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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성령강림절 후 셋째주, 2023년 6월 18일)

만지다 | 2023.06.19 15:00 | 조회 28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출애굽기 36-10절)


이집트의 왕자였던 모세가 도망자 신세로서 미디안 땅으로 흘러들어 가게 되었고, 나그네(2:22)이자 양 떼를 치는 목자(3:1)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의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신을 벗게 하시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이죠.

 

사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수많은 표현들 중, 오늘 본문 6절의 말씀에서와 같은 표현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오늘 우리가, 이러한 표현에 주목하면서, 그 안 더 깊숙이에서 발견해 내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실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을 사용하셨던 이유에 대해서입니다. ‘왜 하나님의 정체성이 그들의 이름을 통해서 드러났는가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여러 다른 민족의 조상들 중에서, 왜 하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이었을까요?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처음 마주하는 모세에게 아주 분명히알려주시기 위해서 그들의 이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셨습니다. 대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길래, 그들의 어떤 점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무엇을 보시고 그들을 선택하셨으며, 그들의 이름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셨던 걸까요.

아무래도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삭이 어떤 사람이었고, 야곱이 어떤 사람이었나를, 우리가 이 시간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첫 번째 이름의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맨 처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은 그의 이름이 아브람일 때부터 그를 선택하여 부르시고, 또 그에게 아주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라는 큰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큰 축복에는 한 가지 아주 커다란 조건이 따랐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가족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땅으로 가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장되고 안정적인, 익숙한 가족의 품을 떠나서 전혀 알 수 없는 낯선 곳으로 가는 것, 나그네이자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지금의 우리야 아브라함이 이후에 정말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받게 되었다라는 그 결말을 알고 있기에 그가 그 가족을 떠나는 선택을 한 것이 별로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수가 있는데, 당시 아브람은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이름도 모르는 처음 만나는 낯선 신이 말하는 약속인데다가 특히나, 당시에 친족 중심의 가족이 똘똘 뭉쳐야만 잘 살아갈 수 있었던 사회였음을 감안하면그의 선택은 정말 과감하고 담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좋게 표현해서 과감하다 담대하다 인거지 그것은 정말로 해서는 안 될 멍청하고 바보같은 선택이었습니다. 복을 받기는커녕, 복을 걷어 차버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가족을 떠나서 말씀하신 땅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길을 떠났던 그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는 나그네이자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그곳에는 먼저 살고 있던 원주민들의 텃세와 위협을 항시 마주해야했고, 심지어, 그가 길을 떠날 때 함께 그를 따라왔던 그의 아내 사라와 조카 롯, 가족들을 잃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어서 삶의 터전을 옮겨 다녀야 하는 수고가 매번 그를 찾아왔습니다. 위기와 문제투성이었고, 갈등과 위험, 어려움이 언제나 늘 뒤따랐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축복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습니다. 보통 우리는 결국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하면서 아브라함의 삶을 축복받은 삶이라고 기억하며 그를 치켜세우기도 하지만 실상 그의 삶 대부분은 매우 불안정했고, 막막했고 여러 실패와 고군분투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또 하나의 이름인 이삭은, 아무래도 이삭하면 그가 희생제물 바쳐질 뻔한 사건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그는 죽을 위기에 놓여 있었던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그냥 죽을 위기가 아니라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제 아무리 아브라함의 순종을 시험하시기 위해서라곤 하지만 이삭은 영문도 모른 채 하나님과 아브라함 그 사이에서 어떠한 선택권도 없이 죽음을 눈 앞에 두어야 했던 억울한 희생양에 불과했습니다. 이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순종함에 대한 이야기로 미화되어 전해져서 그런 것이지 이 이야기의 시작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결코 하나님 답지 않은 일이었고 그 한 가운데에 연약한 이삭이 있었습니다.

여하튼, 이삭은 그러한 억울한 죽음의 위기 후에도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못지 않게 삶의 터전을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삶을 살며 여러 사람들과의 갈등 속에서 계속된 죽음의 위기에 놓여 있었고, 그러므로 불안정함과 어려움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끝으로, 마지막 이름인 야곱은, 물론, 자신의 아버지를 속여 장자권을 가로 챈 일은 매우 꽤심한 일이기는 하나 그 덕에 형 에서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결국 그는 가족의 곁을 떠나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그의 외삼촌 라반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되지만 따뜻한 온정과 환대보단, 거래와 흥정, 속임수의 관계 속에서 스무해 넘도록 혹독한 부림(31:40-41)의 학대를 당하며 자유를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앞선 이름들과 마찬가지로, 위기와 갈등, 어려움이 항상, 야곱, 그의 곁을 따랐습니다.

 

이렇듯,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이 세 사람은 각기, 안정된 삶을 잃어버린 나그네, 억울한 죽음 앞에 놓인 희생양, 폭력적인 상황에 놓인 도망자로서, 모두들 공통적으로 위기와 고난, 어려움 속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연약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을 사용하시며 자신을 소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갖은 위기와 고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 그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연약했던 그들과 함께 동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약속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지혜를 주시며, 은혜와 축복을 더해주심으로 그들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안정된 삶을 잃고 나그네가 되었었던 아브라함의 이름과, 억울한 죽음의 위기에 놓였었던 이삭의 이름, 그리고 폭력적인 상황들 속에 살아야 했었던 야곱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다!” 라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를 의미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서 7-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고통받고, 억압 때문에 괴로워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계시며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알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에 앞서서, 하나님이 그 세 사람의 이름을 통해서 자신을 소개하신 것은 그 이름들이 그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였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세 사람의 이름이 불안정함과, 위기와 고난, 슬픔과 아픔 속에 있었던 이름이었기 때문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동행하시며 편이 되어주셨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신 하나님의 그 말씀은 그냥 자신을 소개하는 어떤 평면적인 말씀이 아니라,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억압 때문에 괴로워 부르짖는 사람들, 그러한 위기와 고난 속에 있는 연약한 이스라엘에게 아브라함에게 그랬듯이,,,! 이삭에게 그랬듯이,,,! 야곱에게 그랬던 것처럼,,,! 너희와 동행하겠다! 너희와 함께하겠다! 너희의 편이 되겠다! 라는 그런 의미가 담겨있는, 아주 입체적이며 위대한 선언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속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다시 한번 상기해본다면,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바로 모세였죠. 그것도 그냥 모세가 아닌 도망자 신세로서, 미디안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게 된 양을 치던 모세였습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화려하고 대단한 이집트 왕자 신분일 때에 모세 앞이 아니라 고난과 위기, 역경, 연약함과 초라함에 놓여있던 모세 앞에,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억압 때문에 괴로워 부르짖는 사람들, 그러한 위기와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 가시는 연약한 사람들의 편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또 그러한 사실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서, 예수님을 통해서 더더욱 분명해지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심으로,,,! 스스로 직접 연약하게 되기까지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함께 하셨던 사람들의 면모들은 어땠습니까? 힘이 있는 권력자들이었나요? 소유가 많은 부자들이었나요? 높은 권위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 포로 된 사람, 눈 먼 사람과 억눌린 사람들,(4:18) 그렇게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러한 그들의 편에 서서 함께 먹고 마시며, 치료하셨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성경 이야기의 시대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에도! 절대 변하지 않고, 언제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불안정하고 위기에 처해있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과 생명 모든 이름을 위한 분이십니다. 그들의 편에 서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오늘날에 세월호 가족의 하나님이시며,

10.29 참사 희생자 가족의 하나님이십니다. 일상의 권리를 빼앗긴 장애인들의 하나님이시고, 탄압받고 피 흘리는 노동자들의 하나님이시고, 차별과 혐오 속에 살아가는 소수자의 하나님입니다. 가정이나 학교에서의 폭력적인 상황에 놓여있는 청소년과 어린이의 하나님, 불안한 미래에 오늘을 고민하며 살아가는 청년들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라를 잃고, 쫓겨난 난민의 하나님이자 전쟁의 피해로 아파하는 세계시민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 김지만의 하나님이자, 여기 계신 우리 고기교회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모든 이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연약한 모든 이름들의 고난과 어려움, 위기와 문제들, 연약함을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시고,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은 그 이름들을, 위기와 고난, 어려움, 연약함에 결코 내버려두지 않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러했고,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그러했습니다.언제나 그들 앞에 놓인 위기와 어려움들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의 편에 서서 도와주셨습니다. 또한, 오늘, 모세 앞에서 하신 말씀처럼,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마찬가지로 고통과 억압, 고난으로 부르짖게만 두시지 않고 그것에서 이끌어 내셔서, 새로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명 하나님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위기와 고난, 어려움 속에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결코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정체성을 고백함으로 연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난해지는 것과, 고난을 당하는 것, 억압 받는 일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아가, 우리는 기꺼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기꺼이 연약해져야 하고, 기꺼이 고난과 어려움 앞에 서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연약한 우리 앞에 나타나시고 우리와 동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약함을 인정하고 연약함을 사랑하는, 우리 고기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특별히,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은혜와 축복을 주셨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축복은, 다름 아닌, “교회 공동체입니다. 지금 여기 모인 우리에게는, 바로 여기 고기교회 공동체가 그 은혜와 축복입니다. 적어도 위기와 고난, 어려움 속에서 혼자 있지 말라고, 외롭지 말라고, 완전히는 아니더도, 조금은 이겨낼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위로와 힘,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의 나로써 괜찮은 시간, 공간. 관계들이 있는 곳으로, 서로를 모두 두 팔 벌려 환영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 하나님을 예배하며,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찬양과 기도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여기 고기교회 공동체, 우리 서로 같이 고기교회 공동체가,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그러한 은혜와 축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며, 동행하십니다.

이 시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위기와 고난, 어려움에 있는 모든 이름들을 버려두지 않으시는 우리의 하나님을 기억하시는 우리 고기교회가 되기를 이 시간 간절히 소망하며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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