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성령강림후열번째주, 2015년8월2일)

하늘기차 | 2015.08.02 16:29 | 조회 1908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
성령강림후열번째주                                                                                                        빌3:7-14

    최근 미국 명문대에서 자살이 늘어나고 있는데, 캠퍼스내의 정신건강을 검증해 보니 생명을 위협하는 문화가 있다고 합니다. 펜실베니니아대 같은 경우는 '펜 페이스' 라고 해서 슬프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행복을 가장하고 자기 확신에 찬 것 처럼 보이려는 행태를 묘사하는 용어로, 학생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듀크대 보고서 역시 여학생들이 영리하고, 성공적이고, 멋지고, 아름답게 '타고난 완벽함'에 대한 압박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정신적 상태를 ‘오리 증후군’이라하여 겉으로는 우아하지만 물 밑에서 두 발로 그렇게 우아하게 떠 있기 위해 열심히 물질을 하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성향에는 자신을 외부에 화려하게 치장해 보이려는 소셜미디어의 영향도 일조를 했습니다. 보통 페이스북은 자신의 최고의 것을 올리니까요? 그래서 '다른 학생들은 모두 행복해 보인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며, 그래서 학생들이 '나는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함께하는 친구들과 자기를 비교하며 스스로를 비하하고 우울증에 빠지고, 그렇게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립니다.

   근데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김진호 목사는 어는 종교포럼 발제에서 우리 사회를 ‘성형사회’로 설명을 하면서, 단지 개개인의 선택적인 욕구나 실천을 넘어서 거의 ‘신드롬’이라고 할 만큼 ‘과도한 집단성’을 지니고 있으며, 몸을 ‘특정한 방향으로’ 변형시키는 행위가 더 유리하다는 합리적/계산적 판단을 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니 성형 자체가 이미 사회적 욕망이 되어버려, 끊임없이 현재 자신의 몸에 대한 불만족에 사로잡혀 ‘더 나은’ 몸을 갖기 위한 어떤 행위들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스팩을 쌓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 모든 것을 상품화합니다. 상품의 마지막은 포장입니다. 자본은 그렇게 궁극적으로 사람도 상품화 해 버린지 오래입니다. 소모품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사도 바울은 빌3:3 말씀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
        을 의지하지 않는 우리들이야말로,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 마음을 비워 주님의 영으로 충만해야 하는데,  ‘살을 잘라내는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겉 모습을 중시하는 신드롬이 바울 사도 당시 교회에도 곳곳에 퍼져있었습니다. 교회는 여전히 마이너 였고, 유대인들이 대세였습니다. 유대적, 율법을 바탕으로 하는, 특히 그래서 할례를 받아야한다는 주장에 사도 바울은 무척 힘겨워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의로 신앙을 판가름하는 외적 신앙은 오늘 성형 사회, 오리증후군의 사회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러한 스팩과, 좋은 차와, 좋은 몸매와 좋은 직장, 좋은 대학을 나와야 인정을 해 주는 세속적인 흐름 속에서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은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잘 말해줍니다. 간혹 길을 가다 보면 얼굴을 마스크로 뒤집어 쓴 여자들을 종종 봅니다. 얼굴 타지말라고, 미백의 얼굴을 유지하려고 그렇니다. 그 마스크가 원래는 햇볓 알레르기가 있는 환자들을 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제는 너두 나두, 할머니들도 그렇게 뒤집어 쓰고 다닙니다. 저는 그렇게 쓰고 길을 다니는 것이 이상해 보입니다. 우리사회의 심리구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행태인 것 같습니다. 몇 일 전에 집사람과 마켓을 다녀왔는데, 뒤에서 영어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 보니 외국인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의아해 하면서도 돌아서는데 또 들려옵니다. 그래서 찬찬히 돌아보니 동양인 가족 3인 것 같은데, 딸 2을 데리고 장을 보러 온 엄마가 40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데, 아마도 재미동포가 아닌가 싶고, 참 신선했던 것은 화장하지 않은 잘 익은 듯한 황색 얼굴의 그 에너지 넘치는 건강미에, 경쾌한 표정, 우리나라 사람들의 표정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러면서 왜 우리는 이렇게 어깨가 쳐져있고, 모두들 피로해 할까, 그리고 왜 모두들 하얗게 칠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핏 보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보면 느낌이 있잖아요. 그 모녀에게서 자본의 냄새가 아니라 사람 냄새가 향기롭게 맡아졌습니다. 패기 발랄, 생동감이 넘치는 겁니다.
 
   시인이기도 하며, 단국대 교수 오민석님은 국가 단위의 부(富)는 소위 ‘선진국’ 수준이라지만 개인 단위로 볼 때 사는 일이 녹록지 않다고 하면서, 현재 50대 중후반의 친구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우연’과 ‘요행’에 모든 것을 걸고 산다고 합니다. 퇴직을 앞두고 20년, 아니 40년을 더 소비하며 살아야 하니, 이 것 저 것 동네에서 퇴직금 털어 닥치는대로 해 보다가 퇴직금 거덜내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 하며 ‘불안 사회’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조지 엘리엇의 소설『플로스 강변의 물방앗간』의 앞부분을 인용합니다. 주인공 매기의 어머니가 ‘다른 집 애들처럼’ 자기 딸의 헤어스타일을 고집하는데, 그것은 다른 집 애들처럼 살아야 ‘안전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오교수는 불안사회를 주도하는 대표적 정서는 남들처럼 사는 것이며, 불안을 조장하는 사회는 수많은 ‘자동인형’ 즉, 주체적·비판적인 사유를 포기한 ‘일차원적 인간’을 양산해 낸다고 안타까워 합니다. 자기 먹을 것 만 봅니다. 주변에 누가 아프고,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하는지 돌아볼 여력이 없습니다. 공의와 정의로움에대해 돌아 볼 에너지가 없습니다. 이 전에는 분노할 줄 알았는데, 그냥 휙 하고 지나가 버립니다. 자기 생각이 없으니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고, 남들이 사는 방식을 서둘러 쫓아갑니다. 그러니 속된 말로 ‘가랑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국가단위의 부가 늘어나면서 소비지수가 엄청 높아집니다. 자가용이 가정에 두 대는 있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외식을 하고, 가끔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신발, 옷은 유명브랜드여야 합니다. 남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꼴 불견은 동네 산, 예를 든다면 광교산을 가는데, 100이면 100 소위 아웃도어에 스틱에, 배낭에, 트래킹화에 등등,,,사람이 산에 가는 것인지, 등산장비가 산에 가는 것인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동네 광교산 가는데 그 차림세가 히말라야 트래킹하는 수준입니다. 요즈음 다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비시대를 살고 있는데, 그것이 패턴화 하고, 정형화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배후에 산업과 자본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식의 소비를 하지 않으면 이 시스템은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오교수 이야기는 그러한 시스템이 자동 인형을 양산해 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들 그렇게 정형화 획일화 되어갑니다. 그러니 출혈을 해서라도 자녀의 사교육비를 대야합니다. 그런데 확률적으로 소위 출세는 인구대비 10%입니다. 산업과 자본과 오리증후군의 사회에서는 나머지 90%는 루저가 됩니다. 거기에 끼어들지 못하면 실패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죽어라 열심히 해도 90%는 실패자입니다. 그렇다고 10%에 든다고 해도 건강하거나 행복해 할지 모르겠습니다. T.V에서는 재벌의 성공, 재벌의 연애재벌의 가정사에대한 드라마가 끊임없이 돌아갑니다.

   그러면서 이 분은 못된 생각을 해 본다고 하면서 ‘다른 집 애들처럼’살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려면 가치전복이 필요하고, 명문대, 대기업에 못들어가 연봉이 얼마다라는 것 없어도 기꺼운 삶을 살아보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전봇대 변전소 철망에 우연히 갖힌 새가 그 자그마한 철망 구멍으로 빠져나오려고 한 시간 이상을 몸부림을 치다가 위가 열려 있다는 생각을 미쳐 못하다가, 간신히 윗 쪽으로 날아가 벗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하면서‘다른 집 애들처럼’ 세상을 보면 철조망 구멍밖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다른 길과 다른 가치와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며, 자동인형이 아니라 다양성을 앞세운 창조적 개체들이 넘칠 때 시스템은 반성의 계기를 갖게 될 것이며, 획일성을 거부하는 것, 그것이 존엄한 인간이 할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에서 그렇게 간절히 구하는 다른 가치, 다른 세상에대한 상상력을 봅니다. 6절에서 사도 바울은 열성으로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열성’은 그냥 열심히 아닙니다. 생명을 거는 열심입니다. 당시 열심당원들이 그러했습니다. 로마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자유를 위해 하나님의 열심을 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순결을 해치는 자들이라 생각하여 교회를 핍박한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으로는 흠잡을 대가 없었고, 베냐민지파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거기다 로마 시민권 까지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교의 체제 속에서 체제의 중심을 이끌어 가며, 자랑스럽게 살아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모든 자신의 스팩을 버립니다.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신학자들 중에 유일하게 세계적인 신학자들과 어깨를 겨누는 김세윤 박사는 8절에서 오물로 여겼다는 말을 ‘똥’으로 여겼다고 적나라하게 표현을 합니다. 바울은 율법으로 흠잡을데가 없는 1%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왜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고, 스스로 닦아 키운 모든 것을 똥으로 여겼을까요? 오늘로 치면 학위와 권력과 부와 그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말이 있는데,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다고 합니다. ‘개천에서 용이 많이 나야 된다’라는 책의 저자 강준만 교수는 모두가 용이 될 수 없는 현실에서 용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감내하는지 또한 용이 되지 못한 실패로 좌절과 패배를 맛보고 있는지에 대해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꼬집으면서, 더구나 ‘개천에서 난 용’들이 개천을 살피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고 개탄합니다. 그러면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이 아니라, 용이 개천으로 가면 안될까요? 성경의 이야기는 자세히 찬찬히 보면 위로 향하기 보다는 내려옵니다. 찿아 오십니다. 함께하십니다. 낮아지십니다. 비웁니다. 우리가 힘들게 찿아가는 것이 아니라, 늘 곁에 계셔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구원입니다.

   그 유명한 빌2:5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내려오는 모습입니다. 어떤 마음인가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동등함을 당연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자기를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고, 사람과 같이 되셨다고 합니다. 바울이 본 하나님이십니다.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죽기 까지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개천에 오셔서 하신 일은 여기 까지입니다. 그리고 높이시고, 이름을 뛰어나게 하시고, 땅 위와 땅 아래 모든 것들을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가 그리스도이다, 예수가 주인이라고 고백하게 까지 하신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까지는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서 하신 주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스스로 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바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늘 경배하며 속죄의 제사를 드리며, 찬양하며 율법을 지켜 의를 세우며 스스로의 거룩함을 드러내며 즐거워하던 모든 것을 내려 놓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은 어떤 의로움인가요? 사도 바울은 9절에서 그 의로움을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납니다. 바울이 그 하나님의 의로움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본 것입니다. 그래서 10,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
        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3절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으로 할례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참 할례받은 사람은 영으로 예배하는 자입니다. 어떻게 영으로 예배할까요? 방금 읽었듯이 알고, 깨닫고, 동참하여, 본받는 과정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풀어보면 그리스도를 알며 했는데 어떻게 알까요? 고난에 동참하며 라고 합니다. 주님을 아는 유일한 길입니다. 십자가의 고난 속에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 불쌍히 여김, 순종, 온유함이,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참 평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롬6:4에서 이야기하였듯이 그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공로이며, 감사이며, 참 할례를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겉모습을 쫓는 자기 의로움에 묶여있던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로움으로 불러주신 은혜를 따라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버렸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성도들도 기존 물질우상으로 가득찬 시대에 자본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자본에 매이지 않는 삶을 어떻게 살아낼까 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의 가치요, 비죤이라 할 수 있습니다. 7월31일, 8월1일 교회에서 제1회 모깃불 영화제를 열었습니다. 왜 교회는 이런 영화제를 열었을까요?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영화도 거대 자본에 종속되어 늘 상업적인 영화들만 기존의 영화 유통을 통해 사람들에게 소개가 되는데, 자본에 매이지 않는 순수한 영상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아름답고 좋은 영화들이 매 년 사장되어 가는데, 바로 그러한 영화들을 발굴하여 보며, 즐기며 나누는 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가치, 새로운 꿈을 향한 몸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교회는 ‘밤토실’이다, ‘그냥..가게’다, 또 처음자리 생태교실이며, 목공방을 운영하고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자본에 매이지 않는 공간이 있다면, 유일하게 도서관이라고 단언합니다. 유네스코 공공 도서관 선언에 보면
      “공공 도서관의 서비스는 나이, 인종, 성, 종교, 국적, 언어, 신분 등에
      관계없이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제공된다. 일반적인 서비스
      와 자료를 이용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맞춤 서비스와 자료가
      제공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 중에는 소수 언어 사용자, 신체가 불편
      한 사람, 또는 병원이나 감옥에 있는 사람 등이 포함된다.”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본에 매이지 않게 모두에게 서비스가 이루어집니다. 아마도 지구촌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본에 자유로운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냥. .가게’를 통해서도 돈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어지는 5병2어의 꿈을 꾸어봅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물질 우상에 자유롭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열심히 교회의 프로그램을 따른다고 자유로워 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난 국무총리 청문회에서 두 명의 독실한 기독인이 어떻게 자본에 종속되아 살아가면서, 여전히 지도자연 하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개인적인 신앙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그리고 문화, 산업, 마을, 교육 등 종교에 이르기 까지 모든 분야에서  모두 자본에 종속되어 가는데, 자기 혼자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왜 바울은 당시 자신의 기득권을 다 내려 놓았는지? 오늘 이 시대에 기득권을 내려놓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교회는 사회를, 아니면 국가를 변혁시키는 것이 아니라, 물질로 가득한 세상 속에 어떻게 물질이 주인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참 이 세상과 나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며 물질의 힘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애통함에 함께하며, 새로운 가치, 새로운 생명의 비죤을 살아내며,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가만히 자기 신앙에 머물러 있으면, 세상은 점점 더 우리를 구속할 것입니다. 참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공공의 신아고백을 통해 드러내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생명의 축제, 5병2어의 풍요로운 나눔의 잔치가 교회 공동체를 통해 끊임없이 창출되어야할 것입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22/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600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936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315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906 2005.09.02 16:30
555 이 사람이 누구냐?(대강절첫번째주, 2015년11월29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25 2015.11.29 14:32
554 슬기로운 다섯 처녀(성령강림후스물여섯번째주, 2015년11월22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79 2015.11.22 15:08
553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며 (성령강림후스물다섯번째주, 2014년11월15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853 2015.11.15 15:48
552 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 (성령강림후 스물네번째주, 2015.11.8.) 사진 첨부파일 사무엘 1751 2015.11.09 18:38
551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성령강림후스물세번째주,2013년 11월1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72 2015.11.01 14:03
550 희년을 바라보며 감사(2015년10월25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706 2015.10.25 09:24
549 “낫고 싶으냐?”(성령강림후스무한번째주, 2015년10월 18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661 2015.10.18 11:15
548 지붕을 뚫고(성령강림후스무번째주, 2015년10월11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35 2015.10.11 14:38
547 먼저 구해야 할 일(성령강림후열아홉번째주, 2015년10월4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646 2015.10.04 15:33
546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립니다.(성령강림후열여덟번째주, 시25:1-22)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04 2015.09.27 10:26
545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 (성령강림후열일곱번째주, 2015년9월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670 2015.09.20 16:13
544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성령강림후열여섯번째주, 2015년9월13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69 2015.09.15 09:20
543 자녀이면 상속자입니다(성령강림후열다섯번째주,2015년9월6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762 2015.09.06 15:37
542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성령강림후열네번째주, 2013년8월30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860 2015.08.30 15:50
541 신앙의 일상이 주는 행복(성령강림후열세번째주, 2015년8월23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15 2015.08.23 15:24
540 구원의 은혜 감사하는 삶(성령강림후열두번째주, 2015년8월16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12 2015.08.16 15:01
539 은혜를 기억하라(해방70주년감사예배, 2015년8월9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73 2015.08.09 13:43
>>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성령강림후열번째주, 2015년8월2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09 2015.08.02 16:29
537 빛과 소금(성령강림후아홉번째주, 2015년7월25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774 2015.07.26 16:10
536 그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성령강림후여덟번째주, 2015년7월19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00 2015.07.19 1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