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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일 = 영 : 육(사순절네째주일, 2019년 3월31일)

하늘기차 | 2019.03.31 14:57 | 조회 1033


                                믿음 : = :

2019331(사순절네째주일)                                              5:8-10;17-18;6:47-51

   요한복음은 상징의 덩어리입니다.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일으킨 말씀에도 곳곳에 상징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 부활 승천 후 100년이 지난 교회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상징 언어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의 6물동이는 유대정결예법을 상징하며, 베데스다 못가의 주랑 5개도 모세오경을 상징하고, 38년된 환자라는 38이라는 숫자도 글자그대로 38년 된 것이 아니라 상징입니다. 42년일 수도, 36년 일수도 있지만 38년입니다. 38년은 신2:14에 보면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결국 남쪽으로 내려가며 광야길에 들어서는데, 그 고난의 길의 마지막 단계인 에돔과 모압을 경계짓는 세렛 시냇가를 건너기 직전, 그러니까 가나안 동쪽, 요단강 건너편으로의 진입을 눈 앞에 둔 헛된 세월이 38년입니다. 이 중풍병 환자 역시 38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누워 있습니다. 생명에 관한한 우리는 아마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니 그게 당연한 것입니다. 생명은 주신대로 누리는 것이지 생명에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없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환자가 스스로 일어난 사건은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의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38년된 병자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리를 걷어 걸어갔는데, 이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5:10에서 오늘은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소라고 합니다. 물이 동할 때, 누군가가 도와주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일어난 생명을 얻은 사건인데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라고 하며 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안식일법의 언어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미 유대 종교에는 생명이 사라졌습니다.

   오늘 말씀 나는 생명의 빵이라는 당시의 언어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말씀을 하게 된 경위 역시 베데스다 못가의 표징 이후의 유대인들의 반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피는 생명이어서 동물의 피는 먹지 못하였는데 예수님이 내 살을 먹고 마시라 하였으니 제 정신이 아니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죽하면 내가 빵이다라고 하였을까요. 예수님은 52어의 표징을 보고 다시 쫓아 온 사람들에게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의 양식을 위해 일 하라고 합니다. 안식일과 신성모독의 법으로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정죄할 꺼리를 찿으며 모세를 들먹입니다. 유대인들이 모세가 광야에서 우리 조상에게 하늘에서 빵을 내려 먹게 해 주었다고 하자, 예수님은 그 빵 역시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32절은 이야기의 전환의 키 포인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냥 빵이라 하지 않고 참 빵이라고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 할 때에도 예수님은 우물물을 달라 하시다가, 내가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준다고 하자, 여인은 그 물을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이 이 참 빵은 하늘에서 내려 와 세상에 생명을 준다고 하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그 빵을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주리지 않을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는 선언을 하십니다. 이들은 사마리아 여인과 달리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참 빵이라 하는 순간, 이야기는 이미 영적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들을 귀가 없어서, 죽어있어서 생명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36절에서 그들이 믿지 않기 때문이라 합니다.

   왜 믿지 않을까요? 율법을 잘 지키는 것, 토씨 하나라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믿음이라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생명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지키는 일 만 보이지 율법의 정신은 없습니다. 문자는 있지만 사랑의 상징은 없습니다. 인천국제 공항에 앙골라의 내전을 피하여 살고자 대한민국을 찿아 온 한 가족을, 제주도에 찿아 왔다가 오산에 집단이주를 하며 난민신청을 하고 있는 예멘 난민을 이슬람이라고 합니다. 성소수자들을 온갖 저주로 죽어야 마땅한 존재로 여깁니다. 어두움입니다. 빛이 아닙니다. 38년된 병자를 일으킬 떼, 왜 안식일에 일하느냐고 하자, 예수님은 아버지가 일하니 나도 일한다고 하였고, 이 말이 빌미가 되어 안식일을 거역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기를 동등한 위치에 놓았다고 보고 신성모독으로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와 정 반대의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동등함을 당연히 생각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여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르게 볼 수가, 아니 정 반대로 볼 수 있을까요? 그 한 가지 요인 중에 하나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탁월한 은유와 상징 체계를 무시하고, 사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봅니다. 최근의 가장 문제가 되는 문자적 성경해석은 창조과학회의 성서관입니다. 마치 그것은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라고 한 중세의 교회의 모습과 다름이 없습니다. 상징과 은유는 성서를 영적으로 보는 탁월한 성서 해석의 열쇄입니다.

   유월절이 가까워 올 즈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모여들자. 예수님은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합니다. 요한은 이것을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빌립이 이 사람들에게 모두 조금씩이라도 먹게 하려면,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가지고서도 충분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는 여기에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합니다.

   이 시험은 어떤 시험이었을까요? 예수님을 찿아 와서 하늘에대한 이야기를 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네가 바라보는 하늘, 즉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머니 뱃 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하냐고 묻습니다. 수가성에 살고 있는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도 예수님은 이 여인을 시험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여인에게 마실 물을 요청하지만, 역으로 내가 너에게 물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두레박도 없는데 어떻게 물을 줄 수 있느냐고 하자, 내가 주는 물은 이 물처럼 다시 목마른 것이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라고 하자, 그 물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이 여자가 남편이 없다고 합니다. 이건 무슨 수작입니까? 이정도면 다 된 게임아닌가요?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썸을 탑니다. 그런가요? 문자적으로는 그렇지요? 그러나 영으로 보세요? 그 흐름이 얼마나 배려가 있고, 섬세하며, 생명의 말씀인지 보입니다. 제자들은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는 흐름을 놓쳐버립니다. 무슨 말인지 어려워 못 알아 듣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6:36에서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이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영적입니다. 이것을 일이라 부르면, 그 생명의 가치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이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믿음입니다. 유대인들이 일에대해서 시비를 걸자 예수님은 더 큰 일을 보여 놀라게 할 것이라 합니다. 놀랄 만한 더 큰 일은 무엇일까요? 부활과 심판에대해 이야기 합니다. 부활과 심판도 모두 믿음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죽은자의 부활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님은 죽은자의 부활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서 나를 믿는 자의 영원히 죽지 않는 삶에대해 말씀합니다. 영적 죽음, 말씀을 말씀으로 받지 못하는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깨어나, 지금 부활하라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부활 만을 바라보며 종교에 묶이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주님과 내가 아버지와 하나로 이어져 부활이고 생명임을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느냐고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래도 마리아는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드립니다.

   6장 말씀에는 2개의 기적 사건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리떡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이 먹은 사건은 출애굽 광야의 만나와 연관이 있으며, 또 물위를 걸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홍해를 갈라 홍해를 건넌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요한이 이렇게 두 가지 사건을 기록한 것은 유대인들이 추앙하는 모세가 오실 그 분이라고 한 분이 예수라는 것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의 제자들이 탄 배에 가까이 가자 제자들이 무서워할 때 예수님이 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어에는 에고 에이미’, ‘나는 . . 이다’, ‘나는 나다로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타지않는 가시떨기 가운데에서 일러주신 이름인데, 예수님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그렇게 나는 나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율법으로 보면 신성모독이지만, 믿음으로 보면 생명의 몸으로의 변화입니다. 의식의 깨어남입니다. 영적인 말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순간이며, 불뱀이 구리뱀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38년된 고침 받은 사람이나, 니고데모는 여전히 어두움에 머물러 있어 나는 나다라는 생명의 존재로 서지 못합니다. 스스로를 바꾸는 것, 제도권에서 빠져나오는 것, 기득권을 놓는 것이 두려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나는 참 빵이다라고 합니다. 또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역시 나는. . . 이다입니다. ‘입니다. 주님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예수 하나님처럼 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빛이며, 정의이며, 사랑이며, 소금이며, 빛입니다. 아버지가 그러하시고, 우리의 주님이 그러하시니, 나도 그러합니다. ‘라든지, ‘라든지, ‘우리가 아니라 입니다. 그것이 믿음이며, 영입니다. ‘를 회복하고, 찿는 것이 믿음이요, 영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역사와 우주를 섭리하시며 주관하시는 라면, 예수님은 생명을 위한 죄 사함의 은총을 위해 십자가에 높이 들린 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자녀가 부모 닮듯이, ‘주님이 가신 길’, 그 십자가의 길은 나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3:6에서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라 하셨습니다. 영의 길, 믿음의 길로 나아가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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