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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창조절 열두번째주일, 2017년11월19일)

하늘기차 | 2017.11.19 14:19 | 조회 1207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

20171119(창조절 열한번째주일)                                                          삼하24:1-4;18~25

     오늘 본문 말씀 첫 절에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고 합니다. 한글개역은 다시 진노하셨다고 하는데, 이스라엘이 무슨 죄를 또 그렇게 지었을까요? 저는 이 인구조사와 관련한 내용이 다윗의 죄때문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다윗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범한 죄에대한 벌을 다윗을 부추겨 인구조사를 통해 내리신 것입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도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항상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사울이 살아있을 때에는 사울의 시기심에 늘 도망다녔고, 죽은 후에도 북이스라엘 족속은 여전히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항명이 있었고, 그래서 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삼하5:5에 보면 여전히 헤브론에서 남쪽 유다 만을 다스렸고, 7년 반 만에 예루살렘에 오르고 나서야 유다와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그 후 율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왕국전체가 안정세로 들어간다 싶을 즈음에 밧세바 사건이 터지고, 이어서 큰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그 때 백성들의 마음이 대부분 압살롬에게 기울었지만, 압살롬의 반란은 실패합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여전히 북 이스라엘의 마음을 얻지 못합니다. 왕하 20장에 보면 사울의 자손인 세바가 반란을 일으키는데, 세바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윗은 유다지파이니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도 우리는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지역감정을 부추기자, 북이스라엘이 세바의 거짓 모략에 넘어가 반란에 동참을 합니다.

   그러나 반란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남쪽 유다사람들입니다. 삼하19:42에 보면 압살롬이 죽고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때, 유다 사람들은 다윗이 자기내 지파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하며 다윗을 호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외시켜 무시함으로 세바의 반란의 원인을 제공합니다. 약간만 양보했더라면, 일정부분 북이스라엘에게도 왕궁복구의 역활을 주었더라면 얼마든지 평화로운 왕국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남쪽 유다사람들은 다윗 왕과 동일한 지파라는 이유로 왕정복구를 자신들의 자랑거리로 삼은 것입니다. 이것이 후에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왕 때에 이르러 이스라엘 왕국을 남북(유대와 이스라엘)으로 갈라놓은 결정적인 단초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남쪽유다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아 성령 안에서 화합해야 할 왕국을 분열케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북이스라엘도 잘 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왕을 세우려고 하고, 그래서 실제 오랜 동안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한 북이스라엘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남북이스라엘을 다윗을 통해 책망하셨습니다. 다윗의 교만함이 하나님의 진노의 통로가 됩니다. 다윗은 그동안의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며, 온 이스라엘을 평정하여 나라가 안정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인구조사를 하며 자신의 군사적 힘을 숫자로 확인하려 했습니다. 23장에서는 다윗이 사랑하는 용사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다윗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힘이 세서, 군사의 숫자가 많고, 힘센 장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을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에대해 대상21:1은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부추겨 인구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조사하겠다는 충동이 일어나도, 그것을 억제하는 것이 믿음이고, 신앙일텐데, 다윗이 시험에 든 것입니다. 결국 온 나라에 전염병이 돌고 7만의 백성들이 죽습니다.

 다윗은 이 시험에서 빠져나올 마지막 한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충직한 요압입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라고 지시를 하자, 요압이 하나님은 마음만 먹으시면 지금 보다 백배나 이 백성과 군을 튼튼하게 세우실터인데, 왜 굳이 숫자를 헤아려 자족하려 하십니까 라고 간언하지만 듣지를 않았습니다. 요압은 다윗에 미치지 못하며, 늘 자기 과욕을 보이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다윗의 잘못을 봅니다.

10절에서 다윗은 인구조사를 하고 난 다음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하나님께

                       “내가 이러한 일을 해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

                              님, 이제 이종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빕니다. 참으로 내

                              가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을 하였다고 죄를 고백합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죄의 결과로 수 많은 백성들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죄의 용서함을 받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늘 죄에대해 묻고, 말합니다. 바울은 롬7:15에서 죄에대하여 내 속에 자리잡고 있는죄라고 하며,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 나는 비참한 사람!’이라 하며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냐? 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사하며, 성령을 요청합니다.

     다윗은 17절에서

                                    “바로 내가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바로 내가 이런 악을

                                              저지른 사람 입니다. 백성은 양 떼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안을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 갓이 다윗에게 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으로 올라가서 주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라고 합니다. 18절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다윗은 갓이 전하여 준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그 곳으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왕은 그 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땅을 돌보아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자 재앙이 그칩니다. 제사를 드리자 재앙이 그쳤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배가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에게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는지를 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도 이 모습을 여러번 볼 수 있습니다. 살던 곳을 떠나라 할 때에,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길을 떠났다라고 하며 어떤 토도 달지 않습니다. 아프다네, 시간이 없다네, 땅을 사야하고, 집짓고 장가를 가야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순위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유일한 가치라는 하나님신앙은 좀 위험합니다. 독선과 폭력일적 수도 있고, 전체주의적인 그림자가 보이기도 하지만, 믿음은 그렇게 나아갑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에, 아무도 그 정황을 모르고, 오직 하나님과 아브라함 만이 알고있는 그 긴장감 속에, 여러 가지 이유를 수도 없이 댈 수 있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떡일 수 있겠지만, 아브라함은 사설을 쓰지않고 침묵하며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습니다. 이 사실을 이삭도 모릅니다. 믿음은 이율 배반적이기도 하고, 이해불가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그러나 위험이 감추어져있지 않으면 믿음도 아닙니다. 그 위험은 내 몫이 아니라, 하나님 몫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위험에 노출 되자 하나님이 급하고, 바빠집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목에 칼을 들이대자 하나님이 다급히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이렇게 믿음에 위험이 감추어져 있는데, 그럼에도 이러한 위험스러움이 감추어져 있지 않다면, 줄타기와 같은 아슬함이 없다면 믿음은 가짜이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감추어진 위험스러움 속에서 믿음을 믿음되게 하고, 믿음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신앙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아들 예수의 이해할 수 없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준 사랑은 위험스럽게 몰입하여 욕망의 도구가 될 믿음을 멈추게 합니다. 믿음과 십자가의 죽음이 둘일 수 없습니다

     사무엘서는 제사로 시작이 되어 제사로 마무리를 집니다. 엘가나와 한나가 제사를 드리러 예루살렘에 올라가 기도하는 중에 이스라엘의 건국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장에서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마무리를 짓습니다. 먼저 번제는 헌신과 속죄의 제사입니다. 그래서 희생 제물을 드릴 때에 짐승의 가죽 외에는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불태웁니다. 그 때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어 단 위에서 불사르는데, 내장은 우리의 내면을, 다리는 우리의 외적인 삶을 나타내어 안과 밖을 깨끗이 하여 주께 드리는데, 생명의 상징인 피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드립니다. 가죽이 제외되는 것은 우리들의 삶의 찌꺼기, 껍데기를 다 벗어버리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사회에서 가지고 들어 온 모든 것, 명예, , 권력...그 외의 모든 것들을 다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 사모하는 마음으로 깨끗이 다 태워 드리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그런 자리입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는 예배의 정신은 바뀔 수가 없습니다. 성경읽는 것 하나, 안내, 헌금 담당 하나, 성가대의 한 파트의 일원, 기도에 이르기 까지 그 어느 하나도 다 불살라 태우는, 내 모든, 내게 속한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태워야하는 것이 구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예배의 원형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제사인 화목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게 제물을 차려 예배드리고 나서 그 제물로 예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공동식사를 하면서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용서받으면서 새롭게 살기를 결단하는 예배입니다. 번제가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의 예배라고 한다면, 화목제는 수평적인 예배, 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고 사귀는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배의 두 가지 모습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모습을 통해서도 봅니다. 십자가는 두 개의 나무 기둥으로 되어 있습니다. 수직으로 된 나무 기둥과, 수평으로 된 나무기둥이 교차되어 있는 형틀로서, 예수님이 그 형틀에 달리시어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예배가 하늘을 향해 높이 올라가는 반면에 한 편으로는 수평으로 한 없이 이웃과 피조세계로 뻗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부등켜 안는 사랑으로 십자가에 산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신앙의 디딤돌이 되셨습니다. 우리 교회에 이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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