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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성령강림절 후 둘째주, 2023년 6월 11일)

stephensh | 2023.06.12 09:45 | 조회 273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성령강림절 후 둘째주일                                                                                  창세기 28장 1-5절


성경에 등장한 인물들 중 야곱만큼 다층적이고 복잡한 인물은 없는듯합니다. 신앙의 본으로 삼아야 할지, 아니면 반면교사 삼아야 할지 쉽게 갈피잡기 힘든 인물이 야곱이지요. 이런 야곱의 삶은 충만한 경험을 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두렵고 불안하고 욕심내는 우리들의 삶과 꽤 닮아 있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이 있는데 부침있고 굴곡있는 야곱의 삶을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로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야곱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삭의 두가지 축복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곧 외삼촌 집으로 떠나려 합니다. 떠나기 전 야곱은 아버지인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야곱이 떠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야곱을 죽이려는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야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1-2절 대로 외삼촌의 딸들 중에서 결혼할 사람을 찾아야 했기 때문입니다형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했던 이유는 다 아시겠지만,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진 이삭을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급하게 길 떠나는 야곱을 이삭이 축복해 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앞서 이삭은 분명 속아 복을 빌어준 뒤, 에서에게 빌 복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고 했는데, 야곱을 위해 빌 축복이 남아있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에서 몫의 복과 야곱 몫의 복이 따로 안배되어 있었던 듯합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합니다. 지금 야곱이 받은 복은 자손과 땅에 대한 것입니다. 생육되고 번성될 것이며, 지금 머물고 있는 땅을 가지게 될것이라는 복입니다. 이 복은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이고 26장에서 다시 이삭에게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 복은 히브리 민족의 근간이 될 복인데, 그렇다면 장자이자 평소 편애하던 에서에게 이 축복을 해줄 법도 한데 그러지를 않습니다.


앞서 에서를 위해 준비되었고 야곱에게 빌어진 복은, 재산과 권력에 대한 것이었죠. 이삭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복 대신, 하나님이 바탕이 되시는 이 복 대신, 왜 재산과 권력의 복을 에서에게 빌어주려 했던 걸까요? 답을 내기 전에 우선 자손과 땅의 복이 무엇인지 확인해야봐야 할 것 같은데요. 저명한 랍비인 조나단 삭스는 자손들과 땅의 복을 이렇게 주석합니다. 먼저 자손들의 복은 자손들을 가르쳐 대를 이어 언약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1819절처럼 자손들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 땅의 복은 그 자손들이 율법과 사랑의 언약에 기초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단지 자손들이 많아져 민족을 이루고 땅부자가 될거라는 약속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는 이들이 대를 이어가며 공동체를 이루니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성이 만개한 행복하고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질 거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이러한 복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이삭이 등장한 몇몇 본문을 보면, 태어났는데 아빠가 100살입니다. 게다가 경쟁하는 이복형제가 있었죠. 집안은 항상 긴장이 감돕니다. 이복형제가 집을 떠난 후, 어느 날엔 제물로 바쳐질 뻔도 합니다. 결혼도 뒤늦게 어렵게 합니다. 어쩌면 동네에서 마음에 둔 여인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그런데 어느날 아버지의 고향에서 한 여인을 데려오더니 아내라고 합니다사랑도 자기마음대로 못합니다. 또 하나님 뜻대로 순종했다가 아내를 뺏길 뻔 하기도 하고, 농사하고 목축하기 좋은 입지를 양보하고 계속 떠나야만 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삶을 등 뒤에서 따르며 경험했던 삶이, 그리고 자신의 삶이 참 유난하고 고단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그러다가 그 고단함이 자손과 땅의 복을 위해 사는 삶 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겠죠. 이런 이삭에게 자손과 땅의 복은 좋은 것이라기보다는 고생이었겠다 싶습니다. 게다가 삭스는 재물과 권력은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이삭 자신은 외아들이라 선택권이 없었으니 이렇게 고생하고 있지만, 자기가 편애하는 아들에게는 이런 약속을, 이런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이렇게 되면 믿음의 조상인 이삭을 너무 폄하하는게 되는걸까요


이삭의 속내를 알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건 고단하고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게 버겁고 힘겹게 느껴질 때 있진 않으신가요? 고기교회가 좋다고 자리잡으신 성도님들이라면 분명 자신의 삶에서도 쉬운 길 마다하고 고생이 되는 가치를 좇으며 사는게 뻔할텐데요. 남들은 돈이 되고 권력이 되는 선택을 잘 만하는데 나는 뭐라고... 이런 고생을 사서 하나, 그런 자괴감이 들 때 없으신가요물론 땅과 자손의 복이 재산, 권력의 복과는 상관이 없다고 해도 극단적인 금욕, 가난을 의미하는 건 아닐겁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더라도 어쩌다가 돈이나 권력이 주어지는 경우도 왕왕 있으니까요. 물론 돈과 권력이란게 시간과 에너지를 올인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게 되놔서 둘 사이에 거리감이 꽤 있긴 하지만요. 그래선지 돈과 권력을 따를 땐 결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는 없다는 걸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이 걸음이 때때로 수고롭고 자괴감이 들 때도 있겠지만 우리가 머문 자리에 움트는 생명들과 지나간 자리마다 더디지만 회복되는 정의와 평화를 보면서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면서 이 걸음을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삶

야곱의 삶을 더 따라가 보도록 하죠. 흔히 우리는 야곱의 이름 뜻을 발꿈치를 잡는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야곱을 발꿈치를 붙잡아서라도 어떻게든 수를 내고 속이더라도 이기려 애썼던 인물이라고 평가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이름은 정말 발꿈치를 붙잡은 자, 속이는 자 였을까요? 히브리 문화는 이름을 막 짓지 않습니다. 이름이 인격과 운명을 예견한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그러니 어떤 부모가 자녀 이름을 발꿈치라고 속이는 자라고 지을 수 있을까요야곱 이름을 발꿈치잡는 자라고 보게하는 본문은 두 곳 정도인데요. 먼저 2526절에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다고 하죠. 발꿈치는 히브리어로 야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야곱은 야켑에서 왔구나 하는게 자연스러웠죠. 또 다른 한 곳은 2736절입니다. 야곱이 에서의 복을 빼앗아 간 후 에서가 분노를 터뜨리는 장면입니다. 그 녀석의 이름이 왜 야곱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 녀석이 이번까지 두 번이나 저를 속였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야곱이름의 뜻이 발꿈치를 잡는 자, 속이는 자로 굳어지게 된 것이죠


그러나 2736절이 에서의 말이라는 걸 놓쳐서는 안됩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충동적으로 장자권을 판 이후 자주 야곱을 속이는 자라고 이름 붙이고 이죽거렸을 겁니다. 자신의 장자권을 가볍게 여긴 경솔함과 충동적이었던 과오를 부인하기 위해 야곱을 사기꾼으로 만들어야 했던 거죠. 야곱을 불명예스럽게 만들어 그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 것이죠. 현대 연구에서는 야곱이 야켑이 아니라, 야아콥엘이라는 문장의 축약형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흔한 이름이었는데 하나님이여 보호하소서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이름은 야곱에게 정말 필요한 이름이었죠.


그 시대를 떠올려보시죠. 대체로 장자는 부모의 재산을 다른 자녀들보다 두배 정도 상속받았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장자가 전부를 갖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삭 역시 에서를 위해 모든 재산과 권력의 복을 다 빌어주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리브가는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습니다. 장자가 모든 것을 독점하고 군림하는 시대에, 얼마나 위험한 예견입니까. 그러니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난 이 아이를 보며 하나님이여 보호하소서 했던 것이죠.


또 다른 의미에서 야곱에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필요합니다. 형이 동생을 섬기겠다는 예언은 결과적으로는 형과 동생이 불화하고 동생이 형의 자리를 빼앗도록 채근한 셈이 되었습니다. 이 예언은 성경에 곳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가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보면 형들이, 종교권력자들이, 부자들이 부끄러워집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수치심과 죄책감 가득한 사람들이 찾아지고 예수님 곁으로 초대됩니다. 곳곳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자리를 뒤바꾸십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엔 세상의 강한 자들이 가난한 마음을 지녀 연민의 사람이 되고, 약한 자들은 위로받고 회복되어 희망차고 자신있는 삶을 살아내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야곱에게 향했던 이 예언은 실제로 자리바꿈일 수도 있지만, 형을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주게 될 거라는 의미였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재산과 권력은 아무래도 덜 가지겠지만요.


그러나 야곱도 에서도 잘 알아듣지 못했죠. 에서는 동생의 존재를 위협으로 여겨 적대합니다. 또 야곱은 형의 자리와 소유를 넘보느라 늘 불만족스럽습니다. 그러니 야곱의 비극은 에서의 견제와 위협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만끽하지도 누리지도 감사하지도 못하니 자신이 자신에게 올무가 되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야곱의 마음은 이 고된 길을 떠나기도 전부터 고되었을 것입니다. 늘 경쟁하고 비교하니, 하루는 열등감에 하루는 우월감에 들썩거렸을 겁니다. 그러니 굳이 겪지 않아도 될 갈등, 슬픔, 괴로움을 경험합니다. 훗날 자신도 결국 역기능 가정의 가장이 됩니다. 자신을 못마땅해했던 아빠의 모습, 자신을 소유하려고 했던 엄마,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형, 자신을 착취했던 삼촌의 모습을 반복합니다. 이러니 하나님이여 보호하소서란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이 보호하셔서 안팎의 시련과 유혹으로부터 지켜주시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었다면 야곱의 삶은 어딘가에서 무너져 버리고 말았을 겁니다.


하나님을 보는 삶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20년 후 얍복강 나루터에서의 씨름으로 야곱을 이끌어 갑니다. 그는 그곳에서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뜻은 해석이 분분합니다. 하나님이 싸우신다 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기도 합니다. 초대 교부들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이쉬, 라아, 엘의 합성어로 여겼다고 하는데 그 뜻은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이곳에서의 경험을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어라고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을 고려할 때, 초대교부들의 해석은 일면 타당해보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 했던 연약한 야곱, 하나님의 꿈을 어떻게든 자기 식대로 이루려했던 야곱, 다른 사람의 것을 신경쓰고 탐하느라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던 야곱이 하나님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얕은 수가 자신을 지켜온 줄 알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해오신 거라는 걸 발견합니다.

 

야곱은 형을 만나기 전 막대한 양의 자산을 선물하고, 에서와 만나는 순간 일곱 번 절을 합니다. 야곱은 형에게 빼앗았던 것을 돌려줍니다. 재물과 권력이 자기를 지키는 줄 알았는데 이제 하나님을 본 후엔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습니다. 이제 형에게 재물과 권력을 돌려줍니다. 줄곧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던 야곱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을 통해 변한 건 상황이나 형의 마음이 아니라 야곱,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야곱은 행복하기 위해 굳이 다른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자신의 모습으로 충분하고 괜찮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제 자기다움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죠. 야곱은 이제 하나님과 같은 꿈을 꾸고 함께 희망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친구가 됩니다. 그는 이제 하루도 하나님 없이는, 하나님 앞에 머물지 않고는, 하나님의 임재를 청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꿈을 좇지 않고는 가슴이 뛰지 않을 것입니다. 재산과 권력에 대한 열망이 하나님을 사귀고 알아가는데 방해된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 자손과 땅의 약속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우리의 삶은 사실 야곱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루 하루가 퍽퍽하고 참 고단합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이고 우리의 상황  때문이고 어쩌면 우리의 마음 때문입니다. 이러니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꿈을 따라 살아간다는 건 한층 버거운 일입니다. 그래서 야곱을 아껴주시고 보호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삶도 보호해주십니다. 세상은 저렇게 힘과 돈으로 찍어누르는데 자손과 땅의 복만으로 뭘 할 수 있겠나 싶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설령 오늘 우리가 의심스런 상황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느끼지 못하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너무 멀리 있다고 느낍니다. 상황이 꼬이고 문제가 생기고 기도가 덧없이 느껴질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 뿐 하나님은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십니다. 때로 왜 기도의 응답이 미루어지는지, 또 왜 원치 않는 방향으로 상황이 끌려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여전히 가까이 계시며 우릴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야곱을 보호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런 열심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꿈을 꾸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려는 이들을 보호하십니다. 고난 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비극 속에서 여전히 버티고 애쓰고 있는 수고하며 마음 한켠에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들을 돌보시며 만나주십니다. 고단함에 눌려 잘못된 선택들을 하는 이들을, 또 찌그러진 마음들이 만들어내는 비극 속에 고통하는 이들을.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은 여전히 보호하십니다하나님은 야곱들의 살아갈 날들을 걱정하시며 야곱들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도록 꿈꾸시는 정의로운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할 때 우리가 주저앉아있을 때 우리를 지지하고 응원하며 품어주시는 따뜻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길이 때로 돌아가기도 하고 열등감과 욕심으로 채워지기도 하지만 아주 무너지지 않도록 챙기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은 이런 하나님을 따르다가, 이런 하나님을 자주 만나고 보다가, 결국은 닮아가는 과정이랄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게 때로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손해보는 것만 같기도 하지만 흔들림없이 이 길을 걸어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보며 우리 모두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배워 하나님처럼 자비로운 사람, 하나님처럼 긍휼히 여기는 사람, 그래서 누군가의 우산이 되어주고 쉴만한 동산이 되는 사람들로 성장해가는 이 여정을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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