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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일상이 주는 행복(성령강림후열세번째주, 2015년8월23일)

하늘기차 | 2015.08.23 15:24 | 조회 1914


                   신앙의 일상이 주는 행복

성령강림후열세번째주                                                                                              시16:1-11

     지난 주 뉴스앤죠이라는 기독교인터넷 신문에서 발간한 <함께하는 도시교회2>에 저희 교회가 소개되었는데, 우리 교회를 ‘보일 듯 말 듯, 지역에 스며든 교회’라고 합니다. 저는 인터뷰를 할 때 우리 교회를 신앙생활에 있어서 특별히 무엇을 열심히 하지 않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실제로 그렇게 해 왔고, 지금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특별이라는 것, 특별새벽기도, 특별은사집회, 특별전도훈련 등의 특별이 아니라 일상이 소중하다는 생각에 늘 그렇게 해 왔습니다.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나누는 중요한 모임은 예배입니다. 주일 오전, 그리고 저녁, 수요일, 그리고 구역, 저의 신앙의 중심인 새벽기도, 그리고 일년에 두 번 사순절과 대강절에 드리는 일주일 연속 기도회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3번의 예배는 우리교회의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제가 이렇게 우리교회가 드리는 3 번의 예배와 새벽기도에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일상의 신앙생활이 너무도 중요한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저의 신앙은 이런 일상을 통해 지켜지고 세워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1절에

                         “하나님, 나를 지켜 주십시오. 내가 주님께로 피합니다.”라고 하며 2절에서는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 합니다. 오랜 기도와 일상적인 신앙 생활 속에서 하나님 한 분 만이 나를 도우시며, 나를 지켜주실 분이라는 내적 확신 속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마8:9에 보면 로마의 백부장이 자기 집 노예의 병을 고치려고 예수님을 찿아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라고 하면서 저희 집에 오실 필요 없이 ‘한 마디 말씀만 해 주십시오’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 한 로마 사람 백부장을 놀라워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자기의 병을 고치려 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사람 취급하지 않는 노예의 병을 고치기 위해 스스로 종의 모습을 취한 백부장에게 예수님은 놀란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아무에게도 이런 믿음을 본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이런 믿음이 없다고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믿음에 도전해 보고 싶지 않습니까?

     시편 기자의 오랜 신앙의 경륜 속에서 다다른 귀착점은 ‘하나님이 나의 주’이십니다. 2절 말씀은 무어라 말씀하고 있나요? 그래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단순 명료함으로부터 오는 행복입니다. 이 행복을 누리며, 맛 보아야 하는데, 행복 아닌 것을 행복이라 합니다. 참 주인에게서 멀리 있으니, 가짜 주인에게 헛된 행복을 구합니다. 그러니 구차해집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실 분이 누구인가요? 나를 지켜주며, 내가 정말 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피할 수 있는 분이 아닌가요? 개구리가 뱀이 들이닥치거나 하는 급박한 상황에 처하면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혼란스럽고, 판단의 기준이 서지 못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인데, 그 때 개구리가 물로 튀어야하는데 그래야 사는데, 개구리가 불로 뛰어듭니다. 어느 권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정말 어려울 때는 그동안 익히 갈고 닦아 온 익숙한 길로 갑니다. 성도들은 무엇에 익숙해 있어야 할까요? 3할 이상을 치는 야구선수의 비결은 하루 배팅연습을 쉬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이라 합니다. 어느 구질의 공이 오더라도 그 익숙해진 타격폼 안에 공이 들어옵니다. 축구의 골잡이도 항상 슛 연습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어느 상황, 어느 자리에서 볼을 받아도 정확히 골대 안에 공을 차 넣습니다. 반복되는 연습에서 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 찿지 말고 우리의 신앙의 일상 속에서 늘 주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을 단순 반복 고백하는 중에 나의 마음에 심지가 굳어지며 어려움 속에서도 나를 도우시는 분에게로 나아가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익숙하지 않으면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사람에게 갑니다. 하나님 보다는 사람에게 더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주님께 피합니다. 이 분은 주님께 익숙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할 줄 모르니 사람에게 찿아 가는 것입니다. 구차해집니다. 일상의 신앙에 익숙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저는 새벽기도가 좋습니다. 새벽에 알람시계를 이용해 잠에서 깨어나지만 혹 놓칠 경우 5시면 자동 눈이 떠질 정도 입니다. 물론 종종 빠지기도 하지만 저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 새벽에 기도하는 성도들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간절한 바램입니다. 그리고 드려지는 기도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힐 것을 생각하면 더 할 나위 없습니다. 새벽 아침 공기를 가르며, 모두 잠든 시간에 하루 일을 시작하기 전 먼저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기분은 좋습니다. 한 번 시작해 보세요. 일주일에 하루 만이라도 한 번 나와 보세요. 그대신 들쑥 날쑥 하지 말고 요일을 정해서 하루도 좋고, 약정한 날자에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라는 생각은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하며, 풍요롭게 합니다. 주님도 그렇게 새벽에 기도하였습니다. 아마 몸은 힘들지만 영은 새로울 것입니다.

     수요일 성경 강해는 지난 26년 동안 신구약 성경을 거의 다 보고, 또 돌아가는데, 이전의 자료와 지금 준비하는 자료들을 보면 넘 많은 차이가 납니다. 그렇게 전혀 다른 시각에서 지금 이사야서를 보고 있습니다. 한 번 수요일 예배에 참석해 보지 않겠습니까? 바쁜 일정 속에서, 아마 일주일 중에 가장 숨가쁜 하루 일텐데, 그 날 저녁 예배당으로 향하는 그 마음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마음이 아니겠나 십습니다. 마치 콩나물 시루에 물을 부으면 물은 시루 밑으로 빠져 나가지만, 스쳐 지나가는 물을 통해 콩나물이 자라듯이 말입니다. 해가 거듭되며 성경 한 권 한 권 씩 마치 음식물을 되새김질 하듯이 아주 천천히 성경의 전체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의 지식이 내 마음에 새겨져 삶의 지혜로 능력으로 드러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일상은 중요합니다. 모세가 그러했습니다. 모세는 그의 양치기의 일상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사야는 늘 상 다니던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신앙의 삶에 있어 제일로 중요한 것은 당연히 주일 예배입니다. 그런데 저녁예배를 더 해 보면 어떨까요? 주일을 오전 예배와 저녁 예배를 통해 온전히 지키는 것은 우리의 삶의 패턴을 다르게 할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변화를 우리의 삶 속에 드러나게 합니다. 오전에 드리는 예배와 저녁 해가 지고 모든 바쁨들이 멈추는 고요해진 시간에, 특히 우리 교회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 천해의 자연, 개구리 소리와 매미 소리 들으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영적 공간에서 저녁의 고요함을 맛보며 찬송과 기도와 말씀 안에 머무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지만 자기 안에 갖혀버리는 것은 사절입니다. 

     얼마전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라는 단편집을 읽었습니다. 대성당을 읽은 사람들 모두가 이 단편집에 낯설어하였습니다. 이게 뭐지, 무엇을 뜻하지, 주제가 뭐야? 이렇게 접근하면 꽝입니다. 예를들어 ‘칸막이 객실’이라는 단편에서 어느 아이의 아빠가 8년 동안 서로 헤어져 살던 아이의 편지를 받고, 아들을 만나러 기차 여행을 떠납니다. 헤어질 때, 아이의 멱살을 움켜잡고 숨통을 끊어주겠다는 욕질과 주먹질을 해 댔던 아이입니다. 이태리에서 프랑스로 향하는 기차 여행 중에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납니다. 화장실에 들른 그 잠깐 사이에 객실 외투 안에 두었던 시계가 없어진 것입니다. 혹시 하면서 열차 칸을 휘둘러 봅니다. 아무런 흔적이 없습니다. 입에서 욕이 나옵니다. 그런데 문득 내가 아이를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그 생각이 떠오른 것에 충격을 받고, 이렇게 독백합니다. “그 비열한 생각에 잠시 움찔했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살아오면서 수 많은 바보짓을 했지만, 그 여행은 그중에서도 가장 멍청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에게는 정말 오래전에 이미 자신의 애정을 거둬들이게 행동했던 그 아이를 만나고 싶은 욕망이 없다는 점이었다” 처음 아이를 만나러 갈 때의 설레임이 한 갓 시계 하나 잊어버린 것으로 인해 없던 일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한 마음입니다. 후에 어느 역에서 잠간 앞 쪽의 다른 칸을 들러보는 사이에 쿵 하는 흔들림이 있었고, 그리고 기차가 출발하면서 자기 자리로 돌아 갔는데, 자기 칸이 아닙니다. 알고 보니 이 전 역에서 열차 칸이 바뀐 겁니다. 가지고 온 가방, 옷 등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사람은 그 객차에 들어가 자괴감 속에 잠에 빠져드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그야말로 ‘칸막이 객실’에 스스로 고립되어 있는 모습인데, 배 아래에 깊이 잠든 요나, 아니 내 모습을 상상하게 합니다. 단편집의 이야기들이 전부 그렇습니다. 아주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들이어서 어느 주제 하나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무언가 주제를 찿으려고 하면 그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을 놓칩니다. 이전에 읽은 ‘잉고 슐체’의 ‘심플 라이프’라는 장편 소설도 역시 심플합니다. 일상 자체가 테마이고, 주제입니다. 통일 이후 달라진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심플하게 풀어냅니다. 그야말로 ‘심플 라이프’입니다. 이러한 소설의 동향 속에서 느끼고 공감했던 것은 우리의 삶이 그렇게 주제가 확연히 드러나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옷차림, 먹는 음식, 타고 다니는 차, 직장, 자녀들, 결혼 등등, 그것이 인생의 전부입니다. 그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 삶의 진정성, 긴장감, 갈등, 행복과 기쁨, 애뜻함 등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문학의 흐름이 이렇게 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3번의 예배, 새벽 기도, 구역 예배라는 고전적인 모임이 하찮게 보이고, 나 스스로도 교인들에게 자신없게 권면하던 생각을 떨쳐버리게 되었습니다. 문학의 현재 흐름이 그렇게 일상의 Reality를 중심으로 나아가는데, 그리고 우리 인생이 실제로 그렇게 큰 주제에 매여있지 않은 것을 보며, 일상적인 신앙생활이 참 중요한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시장경제체제는 이렇게 소중한 우리의 일상을 흔들어 놓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상의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저는 신앙의 위기를 느낍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참 행복한 삶을 추구하며, 참 기쁜 삶을 살고 있는가 라고 자문해 보면서, ‘칸막이 객실’에 홀로 고립되어 잠드는 무기력함에 빠져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아파트 한 체에 메이고, 되도 않는 자녀교육에 메이고, 작은 경제적 위로에 메여 오직 자신의 칸막이 객실 안에 홀로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일상이 저는 매우 거북스럽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기자는 어떻습니까? ‘칸막이 객실’에 홀로 고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3절에서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입니다.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한 번 옆의 성도님들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기쁨입니다. 다르게 풀어보면 열매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해 주며, 그 기도의 제목이 지금 바라보는 성도들에게서 응답되는 기쁨이 있습니다. 없습니까? 하~나도 없습니까? 도대체 무슨 일들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먼저 믿은 성도님들의 언어와 기도 속에 중보의 이야기들이 있어야, 뒤를 따라 오는 성도들도 그러한 기쁨에 익숙해지지 않겠습니까? 성도들이 기쁨인지 지금 확인해 보십시오. 함께 예배드리는 7-80명의 얼마 안되는 성도들 중에 위해서 중보기도 드리는 교우가 없나요? 1년, 3년, 5년이 지났는데도 성도의 영혼과 그 가정, 그 삶을 위해, 그 기도 제목을 놓고 눈물로 기도해 본 경험이 없나요? 기쁨이 아닙니다. 가짜 기쁨에 들 떠 있으면 안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번잡함에 마음 다 빼앗기면 안됩니다. 우선 귀한 분은 성도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좋은 생각, 밤 마다 교훈을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드릴 꺼리가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목회의 아이디어와 방향과 선택, 일상의 판단이 이렇게 새벽기도 하는 중에 떠오릅니다. 전혀 내 생각과 다른, 예상치 못한 생각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며, 하나님께 묵상 중에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물론 가짜 평화가 올 때도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도 중에 끊임없이 묻습니다. 그런데 그게 지나보면 맞거든요. 아닌 것 같아도, 그리고 아무런 비젼도 보이지 않지만 생각이 떠오르고 마음이 모아지고, 그렇게 나아갑니다. 좋은 생각을 나의 영적 샘에서 퍼 올려야 합니다. 맑고 시원한 맛 잇는 샘물은 깊은 산 속에 가야 맛 볼 수 있습니다. 교우여러분! 저자거리나, 산 아래에서 샘을 파지 말고, 저 높고 깊은 큰 산의 깊은 골짜기의 영적 샘에 나아 가서 좋은 생각과 교훈을 퍼 올리시기 바랍니다. 얄팍한 위로나, 감성에 호소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스스로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나쁜, 합당하지 않은 것에 익숙해지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반복적인 일상의 소박한 신앙의 훈련을 통해 깊은 맛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각과 교훈에 머물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인도해 준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만나였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었고, 바위를 쪼개는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였습니다.

     일주일 내내, 세상의 온갖 잡다한 정보와 소식과 통계들, 물질로 가득한 세속의 삶에 젖어 있다가, 주일 1시간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삶 속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자기 내적 확신이 있을까요? 눈도장 찍는 정도는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간곡히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세상 속에서 스스로 판단하며 결정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세상에 우리의 판단과 결정권을 내어주고 살아가지 않는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다른 여섯날의 삶처럼 일상이어야 합니다. 오늘 신자유주의의 시장경제체제 속에서 소외되고, 고통받으며, 고립되어가는 개인들의 삶 속에, 나도 역시 무기력감에 젖어가는 상황 속에서 함께 하나님의 깊은 자리로 나아가는 정체성과 방향성을 찿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고, 그것의 시작이 교회가 이끄는 단순 반복의 신앙의 일상에 그 단초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저의 소박한 생각이며, 이러한 단순한 일상의 신앙이 왜 끊어지고 있는지, , , 지난 25년 동안 그렇게 함께 해 왔는데, 지금은 왜 그렇지 않은지? 스스로 자문을 합니다. 일상의 신앙이 참 신앙입니다. 그렇게 주님 안에 머물 때 온갖 세속적인 것 들 속에서도 좋은 생각과 교훈이 나를 인도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며, 오른 쪽에 계시니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칸막이 객실의 아기 아빠가 시계 하나 잊어버린 것으로 아들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흔들려 버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데, 우리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나의 주인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내적 확신입니다.

     9절은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행복은 기쁨입니다. 어떤 조건이나 가지고 있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11절에서 반복해서 말씀해 주듯이 주님을 모시며, 함께하는 삶에서 오는 기쁨이 넘칩니다. 이 즐거움이 영원하다고 합니다. 이 영원함은 어디에서 올까요? 1주일 7일을 살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앙의 일상을 회복해야하지 않겠나 하는 저의 소박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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