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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아는 사람(부활절제5주, 어린이주일, 2015년5월3일)

하늘기차 | 2015.05.03 18:17 | 조회 2015


                       아버지를 아는 사람

부활절제5주                                                                                                        마11:25-35

오늘 말씀에 ‘그 때’라고 합니다. 어느 때 인가 하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갈릴리 어촌 마을을 돌며 하나님 나라에대해 말씀을 선포하시고, 병든자들을 고쳐주시고,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시키며, 공생에 활동에 전념하던 때 였습니다. 그렇지만 갈릴리 북쪽 4Km에 위치한 고라신과 벳세다 마을은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 냉담했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아브라함 때에 멸망한 소돔이 오히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눅10장에서는 예수님이 72제자를 둘 씩 짝지어 파송하는 것과 관련지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10장을 보면 12제자를 마을에 파송하며, 그 활동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하였는데도 사람들이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자 두로와 시돈이 훨씬 심판을 견디기 쉬울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두운 쪽을 보시지 않습니다. 일이 되는 쪽을 봅니다. 종종 우리는 일이 안되는 쪽을 보는데, 되는 쪽을 보아야 합니다. 농사를 지을 때 피농사를 지으면 안됩니다. 벼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두운 쪽은 무시하고 밝은 쪽을 바라보는 것이 예수님의 농사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72 명의 제자들이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합니다. 근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이 더 그렇다고 합니다. 마 13장에 씨뿌리는자의 비유도 복음이 좀처럼 뿌리내리기 어려운 정황을 이야기합니다. 씨를 부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는데, 씨들이 결실하지 못해 낙심 천만입니다. 그런데 옥토에 떨어진 씨앗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하나님 나라 농사법입니다. 돌작밭, 길가, 가시덤불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뿌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거의 전파되지 않는 실망스러운 상황이지만 주님은 씨를 뿌립니다.

     바로 누가 복음에서는 72제자가 그렇게 열악한 상황 속에서 씨를 뿌렸는데, 기쁨에 차서 돌아와 보고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복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는 기뻐하는 사람들을 통해 전파되고, 확장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일을 지혜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었다고 하는데, 누가복음을 보면 이 일이 영적, 우주적 사건이라는 것, 사탄의 패배, 아들 예수의 승리, 영원한 영광에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눅10:19절을 보면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제자들을 해할 자가 결단코 없다고 단언을 하십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어두움의 힘, 죽음의 권세가 주의 이름으로 항복하는 것을 보고 기쁨으로 예수님께 나아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으로, 말로, 문자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 지혜로운 사람들, 세상이 볼 때 지도자연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 영적, 우주적 사건의 전말을 드러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72인 제자들처럼 노동하는 사람들, 소시민들, 어부들,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어린아이들이라는 것은 글자그대로 아이들이 아니라, 겸손하고, 순진하고, 단순한 바로 72 제자들, 지금도 그렇게 믿음으로 예수님의 삶을 바라 보고, 쫓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노력해서, 자기의 지적 능력으로, 경험과 지식을 통해 알고, 만나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을 보여주셔야 하나님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에도 제자들을 포함해서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였는데, 그 때 주님은 나를 보는 것이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식, 지적 능력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신앙, 순전한 믿음을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위대한 학자나 스승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 27절에서 말씀 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

들을 아는 이가 없으며,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하여 주려고 하는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고 합니다. 오직 아버지 만이 아들을 압니다. 그리고 아들 만이 아버지를 아는데,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누구인가요? 아들이 계시하여 주려는 사람입니다. 바로 지도자연하거나, 학자연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 주님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믿는 사람들이 포도나무 농부와 포도나무와 가지와 하나인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을 지켜 주님 안에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자기 삶 사는 사람들에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 되었건 이 세상에 태어나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귀한 뜻이요, 수고요, 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위로입니다. 주님은 누구는 오고, 누구는 오지 말고가 아니라 다 오라고 하십니다. 쉬게 하시겠다 합니다. 그런데 쉬는 방법을 배워야합니다. 쉼을 얻으려면 멍에를 메야 합니다. 그리고 멍에를 메려면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멍에는 밭을 갈 때 쟁기를 걸거나, 수레를 끌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들어 소의 목덜미에 얹게되어 있습니다. 한 마리 소에 쟁기를 걸 때는 호리 라고 하고, 두 마리 소에 쟁기를 걸 때는 겨리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찿아 왔을 때, 엘리사는 열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24 마리 소를 앞세워 밭을 갈았다고 하는 것인데 참 볼만 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소를 24 마리나 가지고 있었다면 큰 농사 짓는 부농이었을텐데, 겨리소로 농사지을 때, 보통 왼쪽에 힘이 세고 일의 경험이 많은 소를 두고, 오른 쪽에는 힘이 약하고 어린 소를 두어 균형을 맞추는데, 힘쎈 소가 일을 다 합니다. 근데 엘리사가 열한 겨리 소를 앞세우고 열두 째 겨리 소를 끌고 밭을 갈았다고 합니다. 마지막 소가 제일 약하고, 꽤도 많이 부리는 소이니 주인이 직접 옆에서 챙기며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근데 엘리사가 그 열두 겨리 소를 잡고, 소가 메던 멍에를 불살라서 그 고기를 삶고, 그것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곧 엘리야를 따라가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자신의 농사 일을 충직하게 도와주던 그 사랑스러운 소들을 적지 않은 자산을 다 잡아 마을 사람들과 나누고, 뒤도 안 돌아보고 엘리야를 따릅니다. 단순 명료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멍에를 멜 때 겨리소의 왼 쪽에 계시어서 함께 멍에를 메고 우리를 이끄십니다. 이 멍에는 어떤 멍에 일까요, 바로 말씀의 멍에입니다. 기도일 수 있구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들 속에 각 자의 자기 멍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근데 그 멍에를 왼 쪽에서 주님이 함께 메십니다. 멍에를 메지 않고는 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멍에 없이 밭을 갈고, 멍에 없이 짐을 나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쉬기는 커녕 골병이 들겁니다. 일에 치어서 짓눌린 삶을 살지 않을까 십습니다. 오늘 말씀에 어떤 멍에라고 되어있는가 하면 ‘내 멍에’라고 합니다. 화자가 지금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아니면 예수님은 목수이니,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꼭 맞는 멍에를 맞추어 주시겠습니까? 전설에 따르면 예수님은 멀리서도 찿아올 정도로 최고의 멍에 제작자였다고 합니다. 바로 그 멍에를 메고, 그리고 예수님이 멍에를 어떻게 메시는지 배워야 쉼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하며 겸손히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광야로 나아가 사탄의 시험을 받은 이래 십자가에 이르기 까지 당신의 멍에를 메셨습니다. 자기 몸에 꼭 맞지 않는 멍에를 메면 아프고, 힘이 들어 짐을 나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겸손히 낮추어 주님이 보여주시는 데로 주님과 함께 할 따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일단 하나님 나라의 농사는 겨리소 농사일게 틀림없습니다. 혼자 쟁기를 걸고 밭을 가는 호리 농사가 아니라, 두 마리 소가 함께 메는 멍에입니다. 겨리소 멍에는 십자가 형이어서 한 편에는 힘 센 소가, 다른 한 편에는 경험이 부족하고 약한 소가 자리하여 밭을 갑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 농사 법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맞추어준 안성 맞춤의 멍에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멍에를 주님이 맞추어주십니다. 그런데 처음 멍에를 멜 때, 소들이 그렇게 멍에 메는 것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당연하겠지요. 자기를 구속하고 무겁기도 하겠지만요? 그러나 멍에야 말로 우리를 일에서 자유케 합니다. 삶이라는 것이 집에 돈 쌓아두고 무위도식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일을 해야할텐데, 자기가 스스로 맞겠거니 해서 자기가 구해다가 메는 어디 불량품 멍에를 가지고는 평생 자기 삶과 씨름하다, 아니면 옆의 다른 소들 까지도 힘들게 하며 헛 인생 살기가 싶상입니다.  

     또 내 멍에가 편하다고 하시면서, ‘내 짐’이 가볍다고 하십니다. 여기사 꼭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이 짐’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인되게 하며 고통스럽게 하는 율법의 짐이 있습니다. 그 짐은 정말 무겁고 힘이들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짐은 가볍습니다. ‘내 짐’역시 화자가 예수님이십니다. 내 삶이라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 까지 내 것 이라는 것이 있기나 하나요?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허구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짐은 어떤 짐인가요? 예수님이 내 짐이라고 하시면서 ‘나의’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주님의 짐을 주님이 맞추어 주신 멍에로 메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락 때, 쉼을 얻는, 참 안식의 삶,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멍에를 어떻게 메셨나요? 한 아이가 자기 보다 좀 작은 아이를 엎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갑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이 안스러워서 물어봅니다. “너 힘들지 않니 네가 엎구 가기에는 너무 무거워 보인다, 좀 거들어줄까?” 하니까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아니요, “제 사랑스러운 동생인걸요”합니다.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야기를 하면서 머물러 있으라고 무려 11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마지막 머무는 자리가 어디일까요? 요15:11에 마지막 머물 곳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무어인가요? 교우여러분 사랑은 하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나마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이 부모와 자식입니다. 부모에게서 자식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 멍에를 멜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됨이었습니다. 그 하나됨의 사랑을 요한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다고 하면서,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그것이 사랑이라 합니다. 계명, 말씀, 말씀의 멍에를 멤으로 하나인 것입니다. 바로 아버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주님의 짐을 주님의 멍에로 지며 살아갈 때 주님의 위로, 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지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위로는 주님의 일을 주님이 맞추어주신 멍에로 지고갈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거짓 평화, 거짓 위로 말고, 참 평화, 참 위로, 참 쉼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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