기쁨과 즐거움인데 그 구원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루어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 두려움을 이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다른 본문 말씀인 요한 일서 418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제 안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보다 사람에 대한 것, 미래에 대한 두려움일 때가 더 많습니다. 또 이 시대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저에게 다가옵니다. 완전한 사랑만이 두려움을 내쫓는다라고 말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어마어마한 제사를 하나님께 올려드린 한 왕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솔로몬입니다. 여러분은 솔로몬을 어떤 왕으로 기억하십니까? 일천번제를 하나님께 올려드린 왕, 그 일천번제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꿈에 나타나 그가 구했던 지혜 뿐만 아니라 그가 달라고 하지 않았던 부귀와 영화도 모두 그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3장에는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다라는 말씀 바로 뒤에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루는 창녀 두 사람이 왕에게 와서, 판결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 사연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두 여인이 한 집에 살면서 사흘의 차이를 두고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안에는 두 사람 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둘 중 한 여인이 잠을 자다가 자기 아이 위에 눕게 되었는데, 그만 아이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죽은 아이의 엄마가 자기의 죽은 아들을 다른 여인 곁에 데려다 놓고, 그 여인의 살아있는 아이를 자기 품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새벽에 아들에게 젖을 먹이려고 일어난 아이의 엄마는 자기 곁에 누워 있는 아이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아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신이 낳은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두 여인은 서로 살아있는 아이가 자기의 아들이고, 죽은 아이는 다른 여자의 아들이라고 우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솔로몬 왕 앞에서 이렇게 다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솔로몬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열왕기상 323-25절 말씀입니다.

 

왕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두 여자가 서로 살아있는 아이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하고, 죽은 아이를 다른 여자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좋은 수가 있다. 왕은 신하들에게 칼을 가져 오게 하였다. 신하들이 칼을 왕 앞으로 가져오니, 왕이 명령을 내렸다. 살아있는 이 아이를 둘로 나누어서, 반쪽은 이 여자에게 주고, 나머지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

 

여러분은 이 명령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아이가 무슨 재산도 아니고 반으로 나누어 똑같이 나누어 가지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요? 이 판결이 정말 지혜로운 판결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말 솔로몬에게 엄청난 지혜를 주셨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어떠한가요?

 

왕의 명령은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칼을 들어 아이를 둘로 나누라는 그 명령 속에는 엄청난 살의와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명령을 내린 솔로몬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는 다윗 왕이 그의 남편인 우리아 장군을 전쟁터에서 죽게 하고 얻은 아내였습니다. 수많은 아내를 두었던 다윗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고, 솔로몬은 수많은 이복 형제들 사이의 왕위 다툼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밧세바는 첫 아들을 잃고 두 번째로 얻은 아들이자 유일한 피붙이인 솔로몬에게 자기 인생 전부를 걸고, 그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왕이 될 적임자가 아니었던 솔로몬이 왕이 된 이후, 아마도 솔로몬은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더 강한 왕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왕으로 보이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죄로부터 비롯된 죄와 상처로 얼룩진 두려움은 솔로몬을 더 잔인한 왕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를 둘로 나누라는 판결은 어쩌면 창녀가 낳은 아이 하나쯤은 어찌되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이 잔인한 두려움의 상황을 반전시킨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그 살아있는 아이의 어머니였습니다. 살아있는 아이를 둘로 나누어 두 여자에게 나누어주라는 판결이 있은 후에 살아있는 그 아이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에 대한 모정이 불타 올라서 왕에게 애원하였습니다. “제발, 임금님, 살아있는 이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시어도 좋으니, 아이를 죽이지는 말아주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이 아이를 살린 것은 바로 아기를 포기할테니 제발 죽이지만은 말아달라고 간청한 진짜 어머니였습니다. 비록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갈 수 밖에 없었던 밑바닥 인생이었지만, 창녀 어머니에게는 솔로몬이 갖지 못한 생명에 대한 사랑과 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의 재판이 지혜로운 재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떠합니까? 생명에 대한 이야기보다 죽음의 이야기가 가득한 세상,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좌절하며 생을 포기하게 만드는 이 죽임의 문화 가운데, 과연 우리는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있어야 할까요? 여러분의 두려움을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성전에 나아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계시는 주님을 뵈었습니다. 오늘도 예배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아이를 살린 그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과 같은 온전한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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