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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없는 믿음(바로 그 시각,2017년1월22일)

하늘기차 | 2017.01.22 15:06 | 조회 1417


                   바로 그 시각(믿음의 시간)

주현절후 세째주                                                                                                             요4:46-54

   예수님의 기적 사건은 설교준비를 할 때 부담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예수님이 드러내신 기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어떤 말을 해도 그 기적을 대체할 수 있는 말씀은 없습니다. 기적을 기적으로 풀어야지, 기적을 말로 풀 수는 없는데, 나에게는 신유의 은사도 없고, 내 주변에서도 기적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무슨 목사가 저래, 목사님, 무엇을 모르시네 하며, 지금도 신유의 역사들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는데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강요하는 모습이나, 원하는 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믿으라고, 잠재의식을 강조하는 것, 반복하여 나는 이미 고침을 받았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 졌다고 상상하며 자기 암시를 주는 경우가 흔합니다. 또 믿음이 있어야 병을 고친다고 하며, 믿음이 적어서 라고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해 버립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십니다. 저는 신유는 잘 모르지만 예수님의 치유의 말씀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으며,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을 통해 믿음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를 회복시키시는지는 찬찬히 살펴 보며,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사모합니다.

     45절에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의외의 일입니다. 사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언서의 말대로 예수님을 오히려 핍박하였습니다. 4:29에는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화가 잔뜩 나서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내 몰아 떨어뜨리려고 하기 까지 했을 정도였습니다. 13:54 이하에서도 말씀의 능력에는 놀라워 하면서도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동생들이 지금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느냐 하며 비아냥 거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환영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2:23 이하에 보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징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믿은 사람들을 칭찬도 하고, 그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법도 한데, 그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에대해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어느 증언도 필요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언행에 그리 신경쓰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에만 집중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믿음과 말씀이 아니면, 믿음에 관한한, 교회에 관한한 사람들의 말에, 목사의 말에 게의치 말고 그러려니 해야합니다. 마음에 상심하거나 상처받을 필요 없습니다. 믿음과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순간적으로 믿음 아닌 것에 붙들리기 쉬운게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환영받지 못할 줄 알면서도 굳이 갈릴리 가나로 내려가셨는데, 의외로 환영을 받은 것입니다. 뜻밖이었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왜 내려가셨을까요? 이건 저의 추측인데, 임금의 신하를 통해 되어질 일을 이루려 하시지 않았을까 십습니다. 가버나움에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죽을 병에 걸린 아들의 병을 간절히 고치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애뜻함을 아시지 않았겠나 싶으면서 갈릴리에 내려가셨는데, 의외로 바라지도 않던 환대를 받은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에서 본 기적을 고향에서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감에 예수님을 환대하였지만, 예수님은 냉담합니다.

    가버나움에서 가나 까지 찿아 온 사람은 왕의 신하입니다. 헤롯왕의 측근이었을 수도 있었겠는데, 사랑하는 아들이 죽을 병에 걸린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오셨다는 소식만 들었는데, 이 왕의 신하가 애뜻함을 가지고 굳이 가나에 까지 그 먼 길, 거의 36km 거리에 있는 곳 까지 예수님을 찿아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그 애뜻함을 받아들이신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믿음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거듭 이야기하지만 저에게 사랑이 없습니다. 믿음도 물론 없지요, 왜 사랑이 없다구 자꾸 그러냐구요? 십자가의 사랑이 없어요. 왜 믿음이 없냐구요. 눈에 보이는 것도 못 믿는데, 보이지 않는 믿음이 어찌 내게 있겠어요.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서 믿사오니 믿음 없음을 용서 하소서 하며 믿음 없음을 하소연 했지만, 그 아이의 병이 깨끗이 고침을 받았지요. 그 때도 방금 변화산에서 내려오셨데, 그 귀신들린 아이의 병든 모습 앞에 제자들 조차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나요? “아 믿음이 없는 세대요, 내가 언제 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음 없다고 애태우는 그 모습 그대로를 드러낸 아이의 아버지의 간절하지만 아무 것도, 주님이 참지 못해하시는 그 믿음 없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그 절체 절명의 순간에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 믿음 없음을 인정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괜찮다 하십니다. 그래 괜찮아 너 믿음 없는 거 알아!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롬1:17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할 때 그 의인은 바로 그 사람의 행위가 옳고 바르다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주께서 인정한다 것입니다. 16:6은 그것을

                          “아브라함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여기셨다고 합니다. 그런 믿음이라고 하였는데, 아직 온전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괜찮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의 괜찮아!’가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우선 주님의 긍휼, 즉 사도 바울이 본 온 세상, 피조 세계와 역사가 아파하는 신음 소리를 들으시며 눈물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연민과 둘째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 무력함 속에 빠지거나, 그저 정처없이 주님을 향하는 모습이 아니라, 믿음이 없지만 간절함으로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오는 그 순간, 그렇게 주님이 없는 갈망이 아니라, 아무 힘 없지만 주님이 인정하는 무력한 내 모습 그대로가 스파크를 일으킬 때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 현현주일 3번째 주일인데, 그렇게 현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현현,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게 믿음이 없는 줄 알았는데, 내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에대한 간절함이,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교회를 향안 애뜻함이 예수님과 만나며 믿음이 드러납니다. 은혜입니다. 그것은 뽕나무에 올라간 삭케오와 예수님의 눈이 마주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말씀 드렸지만 자기 무력감, 또는 이기심, 아니 자기의 것이라 생각하는 것에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믿는 척 하는 것이고, 그래서 종교적 껍데기를 두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없으면 없는데로, 있으면 있는데로 엄마 품 안에 있는 어린아이 처럼 머물러야 하는데 자꾸 멋을 부리고, 인척하고 자기의 것, 자기 연민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왕의신하는 모든 자존심을 다 버리고, 갈릴리 동향 사람들이 그렇게 비웃기도 하고, 가식적으로 환영하던 보잘 것 없는 목수 요셉의 큰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전심으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발 좀 가버나움으로 오셔서 우리 아들 좀 고쳐주십시오하고 애원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관 정도 되지 않았겠나 싶은데, 목수 예수에게 자존심 다 버리고 아들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어라고 하시나요?너희는 표징이나 기이한 일들을 보지 않고는, 결코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왕의 신하 보다는 기적을 보려고 환영하며 찿아 온 사람들 들으라구 한 말입니다. 아마 갈릴리 사람들은 뜨끔했을 것이구, 자존심 확 구겼을 것입니다. “니까진게, 목수 아들이!” 하며 돌아 섰을 것입니다. 4장 회당에서도 동네 사람들에게 엘리사와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 때도 기분이 팍 상해가지구 예수를 쫓아 냈거든요. 지금도 다분히 분위기가 싸늘해 졌을 것입니다. 이 분위기가 어떻게 반전되었을 까요? 믿음입니다. 믿음 없는 믿음입니다. 주님이 인정하는 믿음 말입니다. 왕의 신하가 자기는 나름 믿음으로 기다렸고, 믿음으로 이렇게 먼길을 자존심 버리고 왔는데, 예수님께서 믿으려 하지 않는다고 하니,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떻했을까요? 그런데 다시 한 번 간청을 합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 왕의 신하의 모습을 보며, 아니 체면이 있지, 대통령의 측근이 하며 아들 때문에 정신 나간거 아냐?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전혀 굴하지 않고

                                        “선생님,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주십시오.” 합니다. 이 한 마디가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며, 믿음이 없지만 믿음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돌아가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 믿음 없음이 믿음으로 변화되는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여야 하고, 그냥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그냥.. 푹 안기는 그 평화의 은혜가 넘칩니다.

    이미 결판이 났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갑니다. 중간에 마중나온 종들과 만나서 확인해 보니, 예수님이 살 것이라 한 그 때에 아들이 살아난 것을 알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보통 은혜를 입고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기 십상인데, 마지막에 이 왕의 신하와 그 집안이 함께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믿음입니다. 믿음 아닌 것, 은혜 아닌 것 따르지 말고,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총(sola gratia), 오직 말씀(sola scriptula) 안에 머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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