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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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며 (성령강림후스물다섯번째주, 2014년11월15일)

하늘기차 | 2015.11.15 15:48 | 조회 1852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며

성령강림후스물다섯번째주                                                                                       롬8:18-25

     10여년 전인가요, 수원의 고등교회와 연합으로 추수감사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고등교회 사모님께서 영적 걷기를 인도하였을 때, 맨 발로 교회 앞에서 솔밭으로, 그리고 처음자리 논자락으로 습지로 해서 한 바퀴를 침묵하며 돌았던 기억이 납니다. 밤껍질에 발이 따끔따금 찔리는 아픔을 기꺼이 감수하며 걸었습니다. 보통 때는 무심히 보던 자연이었는데, 지금은 동물을 훈련하며, 돌보는 자리가 되었지만 그 쪽 밤나무, 도토리 나무 숲을 따라, 내려오다가 나무의 굴곡진 껍질들이 아픔과 고통의 흔적처럼 느껴지면서 그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팔을 뻗쳐 무언가 외치며 찬양하는 영적 감흥을 맛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바다와 산과 들로 나아가 간혹 이러한 장엄함, 아니면 섬세한 생명의 몸 짓을 느껴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 까지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똑같은 자연을 바라 보며 피조물의 근원적인 신음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왜 피조물들이 신음하는가 하면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못함으로부터 오는, 피조물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에서 오는 탄식을 사도 바울이 듣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신음과 고통에대해 함께라고 합니다. 온 우주의 피조물들이 서로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광대한 우주의 조화의 찬양을 사도 바울은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한 피조물이 아프면 함께 같이 아프고, 기쁘면 함께 같이 기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시대에 강이 파헤쳐지고, 가축들이 살처분당하고, 인간의 욕망으로 밀림이 파헤쳐 지고, 유전자를 조작하며, 핵 개발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힘을 보유하였고, 지구 온난화에 따라 인류가 기후생태적 위기에 처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피조물들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요?

     20절은 그러한 신음과 고통을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한데서 온다고 합니다. 이 허무야말로 물질우상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가공할 자연파괴는 에덴 동산이나 바울시대나, 지금이나 역시 눈에 보이는 것, 물질의 우상에 모두들 무릎을 꿇은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굴복으로부터 오는 아픔과 고통을 본 것 같습니다. 인간의 욕구가 자꾸 가시적인 풍요로움으로 나아가고, 그 욕구가 집단을 이루고, 국가와 제국으로 커져 도시문명과 함께 거대한 폭력체계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 이야기를 찬찬히 보면 하나님은 죄에대해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된 카인과 그 후손들을 품고 계시는데, 죄가 어떻게 집단적으로, 문명과 합하여 거대한 힘을 형성하며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그래서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 사건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도 국가와 물질 문명은 거대한 폭력적인 시스템을 이루어 인간의 삶을, 문명을 황폐하게 합니다.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하는 것이 자의가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에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전가할 수 없습니다. 이미 롬1:24은 하나님은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그 언행을 자유롭게 인정하십니다. 하나님도 그 자유로움을 간섭하거나, 제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을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하여 자기 길을 갑니다. 아버지는 그 길을 가게 합니다. 그리고 기다립니다. 오랜 동안 기다립니다. 오늘 말씀 마지막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아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데, 어떤 기다림인가 하면 자유자가 자유롭게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왜 신음하고 있을까요? 왜 고통할까요? 왜 소망 가운데 기다려야 할까요?

     어제 카톨릭농민회원분이 물대포에 맞아 뇌사상태입니다. 정조준에 맞아 쓰러지신 것입니다. 13일의 금요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무려 129명의 사망자가 생겼습니다. 많은 분들이 프랑스를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목소리가 있습니다. 미국 텍사스 브라이트 신학대학 강남순교수는 이 번 테러를 보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슬람이 어떻게 미디어와 소위 '전문가'들에 의하여 표현되고 규

           정되어 왔는지 세밀히 분석한다. 서구사회의 '미디어들'과 소위 '전

           문가들'이 우리에게 '보이는 것'을 규정하고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파리참사와 같이 '보이는 것' 저편에, 우리는 무엇을 '보지 못

           하고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파리의 시민들의 일상이 온통 파괴

           되었다. 그런데 이 세계 저편에서는 '깨어질 일상' 또는 '돌아갈 일

           상'조차 박탈당하는 삶을 수십년 간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그림자

           로서가 아니라 생생한 얼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돌아갈 일상'

           이 없는 이들이 취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신문이, TV가

           보여주지 않는 것--그래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는가.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

           들이 미디어에서 이제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되어 가고 있다. 되돌

           아갈 일상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일상으로 돌아가

           라'는 말은 무책임하고 잔혹한 이야기이다. 다양한 자리에서 살아가

           고 있는 우리 모두의 지속적인 과제는 '보이는 것' 저편에 있는 '보

           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자 하는 끈기있는 지속적 노력이다. 우리 눈

           에 '보이는 것' 들에만 분노하고, 그들을 '악마화'하는 것만으로 우리

           사회에 평화가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악마성'은 '그들'

           속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속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는 것--

           이러한 인식론적인 비판적 성찰이 세계 평화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긴급히 요청된다.“

     작년 6월 평신도 강단 때에 이섭집사님께서 성서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 주면서, ‘수태고지’ 그림에대해서 어느 순간 오른 쪽에 마리아, 왼쪽에 천사라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되었던 틀들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즉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바뀌는, 그러다가 다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오는 그 시점에 그려진 수태고지, 그리고 천사를 빛으로 묘사하고, 또 오른 쪽의 마리아가 전혀 마리아 같지 않은 여인의 모습으로, 그리고 어느 큰 빌딩모습을 보며 (1930년 마그리트라는 작가에 의해서 그려진)그림에대한 설명이 없이는 그것이 수태고지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림에 이르기 까지 2003년에 그려진 수태고지에 나오는 천사는 어깨에 날개가 달려있지 않으면 하인이나, 남성처럼 보이는, 천사 같지 않는 천사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눈은 이 천사에 주늑든 것 같기도 하고, ‘설마 천사?’ 하며 의심의 눈길을 보입니다.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게’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는데, 맨 오른쪽에 시커멓게 서 있는 존재로 유다를 그려 넣고, 그리고 그 유다를 당혹감과 놀라움으로 바라보는 제자들의 모습들, 그리고 그 가운데에 홀로 고심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상실한 시대, 하나님이 죽었다는 시대 속의 그림들을 보았습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면 장면에서도 빌라도에게 모든 빛과 초점이 맞추어져 환하게 묘사되는 반면에 예수님은 정말 초라하게 묘사되고, 또 십자가에 달린 그림에서도 옆의 죄수가 오히려 예수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관점은 그 시대의 하나님에대한 이해, 흐름을 보여줍니다. 제가 왜 이렇게 그림을 통해 시대적 정황을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과학과 물질 문명의 진보에따라 삶이 빠르게 바뀌어 가는데, 중세 이후, 문명은 개몽의 시대를 거쳐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끊임없이 바뀌어 갑니다.

     저는 앞으로도 더 끝 없이 세분화하며 인간의 한계 끝 자락 가지 뻗어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5월에 동생애자들의 축제로 사회와 종교가 소란스러 웠는데, 미국의 어느 감리교 지역연회에서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목사를 면직 까지 했다고 합니다. 저는 인류의 진보적 발걸음이 이 보다 더 나아가리라 생각이 듭니다. 그런다고 해도 인간이 중세의 하나님 종교에 1천년 이상 구속 당해 온 것을 볼 때, 인간 스스로 하나님 떠난 자유를 맛 보기 시작한지는 시간적으로 얼마 되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하나님 없는 것처럼 추구하는 문명이 더 끝 없이 뻗어가지 않을 까 합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 종교, 과학 인류의 전 영역에서 이러한 하나님 없는 것처럼 세워져가는 문명의 바벨탑 끝이 어디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규격화되고, 고정화된 틀을 깨는 아픔이 끊임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 틀을 깨는 모습을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로 볼 것이 아니라 더 큰 틀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선과 악, 믿음과 불신, 거짓과 참, 그 모든 인간의 2원론 적인 잣대는 하나님의 그 선하심을 어림잡거나, 풀어낼 수가 없습니다. 선과 악을 품으시며, 선,악을 통해 이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것을 바란다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인데, 바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주 역사에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처럼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의 이유와 그 목적이 있어, 그 존귀함을 우주와 역사 속에 그 자리에서 피워낼 때, 그 존재 이유가 있으며 그러한 생명의 가치로 인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습니다. 그래서 유한한 우리는 서로와 서로에게 한계가 되지만 또한 존중해 주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유한함 그리고 한계, 벌거벗음의 연약함은 그 속에 숭고함과 존귀함과 아름다움과 선함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빛을 발하며 함께 우주와 역사 속에서 조화, 하모니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서로 나늬고 찢기는 아픔, 서로가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아픔, 오히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숭배하고, 그래서 스스로 피조물인데, 신적 대우를 받기도 하고, 굴복하기도 하는 하나님의 창조와 어긋나는 일을 조직적으로, 과학과 물질의 힘에 더하여, 거대한 국가적, 제국적인 힘을 만들어 하나님과 같아지려 합니다. 이러한 어긋난 고통과 아픔, 신음과 탄식 속에, 모든 피조물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러한 유한함의 선함과 아름다움이 망가지며, 굴복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르는 우주적, 역사적 조화를 위해 온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류가 그렇게 자유의 진보로 나아가며 아파하고, 힘들어하며, 파리의 테러, 세월호 참사, 물대포로 쓰러지는 정황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즉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를 바라며 지금 눈에 보이는 그 넘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의 가치고, 존재이유이며, 성도의 삶의 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기다림의 자리에 하나님 곁에 있는 것입니다.

     이 자녀들이 바로 얼마 전에 말씀드렸던 상속자입니다. 상속자는 그 고난과 아픔, 나늬고 찢기는 황폐해진 자리에 하나님과 함께 머물며. 그 너머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인 내가 하나인 하나님과 함게 온갖 피조물과 각자의 영광을 마치 경쟁이나 하듯이 우주적, 역사적 하모니를, 조화를 드러냅니다. 사도바울은 고전15장에서 그 영광에대해 새의 영광이 있고, 나무의 영광이 있고,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고 하면서, 각자 자기 존재의 존귀함에 따라 성령의 감동을 통해 하나님의 이 우주와 역사를 통해 주관하시는 섭리와 경륜을 따라 이루실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의 완성, 선함의 온전함을 기다립니다. 곧 하나님의 하나됨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 영광은 하나님의 견인을 통해, 이미 우리 피조물 속에 감추어 놓으신 하나님과 함께 나눌 영광을 결국 마지막 때에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많은 지구의 모든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픔, 고통들을 뛰어 넘는 하늘의 영광이 빛 같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 아픔과 고통을, 십자가와 황폐함 넘어를 하나님의 기다림으로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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