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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 믿음, 사랑, 평화 : 정체성(주현절후 제일주 , 2017년1월8일)

하늘기차 | 2017.01.08 14:33 | 조회 1293


           근심, 믿음, 사랑, 평화 : 정체성

주현절후 제일주                                                                                                         요14:1-14

   예수님은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근심은 마음으로부터 옵니다. 왜 제자들에게 지금 근심하지 말라고 하나요? 13에서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나누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우리들 중에 배반할 사람을 지목하시고, 이제 곧 너희가 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신다는 말인가? 분위기가 푹 가라 앉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결기를 부리며 주님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하는데, 주님은 충성을 맹세하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찬물을 끼언집니다. 그리고 나서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즈음 가수 전인권씨가 부른 걱정말아요, 그대’(그대여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를 들어 보면, 그 첫 소절부터 복음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성경은 걱정에대해 무어라 이야기 하나요? 왜 근심할까요? 산상수훈 마6장에서 예수님은 공중의 나는 새와 들의 백합을 보며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새와 들꽃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즐거워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들꽃은 길쌈도, 수고도 하지 않으며, 새들도 씨를 뿌리지도, 거두지도,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잘 살아간다고 하면서, 왜 걱정하냐고 질타하십니다. 복음은, 말씀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로 흘러갑니다. 은혜의 강줄기가 그렇게 물고를 틉니다. 은혜가, 말씀이 스스로 그렇게 터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노력이나 수고가 아니라, 받아들임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받을까요? 믿음의 그릇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중에 나는 새와 들의 백합에대해 이야기하면서 듣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적은자들아!’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면 에이~ 어떻게 걱정 없이 살어하시렵니까?

    새들은 새의 모습으로 살고, 들꽃은 들꽃의 모습으로 사는데, 그래서 우리도 새나 들꽃처럼 이제 직장 그만두고, 전인권 복음 따라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할까요? 새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아십니까? 특히 새끼가 알에서 깨어나면 새끼를 키우기 위해 필사적입니다. 들꽃들이 종족을 퍼뜨리기 위해 어떻게 새싹을 돋우고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지 알지요?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게, 스스로 자기 생명 내어 놓으며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되도 안한 염려는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새나 들꽃이 아닙니다. 새는 새의 모습으로, 들꽃은 들꽃의 모습으로 자기를 살아가는데,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갈까요? 염려, 걱정은 정체성, 본질의 문제입니다. 왜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인가 하면, 주님이 아주 절실하게 권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합니다. 제가 우리라고 했을 때, 이 우리는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받은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믿음에관한 일이요, 기독인들에게는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성도들은 믿음으로 보아야 하고, 믿음으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알고 있다고 하는데, 도마는 모른다고 하고, 빌립은 보지 못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에게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인식론적으로, 논리적으로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으로 알고,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이중인격자도 아닌데, 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이 잠시 후 체포되어 십자가에 처형당할 상황 속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갔다가 다시 온다고 하는데, 어디로 가신다는 것인지, 그리고 갔다가 어떻게 다시 온다고 하는지, 제자들은 맨붕이 왔습니다. 가뜩이나 예루살렘의 분위기가 여차하면 자신들을 제거하려고 둘러싸는 분위기인데, 그렇게 간다고 하자, 어쩔줄 몰라 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믿음에대한 마지막 말씀이요, 명령이었습니다.

    여전히 무슨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21절에서 믿음을 사랑으로 풀어냅니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

                             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

                            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라고 합니다. 늘 이야기하지만 내 안에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내가 무엇을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온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받아 지킨다고 합니다. 믿음입니다. 받아 지키는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나를 믿는 것과 나를 사랑하는 것이 같습니다. 믿음이 사랑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읽는 말씀이 전체 맥락 속에서 어떠한지를 보아야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깊이 이해할 수가 있고,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13장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말씀에서부터 17장 영광의 기도에 이르는 전체를 하나의 내용으로 보아야 그 말씀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13:34에서 예수님은 어쩔줄 몰라 하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준다고 합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이 말씀이 왜 새 계명인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님과 영생에대해 이야기하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대해 이야기하거든요. 이미 신명기와 레위기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새 계명이라니, 그래서 다시 찬찬히 본문을 읽어 보고, 주석도 찿아 보니, 예수님의 말씀이 맞더라구요. 구약은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고, 네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데, 그 사랑의 기준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 있어요. 그러니까 구약의 사랑은 율법을 지키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는 사랑은 그야말로 새 계명입니다. 34절에서 보면 서로 사랑하라고 하면서 바로 뒤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합니다. 전혀 다른 사랑의 기준입니다. 율법은 자키는 사람이 기준인데,복음은 예수님이 기준입니다. 그래서 복음인 것입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로 넘어가면,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수준의 사랑인지가 보입니다. 포도나무와 농부와 가지가 하나인 사랑입니다. 15:9, 10에서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 하면서,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이 요한1,2,3 서신에서계속 이어집니다. 지금 계명을 지키는 것은 내가 지키려고 노력해서 지키는 것이기 보다는 물론 우리의 노력과 땀과 기다림과 열심과 마음을 모으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전체적으로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인 포도나무의 뿌리에서 수액이 올라오고, 햇빛과 바람과 비가 내리며 가지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머물러 있어서 지켜지는 지킴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간다고 할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 가운데 흩어져 사는 유대 사람들에게로 가서, 그리스 사람들을 가르칠 셈인가?”라고 하는 것이나, 베드로가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라고 한 말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자기 의지, 감정, 노력에 매입니다. 왜냐하면 보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온다고 하니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다시 온다는 이 말은 종말론적인 묵시적 파국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오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 1절에서 예수님은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근심하는가 하면 그동안 줄 곳 함께하던 예수님이 이제 간다고 하니 어리둥절해 집니다. 도대체 어디로 간다는 것인가, 그리고 또 다시 온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무얼 알아야 통반장을 해 먹을텐데, 도통 실마리를 잡지 못하니 목숨이라도 걸겠다는 믿음아닌, 성령아닌, 사랑아닌, 근심에서 오는 결기를 보인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이제 예수님은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소극적입니다.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근심이 아니라 평화를 말씀합니다. 공중에 나는 새와들의 백합이야기에서도 걱정하지 말라고 만 하신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무엇을 입을지에대한 걱정은 이방인들이 하는 거시라 하며,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셨습니다. 14:27에서도 예수님은 평화를 남겨두고 간다고 하시면서,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16:33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니,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합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사랑에는 무엇이 따른다고 하나요, 수고이지요, 소망에는 기다림, 인내가 있어야 하구요, 그리고 믿음에는 무엇입니까? 용기입니다. 평화는 용기있는 사람, 믿는 사람에게 값없이 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함께하면서 어떻게 무리들이 믿음을 회복하는지, 그리고 믿음을 통해 얼마나 풍요로웠는지를 보았는데, 이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고, 또 믿는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14장에서 내가하는 일을 너희가 할 뿐 아니라, 나 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 합니다. 그것은 내가 이제 아버지에게로 떠나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이야기에서도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며, 이것은 내 기쁨을 너희게 주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17장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눈 앞에두고 세상과 교회, 이세상에 남을 제자들을 위한 승리의 기도, 믿음의 기도, 영광의 기도를 드립니다. 참 기가막히고도 멋진 13~17장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남아 세상의 어두움과 선한 싸움을 싸워야할 제자들에게 거듭 근심에서 벗어나도록 믿음을 권유하며 믿음을 통해 누리는 축북을 말씀합니다.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하면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함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되는 포도나무의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시편80:8이하를 보면 우주와 역사 속에 뻗어있는 거대한 포도나무에대해 이야기 합니다. 우리도 그 포도나무, 평화의 포도나무의 한 줄기이며, 가지입니다. 여기서 평화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얻는 포도나무평화는 베드로 처럼 결기를 부리거나, 세상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아버지에게 머물러있음으로 오는 평화입니다. 그러니 구멍가게에 가서 천박한 불량식품 사 먹지 말고, 주님이 약속하신 포도나무 믿음, 사랑, 성령, 평화를 맛보며 신앙인의 자존감을 갖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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