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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순종을 배우자 !(사순절5째주, 2015년3월22)

하늘기차 | 2015.03.22 14:21 | 조회 2493



                                                          참 순종을 배우자 !
사순절제5주                                                                                                                                                       히5:7-10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영원하신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7절 말씀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
         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탄원의 기도를 무엇을 보고 들어주셨다고 합니까? 경외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경외하는 마음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도 보여집니다. 창22:12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들 이삭을 바치려 하자, 다급해진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하면서 ‘네가 하나님 두려워 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수 십년의 세월의 인고 속에, 마지막에 자기 아들을 내어 놓는 기가막힌 상황에 이르르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마주 서는 긴장감이 연출되는데,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하나가 된 것은 ‘하나님 경외’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드렸다면 수 십년 하나님께서 공들여 세우신 아브라함의 신앙이 물거품이 될 것이고, 아브라함도 그나마 떠나라는 약속어음 하나 달랑 받아서 떠난 30여년의 신앙의 여정이 물거품이 될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아니 이 전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 까지 온 것입니다. 그렇게하나님은 늘 우리를 인정해 주십니다.
  
   평화의 왕 멜기세덱과 화친을 맺고 그럭저럭 잘 지내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찿아오십니다. 그런데 창 15장에 보면 그 첫 마디가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앞 전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전쟁의 포로가 된 조카 롯을 수 백의 사병을 동원하여 추격하여 잃었던 모든 것을 다시 빼앗아 온 직후입니다. 그 당시의 싸움은 중동 전체를 뒤흔드는 큰 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연합체에도 속하지 않던 아브라함이 단신으로 조카 롯을 구해 온 것입니다. 대단한 힘과 용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합니다. 당당히 전쟁에서 승리한 아브라함이 왜 두려워 할까요?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아마도 그 중동지역의 패권이 수시로 바뀌며, 언제 또 그러한 전쟁에 휘말릴지 모르는 정황 속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부족을 보호하고, 지켜내는 데 한계를 느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부족국가 사회에서 뚜렷한 후계자가 없다고 하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을 것이고, 혹 부족에서 이탈하는 낌새도 보이지 않았겠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 속에 하나님이 찿아오신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은 두려워 하였을까요?

   문제는 약속한 아들이 아직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속상했고, 화가 났고, 열이 바쳤습니다. 나타나신 하나님께 아브라함은 단도직입적입니다. ‘나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여기에 무슨 고상한 믿음이랄지, 인격적인 성숙함은 없습니다. 이전에 이집트로 가서 생명의 위협을 받아, 아내를 팔아넘기던 그 모습이 다시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하나님과의 계약은 더 이상 끝났다고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충성된 종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으려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후벼 팝니다. 자식을 주지 않았으니 이제 이 종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 선언 합니다. 작심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차분하게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합니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될 수 없으며, 너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 상속자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 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보이십니다.

   이러한 체험 해 보신적 있나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스스로 무릎 꿇린적이 있는지요? 롬5:21에 보면 죄가 죽음을 통하여 사람을 지배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은혜가 의를 통해 사람을 지배한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은혜가 바로 그렇다고 합니다. 한글 개혁에서는 ‘지배한다’를 ‘왕노릇’ 한다고 하여 은혜가 왕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은혜는 그냥 은혜가 아닙니다. 나의 인생 철학이나, 신앙적 경험, 인간관계, 그리고 죽음의 힘을 능가하는, 나를 무릎 꿇게 하는 은혜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으라 해도 눈하나 끔쩍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모순과 자기 죄책감에 빠져 옛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천인공노할 인륜을 거역하는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한 번 그 왕 같은 은혜 앞에 서면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인위적 가치 체계를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생명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존전에 우리가 나아가야 하며, 사람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분리시킨 죄와 죽음의 어두움이 우리의 내면에서부터 끊임없이 우리를 지배하여 불안과 근심, 분쟁과 욕망에 붙들리게 하며 우리를 죽음의 어두움으로, 특히 오늘 이 시대로 치면 신자본주의라고 하는 맘몬을 도구로 삼아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을 나누고, 점점 더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이웃에 무감하며, 자기, 그리고 극세한 자기 가족 만을 챙기는 이기적 세상으로 만들기위해 인류를 죄의 죽음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리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온 우주와 역사와 온 피조물 개체 하나 하나를 보시며, 구원의 섭리를 펼쳐  생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 앞에 서기만 하면 우리 모두는 그 은혜 앞에 무장 해제 되며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 처럼 나, 내 가족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와 역사, 온 갖 피조물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 주님이 십자가에서 바라보는 그 마음으로 내 이웃의 아픔과 피조물의 신음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 은혜에, 왕같은 은혜에 무릎을 꿇는 고백이 없으면, 신앙은 겉 돌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왕같은 은혜 앞에 서면 우리는 자유하며, 평화하며, 사랑으로, 생명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지난 목요일 안산 합동분양소에 다녀왔습니다. 합동분양소에는 여러 콘테이너부스가 차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 기독교 부스도 있는데, 매주 목요일 저녁 6시에 기도회가 있습니다. 그 기도회에 세월호 아이들의 부모 중에 다영이 아빠와 창현이 엄마가 늘 계십니다. 한 번은 기도회를 마치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그러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아 이것이 은혜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월호로 아이들을 잃은 엄마, 아빠들의 상심이 너무 커서, 교회에 다니던 분들이 교회를 많이 떠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구 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회의를 느껴 신앙을 잃었고, 특히 교회에서 더 상처를 많이 받았다구 합니다. 이제 그만 하고 교회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럼 지난 1년 동안 진실을 규명하고, 선체를 인양하고,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는 것인가 라는 의구심에 너무 실망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모두 회당 뿐 아니라, 고통과 삶의 현장에 찿아가 병들고, 배고프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만나주었는데, 하며 섭섭함을 금치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중에 창현 엄마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세월호 침몰할 때 가만히 팔장 끼고 계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라도 세월호가 침몰하지 못하게 온갖 노력을 다 귀울였고, 누구 보다도 아이들을 구하려고 최선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배가 거의 귀울어 갈 때, 모든 일을 뒤로하고 침몰하는 배 가까이 접근하여, 한 아이라도 더 구하려고 애썼던 고깃배 어부들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분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현 엄마의 이 고백을 들으며, 참 은혜입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과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무릎꿇게 합니다. 왕 같은 은혜입니다. 죽음이 왕노릇하는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세우는 분들이 맑은 샘처럼 솟아납니다. 그 엄마, 아빠가 매주 목요일 콘테이너에서 세월호와 함께하고자 하는 교회와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어깨를 마주하여 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저 별들처럼 너의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때만해도 그저 자기 부족에만 필이 꽂혀, 아들 만 생각하지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별을 보는 순간, 그 우주의 숨막히는 광경을 바라보는 순간 아브라함은 마음을 돌이켜 약속의 말씀을 다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마음을 받으시고,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의로 여겼다’는 말은 너의 지금 그 마음이 옳다, 조금 전 까지 너는 참된 자아가 아닌 거짓 자아에 잠시 매여, 약속 아닌 것에 한 눈을 팔았는데, 지금 별을 보며 우리가 함께 다시 약속을 한 것을 네가 받아들였는데, 나도 너를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잘 한 것이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해 주십니다. 이삭을 바칠 때 하나님이 다급히 ‘네가 하나님 두려워 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고 하는 모습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지금 하늘의 별을 보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인정한 것은 ‘하나님 경외’에 미치지 못합니다. 마치 어린 자녀가 아빠 품에서 이래 저래 노는 것을 아버지 하나님이 품어주시는 것 같은데, 이삭을 바치는 장면에서는 치열한 믿음의 싸움, ‘두려움과 떨림’의 싸움이 벌어집니다. 아니 이미 아브라함은 마음을 굳혔습니다. 이 마음에 하나님이 밀리는 형국입니다. 이 왕 같은 은혜의 자리에 경외심을 가지고 서기 까지 온갖 삶의 여정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 경외심을 예수님이 탄원하며 기도하는 마음에서 보시고, 그래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인류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십자가를 통해 드러내신 것입니다. 8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고난을 당하심으로 순종을 배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하나님 경외심이 바로 고난 가운데 순종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것입니다. 순종을 배웠다고 합니다. 순종은 태생적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배운 것입니다. 고난을 피했다면 아마 순종을 배우지 못했을텐데, 예수님은 하나님 경외의 마음으로 아버지 뜻에 순종하여 고난을 겪음으로 완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지금부터 11년 전,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보기 위해 우리 교회가 단체로 죽전CGV에 갔었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 속에서 예수님은 줄 곳, 살점이 찢기고 피범벅이 되는 데, 어지간한 잔혹 영화보다 끔찍하여, 보는 내내 우리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어느 영화 평론가는 이 영화를 극사실주의라고 하면서 실제 예수나 바리새인들은 아람어로, 빌라도는 라틴어로 대사를 하는데, 십자가형의 참혹한 이미지가 워낙 강렬해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예수의 잔혹한 희생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십자가의 고난을 바라보게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작년 연예인 부부인 서정희•서세원 부부의 문제가 언론에 회자되었는데, 최근 법정에서 서정희씨는 "19살 때 남편을 만나 결혼해 32년간 거의 포로생활을 했다. 남편이 무서워서 감히 이혼을 요구할 용기가 나지 않아 참고 살았다"고 하면서 "남편을 목사로 만들면 모든 게 변할 수 있다는 믿음과 자녀들 때문에 가정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남편은 목사가 된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동안 참고 살았나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편을 목사로 만들려고 한 것을 서정희님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것이 믿은, 즉 하나님의 뜻에대한 고백일까요? 아니면 자기 뜻일까요? 하나님은 그렇게 폭력을 방관하거나, 그러한 두려움 속에서 30년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믿음을 바라볼까요? 전체로서 구원을 보지 못하고, 단세포적인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작위한 것입니다.

   신학자 강남순 교수는 이 문제에대해 '순종과 희생' 이 '이데올로기'가 되어 폭력어 '자연적이고, 당연한' 사실로 간주되게 한다고 하면서, 오래 전에 사라진 것 같은 '현모양처 이데올로기' 또는 '삼종지도 이데올로기' 가 이 21세기에도 한국사회의 입시제도, 문화적-종교적 덕목들, 군사주의, 폐쇄적인 애국주의 등과 같은 색다른 옷을 입고서, 다양한 종류의 폭력을 행사하고 여성들과 같은 경제적, 사회문화적 약자들에게 권력에의 '맹목적 순종'과 '자기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정에서 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이 자신의 유일한 '위로의 공간'인 교회에서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들에게 '상담'을 할 때에 거의 예외없이 듣는 상담 내용이 '희생하며 참고 살아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극심한 고통도 참아내었는데 그 정도 고통도 못 참는가, 하나님이 주신 가정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이라는 것입니다. '지도자'이며 '전문가' 들에게 이러한 상담을 받은 여성들은 눈물을 삼키며, 지속되는 폭력의 고통을 견디어 내는 삶을 '선택'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영화도 그렇고 서정희님도 그렇고 희생, 십자가, 고난, 순종에 무조건적으로 몰입해 버립니다. 왜그럴까요? 의도된, 내밀하게 드러나지 않게 강요된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는 화석화되어 그 자리에 한 번 갖혀버리면 죽음입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읽고 나누는 복음은 생명이요, 자유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그 복음이, 그 생명의 말씀이 뿌려지자 마자 바로 화석화되어버리는 것은, 말씀이 이데올로기의 밭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은 종려 주일이며 고난주간이 시작이 되며, 고기교회는 기도의 기간입니다. 그런데 이 패션, 즉 고난이라는 말의 영어가 Passion인데,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열정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고난입니다. 마크스 보그라는 신학자는 이 Passion을 먼저 열정으로 바라봅니다. 주님의 고난은 하나님 나라의 열정에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 열정이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한 것입니다. 마크스 보그는 ‘마지막 일주일’이라는 책에서 ‘예수가 열정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고 하면서, 십자가의 고난을 그의 마지막 12시간, 즉 체포, 심문, 고문, 그리고 십자가에 달림에 국한 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놓쳐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이 2006년에 출판된 것을 보면, 영화 ‘폐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염두에 두지 않았겠나 십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피범벅이 된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십자가의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 공생애 전체를 처음부터 십자가 까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하나님께서 인정한 경외하는 마음 뿐 아니라, 하나님 경외심의 그 시발점을 보아야합니다. 그 시발점은 어디서부터 인가요? 역시 하나님의 그 구원의 섭리와 경륜 속에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아마 아브라함만 부름을 받았을까요? 전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에 응답을 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또 끊임없이 오락가락 하면서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다시 받아들인 것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 전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드디어 그 경외함을 볼 수 있었고,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게 구원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아브라함도 그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인류와 온 우주와 역사를 구원하시는 그 계획 안에 자리한 것입니다. 오늘 7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눈물과 부르짖음으로 드리는 기도 속에서 경외심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시작이 어디서 부터인가요? 예수님은 육신의 아버지와 함께 할 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향한 열정 속에 순종을 배워 고난에 자리 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은 제대로 순종할 대상을 찿아야, 진정 구원을 이루는 순종이 될 수 있습니다.

  재물에, 물질에, 권력에, 자기 일에, 자기 신념에, 경험에, 인과관계에, 세상풍조에 무릎을 꿇으면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온 우주와 역사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며, 온갖 피조물의 머리카락 까지도 세시며, 그 아픔을 알고 계시는 창조주의 선한 뜻에 응답하며, 그 부르심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조금식 순종으로 나아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경외, 즉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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