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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러운 한 사람의 재발견(사순절4번째주, 2015년3월15일)

하늘기차 | 2015.03.15 14:55 | 조회 2339


                                               새삼스러운 한 사람의 재발견

    사순절제4주                                                                                                              요12:20-26

   다른 복음에는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뜬 금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요한 복음의 기록 대상이 누구인지를 염두에 두면 시의 적절하며, 고개가 끄떡여지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는 것과 함께 예수님이 유대민족의 왕이 아니라, 인류의 주권자요, 왕이라는 것과 평화의 왕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은 A.D100년 경에 기록되었는데, 특히 당시 헬라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의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그리이스인들은 꽤 낙천적이고, 여행을 즐거워하여, 세계 곳곳을 다녔다고 하는데, 특히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헬라인들은 아마도 유대교에 관심을 갖고, 유대교 전통의 유월절 행사에 절기투어를 하러 예루살렘에 오지 않았겠나 십은데, 성전 바깥 이방인의 뜰 까지 와서 성전을 둘러 보다가, 한 유대 청년이 장사치들을 쫓아내는 현장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지 않았겠나 십고, 특히 유대교와는 좀 다른 특이한 냄새가 나는 예수에대해 알고 싶어 했을 것 같습니다.

   안드레와 빌립과 함께 찿아온 헬라인들에게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예수님이 뜻하는 것과, 제자들을 포함해서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받아들인 뜻하고는 전혀 달랐습니다. 지난 번에도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에대해 하나님의 아들이기 보다는 ‘사람의 아들’로 불리워지기를 더 좋아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도 예수님은 스스로에게 ‘인자’라고 합니다. ‘인자’라는 말은 다니엘서 7장에서 처음 기록이 되는데, 당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시대였고, 다니엘도 역시 바벨론에 잡혀가, 최고의 벼슬 자리에 오른 때 였습니다. 이 다니엘이 꿈 속에서 환상을 보았는데, 네 마리 짐승이 서로 힘겨루기를 통해 흥망성쇄를 하는 형국입니다. 바로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이스의 흥망성쇄를 다니엘이 본 것입니다. 그렇게 4 짐승의 환상을 보는 중에 ‘인자’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나타나 하나님 앞에 서는데, 그 때 하나님께서 이 ‘인자’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어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고 하면서, 그 권세는 영원하며, 그 나라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끔찍하게 포악하고 잔인한 짐승들이 지배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이제는 새로운 권세, 새로운 나라가 도래하는데, 이 나라는 사람이 다스리는 온유하고, 부드러우며, 인간미 넘치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는 점점 쪼그라들고, 힘은 약해져, 그 시대가 언제 올까하며 하늘 만 쳐다봅니다. 에녹이라는 위경에도 ‘인자’가 나타나는데, 전무후무한 힘과 권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영원히 망하지 않는 유대인의 왕국을 세울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에게 ‘인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승리의 정복자입니다. 그래서 그 날, 헬라인들에게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라고 하자 사람들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그 말씀을 실현하실 때가 왔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말 이후에 바로 죽음과 십자가, 고난에대한 이야기를 하자 고개를 절레 흔들며 이해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역시도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나라를 십자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헬라인이 예수님에게 찿아 왔을 때, 예루살렘 분위기는 하나님 나라의 기대감으로 해방의 열기로 고조가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 번 기회에 무엇인가 변화할 것이라는 분위기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기대감은 더할 나위 없었고, 그래서 유대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 직전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다시 들렀을 때, 그것을 알고 떼로 몰려갔습니다. 또 무슨 기적을 베풀까 하는 호기심을 그들을 자극하였습니다. 특히 제사장 그룹이었던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영생도, 천사도 믿지를 않았는데, 나사로가 살아낫다구 하니, 그들의 교리와 믿음에 치명타를 준 나사로가 정말 살아났는지 보고 싶었을 것이고, 이 참에 그 증거를 인멸하려고 나사로를 죽이려고 까지 하였습니다.

   베다니에서부터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행진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군과 그 부대를 환영하는 열기 그 이상이었습니다. 종려가지를 꺽어 흔들며, 옷을 벗어 길에다 깔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12:19절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미 예루살렘의 당국이 이 열기를 제어할 수 없을 지경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한 창 그 환호가 고조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타셨습니다. 그러니까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예언을 이루시고자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내시고, 또 지금의 광기를 식히려고 의도적으로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뒤뚱거리며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스가랴 예언자의 말씀을 떠 올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다윗 왕권을 회복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 제자들도 역시 높은 자리에대한 열망으로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그러나 기꺼이 사람들의 환호를 정복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서 받으시며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에 달려야하는가 라는 생각으로 몹시 괴로워 합니다. 벗어나고 싶은데, 그러나 이것이 당신이 감당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이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이름, 그 나라, 그 영광을 위해일 하셨는데, 그 영광이 또한 자신의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42절에서도 보면 바리새인들 중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는데,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서 드러내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광 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꾸중을 한 것과 같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친 후 바리새인들과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 때에도 바리새인들에대하여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영광은 구하지 않고 자신들끼리 서로 영광을 주고 받는다고 합니다.

   몇 일 전에 어느 밴드에서 읽은 글입니다.
         한 미군병사가 스웨덴을 여행하던 중 버스 옆자리 사람에게 “아마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일 겁니다. 왜냐하면, 일개 시민이라도 원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백악관에 가서 대통령과 국사를 논의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라고 자랑스레 말했습니다. 그러자, 옆자리에 있던 스웨덴 사람이 “그렇지요! 그러나 스웨덴에서는 국왕이 일반 평민과 함께 버스를 타고 다닌답니다.”라고 응수했습니다. 그 사람이 먼저 버스에서 내리자, 버스에 있던 다른 사람이 “방금 내린 그 분이 바로, 스웨덴 국왕 쿠스타프 아돌프6세랍니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미대통령이 그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일반시민과 국사를 논의 할 수 있음도 놀랍지만, 일국의 왕이 그 높은 신분을 던져버리고 일반시민과 함께 버스를 타고 다니는 스웨덴국왕의 모습은 참으로 겸손한 자세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신(神)의 경지까지 오르기를 소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리에서 ‘종’의 자리로, 종의 자리에서 죄인의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나중엔, 그 당시 최고 극형인 ‘십자가형’까지 받으셨습니다.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한 말씀을 제자들이 곡해하자, 제자들에게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시는데, 밀알이 심어져서 썩어져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고, 또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산다고 하는 말씀을 통해 그냥 생존하는 삶은 삶이 아니라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저는 그 두가지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있는 말씀이 되려면 오늘 말씀 마지막 절인 26절 말씀 처럼‘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후에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에대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지난 주에 고린도 전서를 다 끝낼 즈음, 고전16:15을 통해 귀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사울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스데바나의 가정은 아가야에서 맺은 첫 열매요, 성도들을 섬
         기는 일에 몸을 바친 가정입니다”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를 공부하면서 저에게 소중한 것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첫 째는 성찬이 내 살과 피를 기념하여 죽음을 선포하는 예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구요, 두 번째로는 방금 읽은 말씀인데, 이 말씀이 외 소중한가 하면, 당시 고린도 교회는 주변의 교회 보다 훨신 빠르고, 크게 성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문제로 교회의 정체성이 흔들리기도 하였습니다. 파벌이 생기고, 성적 타락과 우상에 바친 먹거리, 교인들 간의 사적인 소송, 그리고 무엇 보다 이러한 문제거리들을 야기시킨 지나친 집단적인 열광주의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4:14절에서 이러한 신앙에 대해, 아무런 열매가 없다고 합니다. 얼마전 미대사 피습 사건이 있은 후 어느 기독교 교단에서 한복, 부채춤, 발레하는 모습 속에 그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가 영적이라 하지만 오히려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을 우선하고,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은 가치관의 삶을 사는 모습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대해 ‘육에 속한 사람들’이라 합니다.

   그런데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사도 바울은 한 가정에대해 언급을 합니다.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저는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고전16:15절에 등장하는 ‘스데바나의 가정’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데바나의 가정에대해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몸을 바친 가정이라고 합니다.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집단적인 광기에 빠져, 세상의 가치관에 몰입되어 마음에 열매가 없을 때, 그 속에 그렇게 섬기는, 그것도 몸을 다 바쳐 섬기는 가정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고린도교회가 유지되었던 것은 말 없이 교회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이 그 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몸을 바친 사람들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몸으로 섬기는 사람들과 함께 수고하는 각 사람에게도 순종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존종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고린도 교회의 이러한 광기, 집단적 신앙적 작위에 휘말리지 않고, 순전히 몸을 드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 눅22:27에서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은지 서로 기득권 싸움을 할 때, 예수님 께서 ‘그래, 누가 더 높으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시중드는 사람이 높으냐?’, ‘밥상에 앉은 사람이 높으냐?’ 제자들이 이 걸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3살 아이도 알 만 한 것을 왜 제자들에게 물으셨을까요?

   오늘 이 시대에 우리는 ‘새삼스러운 한 사람’을 봅니다.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에대해 우리는 이야기해야 합니다. 섬기는 사람으로 있다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섬기는 사람에대해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말하고 보여주셨습니다. 유월절 마지막 식사 때, 예수님은 또 한 번 제자들을 불편하게 하십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대야에 손수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식당에 밥을 먹으러 들어온 사람들이 식탁에 앉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식당에서 서빙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맹목적으로 무릎꿇고 복종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유입니다. 그 비유를 통해 섬기는 사람을 새삼스럽게, 그러니까 이미 익히 알고 있지만, 망각해 버린 모습을 주님이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이 말은 제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섬기는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무엇을 섬기나요, 오늘 말씀의 마지막 구절인 요10:26은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기득권을 얻고자 높아지려고 하니까, 음식점 정황을 이야기 속에 끌어들였는데, 주님이 말씀하고 싶은 것은 음식점에서 서빙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고기교회의 정체성에대한 고민을 계속 해 오고 있는데, 바로 이 말씀이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눅22:27의 섬긴다는 말은 헬라어로 ‘디아코니아’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도 ‘섬기는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십니다. ‘새삼스러운 한 사람’으로 낯설게 다가옵니다. 주님 처럼 이제 우리 고기교회는, 성도 각자 한 사람은 세상 가운데 섬기는 사람으로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사순절 기간 동안에 묵상의 말씀이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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