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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성령강림후여덟번째주, 2015년7월19일)

하늘기차 | 2015.07.19 15:52 | 조회 1898



                                      그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
성령강림후여덟번째주                                                                                 요6:1-15;행2:41,42-47

    5병2어로 5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나 남은 기적의 이야기입니다. 보리떡과 물고기는 당시의 갈릴리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먹거리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주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푸른 풀밭에 앉게 하십니다. 시편23편 처럼 목자이신 예수님이 양들을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사람들은 모처럼 갈릴리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잔디밭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병을 고침받고 하면서 푸른 초장의 양처럼 평화로운 시간을 즐깁니다. 바다로부터 언덕 능선을 타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런데 이제 소풍을 접어야할 시강이 된 것 같은데 떠날 줄을 모릅니다. 제자들은 초조해 합니다. 자기들도 이제 좀 쉬어야하고, 그리고 이 사람들이 알아서 떠나가지 않으면 무엇 보다 먹을 거리가 걱정입니다. 예수님과 자신들 정도는 어떻게 끼니를 해결해 볼 수 있음직도 한데, 여기 모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마을로 내려 보내 각 자 음식을 사 먹게 하자고 하고, 또 200데나리온이 있어도 다 먹을 수가 없을 것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공관복음에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말씀이십니다. 마침 안드레가 보리떡5개와 물고기2마리가 있는데,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그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을 풀밭에 앉게 하신 다음에, 마가복음에는 50명씩 무리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 떡을 받아 감사기도를 드리고 나누어 주었습니다. 제자들에게, 그리고 다시 무리들에게, 그렇게 모두가 배불리 먹고 12광주리가 남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합리적인 해석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온 도시락을 그 때부터 나누었다고 합니다. 또 한 쪽에서는 빵이 불어난 기적에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빵이 어떻게 불어났는지 이야기 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이 5병2어의 기적의 핵심은 예수님이 그 모임 안에서 드려진 5병2어를 그대로 받아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리는 모습 속에서 주님이 어떻게 자기들을 품어서 사랑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하는지를 그들이 본 것입니다.

   아마 그 당시 먹을 것이 귀하였을 것입니다. 끼니를 굶는 것이 일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끼니를 굶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놀랍니다. 어느 시나리오 작가가 정말 먹을 것이 없어 자살을 한 사건이 기억납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중요합니다. 직장을 다니며 임금을 받아, 의식주 중에 먹거리를 장만합니다. 그렇게 하루 3끼를 이어갑니다. 대형할인 마트나 또는 요즈음은 요염되지 않은 신선한 먹거리를 얻기 위해 유기농 매장을 애용합니다. 장을 보고나면 승용차로 그 부식과 주식, 또는 간식거리를 옮겨옵니다. 대형할인 마트의 에스컬레이터와 계산대 앞에 줄 서 있는 이미 자본의 줄서기에 익숙해 있는 경제시스템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전혀 다른 루트를 통해 5천명이 먹고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여 결혼축제를 벌일 때도 돈으로 포도주를 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포도주가 떨어져 잔치가 식어가는 그 곳에 계셨고, 그리고 말씀을 받아 그대로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날 벳세다 들녘 갈리리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는 이 전의 병을 고치는 기적과는 또 다른 생명의 축제,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벌어진 것입니다. 이 빵의 이야기는 요한 복음에서 계속 이어지며 성찬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제자들은 이 놀라운 신선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 번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시면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자, 우리가 빵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은 예수님이 아시나 하며 중얼대자, 아직도 빵 만 생각하느냐고 하면서 깨닫지 못하는 무딘 마음을 안타까워 합니다.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적 빵인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셔야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시면서, 생명의 은혜가 강 같이 주님으로부터 흘러 넘칠 것을 이야기하지만 못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빵 이야기가 사도행전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 사도행전 말씀 41절을 보면 그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고, 그 날 신도의 수가 약 삼천 명이나 늘었다고 합니다. 그 시작은 어디에서 부터인가 하면 말을 듣는데서 부터입니다. 어떤 말을 들었는가 하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22절에서 하나님께서 기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으로 증명해 보이셨지만, 유대인들이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밖았다고 합니다. 역설입니다. 예수는 율법과 로마의 법을 어겨 십자가에 처형당하였습니다. 세상은 예수를 무법자라고 하지만, 베드로는 오히려 법집행자들을 무법자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세상나라 속에 항상 역설입니다. 지난주에 성도들의 삶은 가치‘0’의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물질가치 하나 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가치를 거부하고, 벗어나서 역설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기독인들입니다. 5병2어의 기적도 바로 그 역설입니다. 이러한 역설의 삶이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될까요? 오늘 말씀에 보니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로 사귀고, 빵을 떼며, 기도에 힘썼다고 합니다. 역설의 삶의 힘은 여기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5병2어의 기적은 제자들처럼 빵을 먹고 배부른 물질의 풍요로 바라보는 가, 아니면 요한복음에서처럼 생명의 빵, 나눔의 빵, 하늘양식으로 보는 가는 우리들 교회의 몫입니다.

    초대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유대교와 로마의 세속가치의 폭력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아끼며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나누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었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벳세다 들녘 갈리리호숫가 언덕에서 함께 떡을 떼던 기억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새로운 언어, 새로운 듣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새로운 언어, 방언에대해 관심을 기울입니다. 신령한 언어입니다. 우리 교회 홈피에 방언에 관련하여서 지난 5월 4번째 주에 광양중앙교회 엄인영 목사님의 말씀이 좋아 올려놓았습니다. 제목은 ‘성령이 오셨습니다’입니다. 꼭 들어가 한 번씩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방언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강권적으로 주신 외국어였습니다. 어떤 이상한 소리나,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당시 유월절에 세계에서 모인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각처의 언어로 제자들의 혀를 주관하여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성이나, 합리적 언어체계가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여 개념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내 의지와 사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을 한 것입니다. 근데 사람들은 그 말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그 외양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처럼 빵 만 생각하지 그 빵의 신비로운 나눔의 의미는 모릅니다. 방언은 동어반복하거나, 이상한 소리를 반복해서 내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은 말입니다. 어떤 말인가 하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으며 언어가 불통하였는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인류 구원의 희망의 말씀을 방언현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단절을 소통으로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방언의 핵심은 소통이고, 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느 교단에서는 방언을 하지 못하면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든지, 이 번에 산 기도에서 방언받기로 작정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사도행전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빵 만 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광기의 집단주의에 빠졌던 고린도교회에 못 알아듣는 방언으로 기도하지 말고 오히려 예언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초대교회의 방언이 이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 20여년 전입니다. 물론 저는 방언을 나의 혀로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말씀하는 방언, 즉 말, 선포를 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교회 옆에 지금은 없어졌지만 청개천 굴다리 마지막 재건대, 그러니까 노숙자들이라 할 수 있는 넝마주의 사람들을 모아 함께 살려고 공동체를 세우는 첫 날 개소예배 때, 설교가 끝나고, 알리는 말씀을 하기 전인지 후인지, 한 서울신대 신학생이 일어나서 방언으로 하나님의 말을 선포하는데 무슨 말은 말인데 못 알아들었어요. 근데 그 방언이 끝나자, 바로 자기가 지금 이 말을 통역하겠다고 하면서, 예측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여학생이 그 방언을 통역하여 그 말을 알아듣게 되었는데, 그 예배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방언은 소통입니다. 그 때 그 말의 내용은 지금 이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며 기뻐하신다는 것, 그리고 모두에게 평화를 빌어주던 것을 잊지 못합니다. 그 때, 그 장소를 감쌌던 평화를 몸으로 느낀 경험이 있습니다.

   결국 소통의 문제입니다. 말을 들은 것입니다. 인류를 위한 기쁜 소식을 사람들이 외면하자,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하신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아주 단순, 명쾌한 진리를 하나님께서는 신령한 언어를 통해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오늘 이 전환의 시대에 또 한 번의 신령한 언어의 선포가 온다면, 아마도 자연과의 소통, 나무와 꽃들과 풀뿌리, 새들 그리고 흙과 강과 말하는 새로운 방언을 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이미 프란체스코가 보여주었듯이, 무탄트라는 책에서 호주의 원주민들이 동물들과 소통하였듯이 말입니다. 이제는 자연과 소통하지 않으면 지구는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오염되어가며, 자연의 다양한 종들과 개체들이 신음하며 지구상에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때 새로운 방언으로 자연의 피조물과 소통하게 해 주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꾸어봅니다.

    사도행전 1, 2장에서 거듭 나오는 말은 ‘들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그러면 이 들음의 시작은 어디에서부터 일까요? 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어떤 말인가요? 사도행전은 그 시작을 방언이라고 증언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이 각각 세계 각국의 말로 말하고, 그리고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케리그마’, 즉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그러니까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죽음가운데서 살리시어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이 기쁜소식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그 말을 듣고, 그리고 41절에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3천명이나 회개하였는데, 그 다음에는 가르침에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에게서 일어난 일입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또 사람들이 교회에대해 호감을 갖기 시작한 것이 어느 시 점 부터인가요? 42절에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기 시작하며 서로 사귀며, 빵을 떼며, 기도에 힘썼습니다.
   
   초대 교회는 물질가치 ‘0’의 삶을 공동체로 살아냈습니다. 로마와 유대교의 거친 물살을 헤쳐 나간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과 기도와 빵을 떼며 사귀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몇 일 전 텔레그램 ‘일하는 예수회’에 박 근이라는 분에대한 글이 올라온 것을 보았는데, 이 분이 지금 감옥에 구속되어 있습니다. 이 분이 왜 감옥에 가게 되었는가 하면, 지난 대통령선거의 개표부정을 알리는 글을 2만 건이나 올리는 중에 2건이 명예를 훼손했다는 건으로 기소가 되어 구속되었는데, 반성문이나 선처를 호소하지 않고, 형을 살더라도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법정에서 대선 개표 조작에대한 문제로 싸우겠다는 글이었습니다. 최근 국정원이 모바일의 모든 자료를 감청 도청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입한 것으로 시끄럽습니다. 근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분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요한복음을 빼곡이 필사를 하였는데, 그 공책을 사진으로 찍어 올린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
        은 하나님이셨다 . .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
        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
        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고 오늘 말씀인 ‘보리떡5개와 물고기 2 마리’ 말씀도 빼곡하게 장절을 붙여가며 또박또박 기록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 분은 크리스챤이 아니면서 왜 특히 요한복음에 몰두했을까? 얼마나 빛에대한, 진리에대한  갈증이 있었으면, 그리고 그 갈증을 요한복음이 풀어주었겠다 싶습니다. 제가 말씀하고 싶은 것은 이 분의 모습이 우리교회의 모습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분의 모습에서 성경에 몰두하는, 기도에 몰두하는 모습을 봅니다.

   저희 교회는 어떤가요? 사귀며, 공동체 식사를 합니다. 분위기 좋습니다. 근데 말씀에 몰두하고, 기도에 힘쓰고 있나요? 이것은 매우 진지한 질문입니다. 제가 25년 목회 중에 지금이 가장 힘이 듭니다. 이 전에는 새벽에 교인의 25~30%는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숫자로 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 수요예배, 주일저녁 예배 때에도 1/2은 당연히 참석하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원거리에서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근데 지금은 3 사람이 새벽기도회에 나오고, 수요 저녁은 3~4가정 정도입니다. 부끄럽습니다. 가르침에 몰두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몰입되고, 그 시스템에 붙들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상속자는 아브라함이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던 종이나, 사라에게서 난 아들이 아니라 자유자의 아들이어야 한다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이 자유는 오늘 이 시대에 더 절실합니다. 세상에 묶이어 종노릇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가르침에 열심을 다하며, 기도하며 친교하며, 빵을 나누는 공동체를 세워나가며 살 것인가는 50주년, 희년을 맞이하는 고기교회의 숙제입니다. 이 숙제를 잘 풀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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