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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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누구냐?(대강절첫번째주, 2015년11월29일)

하늘기차 | 2015.11.29 14:32 | 조회 1924

 

                   이 사람이 누구냐?

대림절첫번째주                                                                                                      마21:1-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온 도시가 들떠서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의 공생에 동안 끊임없이 따라붙었던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고향 갈릴리로 내려갔을 때에도 사람들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 아니냐? 동생들과 누이들도 지금 우리와 함께 같이 살고 있지 않느냐? 하며 예수를 도외시하며 꺼려합니다.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시다가 풍랑이 일어 풍랑을 잔잔케 하자 제자들은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복종하는가 라고 합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예수님이 섰을 때,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ECCE HOME! 이 사람을 보라!고 합니다. 사실 ‘이 사람을 보라!’는 말은 초대교회 당시 세상을 향한 교회의 외침이었습니다. 세례 요한 역시 예수님을 ‘보아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로 상징되는 세상의 권위 앞에 섰을 때, 빌라도가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 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고 하자, 위에서 주지 않았다면, 당신은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다고 일축해 버립니다. 예수님은 공생에 동안에 한 번도 자기 스스로의 정체성으로부터 오지 않는 말이나, 태도나, 행동을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의 눈에 게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별명을 가지셨습니다. ‘먹고 마시기 좋아하는자’, 죄인과 창녀와 어울리기 좋아하는자, 예수님의 가족들은 ‘정신이 나갔다’고 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칭하는 말 중에 그래도 호감이 가는 말은 ‘사람의 아들’인데, 이 호칭은 어떤 특별한 호칭이 아니라, 당시 가나안에서 통용되던 아람어로 평범한 한 사람임을 표하지만, 참사람, 인간으로서 인간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드러내 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사람 답게 살라는 표를 보이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한 번도 권위를 세우신적이 없으십니다. 마23:8이하에 보면 스승이니, 지도자라니, 아버지 등으로도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높아지려고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려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 합니다. 주님은 하늘의 권세와 영광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그것도 가축들이 머무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위로, 하늘로, 영광, 하나님, 존귀, 경배와 찬양을 부르짖는데, 예수님은 땅으로, 가축에게, 병자들에게, 감옥으로, 창기와 죄인들에게 아퍼하며, 고통받는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향합니다. 빌2:9에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을 높이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낮아지신 예수님을 영광으로 이끄십니다.

     한 번은 세례 요한이 이 사람이 정말 오실 그 분인가 미심적어서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묻자, 예수님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눅7:22이하에서 보면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

                         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고 만 하십니다. 누가 그 일을 행하였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세상 속에 선포되고, 확장되어가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권위도 세우려 하지 않습니다. 권위가 있다고 한다면 자기가 자기되는 권위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실 때 ‘누가 이렇게 말했다’ 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하셨습니다. 세상의 학문이나, 권력을 빌어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의 자존감을 가지고 사람으로서 마땅한 자기 권위를 세우십니다. 그러니까 사람 스스로의 순전한 자존감 외에는 아무런 권위도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권위에는 복종이 따릅니다. 주님에게 그렇게 복종을 요하는 권위가 있으셨습니다. 바로 악령, 질병, 죄와 율법, 자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권위도 어떤 힘을 빌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신뢰, 믿음, 하나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조건이나, 단서를 붙이지 않으시고, 진리를 선언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입니다. 산상수훈 마5:43,44에 볼 것 같으면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

                         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

                         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들처럼 어떤 소명을 받았다거나, 환상을 보았다거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는' 이라고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자존감이 철철 넘치는 말씀입니다.

     성전의 장사치들을 채찍으로 몰아내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물으셨습니다.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하시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냐, 사람에게서냐 라고 물으시고서는, 답을 하지 못하자, 나도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 것은, 한 마디로 너 어느 파에 속하고, 어느 학교를 나왔고, 어떻게 고시를 패스했고, 누구 후원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냥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실 때 보면 그 이야기들이 모두 생활과 관련되어 있지 어디 학문적인 결과물이 아닙니다.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이야기와 삶이 하나이지 무슨 권위가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이 그냥 권위입니다. 자존의 권위입니다. 그 자존의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예수님의 말과 행위가 하나인데, 그 지향점이 하나님입니다. 진리입니다. 그러니 비유를 통해 느껴지는 것은 어떤 말씀의 권위가 아니라귀 있는 자는 들으라 입니다. 아니면 말구입니다. 예수님에게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들려주는 진리이신 하나님에게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강조하고, 돌이키고, 이끌고 깨우치셨습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은 믿음은 이런 것이라는 것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죽음이 자기를 매달지만 그 죽음이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하지 못하리라는 믿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이들이 선물을 받으면, 몇 일은 참 애지중지하며 잘 간직하고 놉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금방 실증을 느낍니다. 신앙 역시 선물입니다. 그러나 지키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대충, 적당히, 권위와 명예와 명분과 물질과 관계와 세속적인 모든 가치를 덫 입혀, 믿음 아닌 것을 믿음인 것처럼 포장해 우상을 만들어 버리고, 아니면 폐기처분하고, 아니면 책꽂이에 잘 꽂아놓은 성경 찬송 처럼 모셔놓고 자기 중심적으로 편안하게 신앙합니다.

    주님의 권위는 스스로의,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향한 자기 당위성에서 오는 내적 확신입니다. 이 내적 확신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성령의 내적 확신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이는 내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였습니다. 사42:1에 보면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

                          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

                          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순간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임하여 자기 내적 확신에 충만합니다. 하나님과 우주의 피조물들과의 조화 속에서 자신과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의 자존감은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깊고, 넓고, 높게 하나됨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하나되지 않으면 하나님 아닌 다른 기쁨을 찿습니다. 다른 가치를 추구합니다. 이게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생 자체를 잘 못 가게합니다. 인류 전체, 문명 자체가 비뚤어져 버립니다. 교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님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는데,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라 합니다. 포도나무이야기는 예수님의 체험적인 내적 확신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런 권위가 없습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이 듣습니다. 이 말씀을 기뻐하는 사람에게 성령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온 세상 피조물과의 하나됨의 기쁨을 맛보게 하십니다. 그저 값싼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됨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공의로움과 생명의 평화, 죄 사함의 은혜, 희년의 기쁨, 회복으로 나아갑니다. 모든 권위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이신 주님에게는 자기 자존감이 있습니다. 성경은 권위 없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 사람을 보라’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올리브산이 있는 벳바게 마을에 들어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맞은 편 마을에 가서 보면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고, 그 곁에 새끼가 있을텐데,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합니다. 누가 무어라 하거든 ‘주님께서 쓰려고’하신다고 말하라 합니다. 그러면 곧 내어줄 것이라 합니다. 주께서 쓴다는 것입니다. 주인이라고 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표현하는 곳은 여기 딱 한 군데입니다. 그렇게 끌고 온 새끼 나귀를 타고 뒤뚱거리며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평화의 주권자이십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이 옷을 벗어 나귀 등에, 길 위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들고 호산나 하며 왕으로서의 예우로 환호합니다. 제자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유대의 왕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 인류와 온 우주 만물의 주권자로 이 호산나를 받으셨습니다. 얼마나 해학적이며, 시적이며, 아리러니입니까? 인간의 심성으로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뒤뚱거리며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십니다.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기뻐함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 평화입니다. 오신 모습으로 다시 가십니다. 이제 다시 한 해가 시작됩니다. 교회력의 시작입니다. 교회 생활을 시작하는 대강절 첫 주일 주님의 자존감이 여러분들을 견인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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