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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성령강림후아홉번째주, 2015년7월25일)

하늘기차 | 2015.07.26 16:10 | 조회 1774



                                                                      빛과 소금
성령강림후아홉번째주                                                                                       마5:13-16;엡5:8-14

   오늘 말씀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에게 ‘너희’라고 합니다. 두 번째 주에 ‘너희’가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한 말 기억이 나는지요? 마28장 마지막 절인 20절에서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거짓과 참, 정의와 불의, 선과 악, 참 신앙과 거짓 신앙, 사랑과 미움 등, 모든 가치가 뒤 섞여버린 혼돈의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그 죽음,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십자가에 연합하는 죽음을 죽어야 ‘너희’가 ‘우리’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너희’가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 맞지 않습니다. ‘너희’는 벌써 이미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너희를 소금이다, 빛이다’ 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소금은 소금인데, 세상의 소금이라 하였습니다. 세상에대하여, 세상 속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말해줍니다. 소금은 소금 자체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소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의 소금이라 합니다. 소금은 부패하지 않게 합니다. 소금은 순결합니다. 또한 음식을 요리할 때 맛을 내는 근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설탕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소금 보다는 설탕을 좋아합니다. 달짝지근하니까요? 우리에게 쾌락을 줍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소금은 있는 듯, 없는 듯 사용이 됩니다. 있으면 모르지만, 없으면 치명적입니다. 물과 공기와도 흡사합니다. 그러나 설탕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쉬울 정도입니다. 소금은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적당량으로도 그 음식을, 그리고 내 몸을 건강하게 유지시켜 줍니다. 기독인들이란 바로 그러한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에 갈릴리 호수 아래 요단강을 따라 내려가면 사해가 있습니다. 죽은 바다입니다. 소금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일반 바다 보다 7~8배나 소금 량이 많아 외형은 소금이지만, 독성이 있어, 소금 고유의 기능을 상실하여 생물이 살 수 없는 바다가 되어버렸습니다. 많으면 좋을 것 같은데, 오히려 그 기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해 바닷물을 혹 마시면 호흡곤란, 심장발작이 올 수 있어 사해에 몸 담그는 사람들에대한 관리가 철저하게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사해의 소금은 피부 미용에는 좋다고 합니다. 소금은 본래 피부 미용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부패를 방지하는데, 사해 같은 경우는 너무 소금의 농도가 진하여, 그 자체 기능을 잃어버려 생명이 살 수 없는 바다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난 번 이완구 전 국무총리께서 역사관에대한 문제가 있음에도 청문회를 잘 피해 총리가 되었다가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해서, 그리고 비타 500 상자로 결국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또 이 번에 새로 총리가 된 황교안 총리는 군복무와 전관예우 등으로 시끄러웠습니다. 문제는 한 분은 장로이고, 한 분은 교회학교 전도사로 교회에 헌신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스스로에 대해 자기 합리화를 하며, 소위 기득권층의 사람들이 해 오는 모든 편법들을 그대로 답습하며 살아가는데, 문제는 이 분들이 기독인, 더구나 독실한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의 강단에 서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사해바다가 된 것 같습니다. 너무 많아 아이러니하게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교회가 무언가 잘 못 가르치고 있으며, 잘 못된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 말 잘 듣고, 헌금, 기도 많이해서, 교회 출석, 전도, 등 교회가 행하는 모든 프로그램을 열심히 추종하면 신앙이 깊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체성에 신앙의 윤리는 없습니다. 개인이 치부하고, 명예와 권력을 얻는 것을 복이 있다고 하니, 그 과정 속에 역사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 기준은 실종되어 버려, 이상한 괴물들을 양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황총리가 취임하며 내 놓은 첫 정책이 부정부패 일소와 개혁입니다. 그러니 이 어찌 웃을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자정 기능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문제는 스스로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인데, 부끄럽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다는 것인데, 이것 참 어찌 이럴 수가 있나 십습니다. 사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해가 정화될까요?

   얼마 전에는 코메디언 서세원이 전광석 목사와 국부 이승만이라는 영화를 찍어, 당시 힛트했던 변호인이라는 영화를 뛰어넘는 관객을 동원하겠다고 하며 흥분해 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분이 어디서 신학을 했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교회라고 하며 개척을 했는데, T.V에 나오는 예배당의 모습을 보면 곱게 인테리어를 했는데, 마치 사당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사유화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사사기18장에 보면 에브라임 지파에 미가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4절 말씀에 그 집에 레위지파 청년이 찿아 오자 자기의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제사장을 자기 맘대로 세웁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만큼 당시 벌써 하나님 신앙이 우상화 되어버린 것입니다. 즉 사유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 때 단 지파가 아직도 가나안 땅에 정착을 못하여 용사 5을 점령할 땅으로 파송하여 마침 미가의 집에 이르자, 그들이 미가의 집에 거하는 청년의 말투가 레위 사람 말투인 것을 알고, 5절에서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성공할 수 있는지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평안이 가라 하며, 주님께서 그 길을 인도해 주시리라고 합니다. 오늘 이 시대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사유화 해 버린 시대가 되어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 생각을 하나님 이름을 걸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소금이 너무 많아 사해가 되어버렸습니다.

   마5장에서 7장에 이르는 산 위에서 들려주신 말씀인 산상수훈의 제일 처음에 나오는 말씀이 8복입니다. 이 8복의 탁월함은 이미 그 삶 자체를 복이 있다고 선언을 하는데 있습니다. 그것도 통상적인 복이나, 행복이 아닙니다. 그 반대의 삶에대해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세상나라가 아닌 하나님나라의 Magna Charta, 대장정입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들일까요? 마음이 가난하며, 애통하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비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요, 평화를 이루며, 그로인해 의를 인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복을 선언하고 나서 첫 번째 말씀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소금이요, 빛이라고 합니다. ‘소금이 되라’가 아니라 이미 소금입니다. 8복의 말씀의 구조를 볼 때, 애통하는자, 마음이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는 선언은 그대로 ‘너희는 소금이다’하고 구조가 맞습니다. 너희는 복을 받으라가 아니라, 이미 복이 있습니다. 소금이 되라가 아니라, 이미 소금입니다. 늘 우리는 죄인이고, 이기적이고, 무기력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미 복 있는 자요, 소금과 빛으로 존재한다는 예상치 못한 선언입니다.

   애통하는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애통하는자가 소금이고, 빛입니다. 오늘 누가 애통해 하고 있나요? 누구의 마음이 가난하여 길거리로, 공중으로 올라가서 의에 목말라 도와달라고 부르짖고 있나요? 이분들이야말로 치열하게 빛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복있는 사람들이 아닌지요? 그런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이것은 세상나라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이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툼레드’(TOMB RED)라는 다큐영화를 보았습니다. 소위 보도연맹과 관련된 6.25전쟁 전 후에 전국적으로 자행된 살해 사건에대한 다큐였습니다. 수 십 만이 죽음을 당하였는데, 그래서 대한민국의 킬링필드라고 별칭이 붙기도 한 사건이지만, 그 충격이 너무 커서 지금 까지도 쉬쉬하는, 그러나 언젠가는 드러내야할 우리 민족의 아픔이요, 부끄러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감독과 대화하는 시간에, 사회자가 왜 이 영화를 만들었냐고 하자, 두 할머니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실제 영화 속에 두 할머니가 나오는데, 한 할머니는 이승만을 ‘개승만’이라 하며 마음의 한을 드러낸 할머니이고, 다른 할머니는 곡을 하며, 매립 현장에 찿아가 극락왕생하라 하며 울부짖는 모습이었습니다. 두 할머니 모두 꽃 다운 나이에 남편을 아무 이유없이 잃어버렸습니다. 그 처형장의 유골의 모습을 보면 그 잔인함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합니다. 그런데 감독은 바로 그 두분의 할머니 때문에 이 영화를 10년에 걸쳐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특별히 영화적인 감동은 없습니다. 그냥 FACT를 그대로 잔잔하게 보여주는 형국입니다.

   그러니까 그 두 분 할머니 때문에 70여년 동안 쉬쉬하며, 감추어 두었던 그 참담한 사실이 드러난 것은 두 할머니의 애통함입니다. 팔복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주님의 복 선언이 그 할머니에게 갑니다. 두 분 할머니가 아니었으면, 이 다큐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보도연맹과 관련한 치욕과 부끄러움이 빛으로 드러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 중에 감독이 인터뷰를 하는데, 여전히 쉬쉬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하는데, 그 중에 할머니 한 분이, 두려워서 말 못하겠다고 합니다. 아직도 남과 북이 갈리워 있는데, 언제 또 똑같은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말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무섭다는 것입니다. 영화 관람을 마치고 집에오는데, 두렵다는 생각이 얼핏 스치고 지나갑니다. 왜 두려운 것인가? 왜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인가? 누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죽음이구나, 죽음의 힘, 죽음의 권세, 사탄이 사람들을 온갖 술수와, 거짓과 미혹으로 우리를 두렵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인터뷰 할 때는 두렵다며 조심스러워하였지만, 매몰 현장에 가서 죽은이를 위해 애통해 할 때는 그 아픔을 감추지 못하고 꺼이 꺼이 하며 통곡을 합니다. 빛이 왜 빛인가요? 빛은 감출수가 없읍니다. 어두움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두 분 할머니의 애통함이 선하고, 의롭고, 진실된 빛으로 드러나 감독에게 비추이고, 그 빛이 감독의 마음을 밝혀 이 죽임을 세상에 드러내야하겠다는 감동을 주었고, 그래서 10년 이라는 세월을 거쳐 다시 우리 관객에게 비추어진 것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어두움을, 두려움의 허구를 마치 구름을 뚫고 나오는 햇살처럼 빛으로 드러납니다. 그 빛은 우리의 두려움을 사라지게 합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어두움은 허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두려워 하게 합니다. 그래야 세상은 자기 영광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롬8:15-17에서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
        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
        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주님의 영이 우리를 자녀로 살게하십니다. 종노릇하면 항상 두렵습니다. 무어 잘못했나 하며 눈치를 봅니다. 그러나 자녀는 아버지와 하나입니다. 오늘 말씀 엡5:8은 ‘전에는 어두움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스스로 빛인데도 빛으로 살지 못하는 우리에게 주님이 찿아오십니다. 빌2:13은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의 두려움, 죽음의 힘,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권세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움직이게 합니다. 빛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바로 9절 말씀의 빛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선과 의와 진실입니다. 두 할머니의 애통함이 선과 의와 진실의 열매를 맺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10절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닌 것은 아니고, 예는 예라고 해야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거짓과 뻔뻔함에대해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빛이고, 소금입니다. 그들이 몰래 하는 일들은 말하기 조차 부끄럽다고 합니다. 그런데 13절 말씀입니다. 그 숨겨버린 부끄러운 일들을 빛이 폭로합니다. 애통함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 백성의 복이요, 기쁨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그러니 잠에서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죽은 심령에서, 껍데기 자아에 묶인 삶의 반복되는 무기력, 종교적 관행 속에서 이제는 그만 주님이 인정하는 믿음의 사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주께서 환히 비추어 주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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