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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받은 사람들(성령강림후제3주, 2019년 6월30일)

하늘기차 | 2019.06.30 15:51 | 조회 892


                          초청받은 사람들

2019630(성령강림후제3)                                  55:1-5;14:12-16,21;2:19-22

  이사야서의 비죤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넘어 하나님 나라로 확장되어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 대망을 노래합니다. 묵시문학과 달리 심판과 파국이 아니라 새 하늘, 새 땅에대해 노래합니다. 이 비죤은 인간의 논리로는 다가갈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에서부터 오는,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닿은 사람을 통해 고통 받는 인간의 실존에서부터 아름답게 맑은 샘처럼 솟아나 우리의 목마른 영혼을 적셔줍니다. 오늘 말씀 55장은 모든 목마른 사람들, 돈이 없는 사람도 와서 먹고 마시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벌어지는데, 이 잔치는 이사야서를 통해 거듭 외쳐진 고난 받는 종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 땅에 실현되었으며,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말씀은 예수님이 어느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하는 중에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예외없이 안식일 문제로 논란이 생겼습니다. 통상 가축을 물가로 데리고 가는 것은 일이 아니어서 안식일 법에 걸리지 않지만, 물을 담아 소나 가축에게 가져다 먹이는 것은 일이 됩니다. 율법은 이런 소소한 것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발목을 잡습니다. 뜻이 아니라 문자입니다. 수요일 요한 복음강해 때에도 요한복음은 상징과 은유로 가득하다고 하며 말씀을 풀었는데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는지요? 우리 한국교회는 미국 선교사들에의해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전수받아 문자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특히 창세기를 글자 그대로 보려고 하니, 6일 동안 창조되어야 합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대해 인간의 논리와 합리성을 앞세워 자기 주장을 피력합니다. 성경을 과학의 코드로 보려고 합니다. 성서는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놀라운 상상력의 언어여서 그 끝이 어디인지 몰라 믿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진화에대해서 이야기할라 치면 경기를 일으킵니다. 그러니 창세기가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온데 간데 없고, 마치 바리새인들이 소를 물가로 데리고 가서 물을 먹였는지, 아니면 물을 떠다가 먹였는지를 구분하는 식으로 문자가 되니 율법의 정신인 사랑은 변방으로 밀려나, 죄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만 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율법에 메여 죄인의 삶을 살던 이스라엘에게 오셔서 용서와 관용, 사랑과 믿음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안식일에 수종병 환자를 고치셨습니다. 수종병이란 헬라어로 휘드로피코스라고 하는데 휘드로는 물이란 뜻인 것으로 보아 물과 관련된 병인데, 신장이 좋지 않아 수분 분해가 잘되지 않아서 몸이 붓는 병입니다. 하여간 수종병 환자가 회복되어 떠나자 눈에 익숙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이 윗자리를 골라 앉으려 합니다. 아마도 이제 식사가 나오려 했던 것 같은데 먼저 상석을 차지하려는 모습은 인정받고 싶은 우리의 욕망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지라 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들떠있던 제자들에게도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눈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덕담을 해도 부족할텐데, 12절에서는 자기를 초대하여 음식을 차린 바리새인 지도자에게 가까운 가족 친지들 만 부르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부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받은 것을 되 돌려 받기 때문에, 은공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주인이 민망해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 ! 이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라는 실마리를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반복하여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불러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사람들을 채우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찬찬히 보면 주인이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잔치 시간이 되어 종을 보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십시오하고 초대 받은 사람들에게 전하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지를 않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풍습으로는 미리 잔치의 날자를 알리고 초대하여 잔치에 응할지를 확인하여 잔치를 준비하고서 날자가 되면 다시 종들을 보내어 초청을 한다고 합니다. 초청에 응하지 않으면 결례가 되던 때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밭을 샀는데 가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겨릿소 다섯쌍을 샀기 때문에 그 소들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또 결혼을 하여 이 전처럼 혼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주인은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초대받은 자들이 아니라 초대받지 않은 자들을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여전히 자리가 비어있자 큰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면서 주인은 초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

  이야기 중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근데 준비가 되어 초청을 하는데 자기 일에 바뻐서 그 초청에 응하지를 못합니다. 진짜 초대는 준비되어 부를 때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이 바로 이 때입니다. 부르시어 가까이 있을 때에 구하고 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고 약속 하였습니다. 왜 들어주시는가 하면 응답하여 열매 맺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부르심의 이유입니다.

  이사야서와 복음서를 통해 이어지는 부르심이 바울 서신 속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오늘 말씀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 엡12, 13에서 멀리 있음에대한 내용을 쓰고 있습니다.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약속의 언약과 무관한 외인으로서,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14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어떻게 평화인가 하면 유대 와 이방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셨습니다. 이 담은 예루살렘 성전의 이방인, 여인, 유대인, 제사장, 그리고 성소를 가르는 담을 의미하는데, 결국 그 성전은 로마에의해 훼파되었고, 영으로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마음의 성전으로 바뀌었습니다. 15절은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고 합니다. 율법의 문자가 아니라 율법의 정신인 사랑를 십자가에서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17절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18절의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제 외국인도 나그네도 아니며 하나님의 가족인 것입니다.

  부름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각 자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마음의 성전이 세워집니다. 우리 예배당이 지어질 때에 마음의 성전도 지어져야 합니다. 어떻게 마음의 성전을 지어질까요?

  오늘 말씀 이사야, 누가복음 그리고 에베소서를 읽으며 느낀 것은 목마른 사람들, 돈이 없는 사람’,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이라하는데, 에베소서에서는 그리스도, 약속, 하나님에게서 소외된 사람들이라고 하여 교회의 탄생에 따라 영적인 소외, 멀어짐을 집약적으로 말씀합니다. 얼마나 집중적으로 교회를 세워나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역으로 그 영적 교회가 눈에 보이는 세상으로 흩어져 나가야 합니다.

  어제 강남순 교수의 글을 읽었습니다. 서울역에서 그나마 상자로 자신의 공간을 만드는 사람도 있지만 상자가 없어 자신의 몸을 노출시킨체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서 노숙인들에대해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존재라는연민의 글이었습니다. 이들을 보면서 가슴이 저리며, 지독한 무력감에 사로잡힌다고 하면서 수억원대의 파이프 오르간, 휘황찬란한 교회 내부, 외부건물을 가지고 신의 축복을 상품화하는 그 많은 대형 교회들은 이 살아있는 죽은 이들과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을까 라고 하면서 구제활동은 수혜자와 시혜자 사이에 위계를 형성하는 한계가 있어서 현상 유지를 재생할 뿐, 고통의 연민, 그리고 라고 묻고 씨름하는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강남순 교수는 아마도 지금 진행되고 있는 노숙자들의 재활을 위한 활동들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노숙인 대학인 성프란시스대학, 다시서기 종합지원센타, 유은하 사모님의 사물 등 함께하는 일이 많습니다. 하여간 오늘 이 시대에 노숙인들이 보편적인 명사가 아니라, 한 개인의 이름으로 불리우며 살아갈 수 있을 수는 없나, 무엇보다 국가나 종교가 해야 할 책임이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는 글에 마음이 닿았습니다. 이 선생님들(다시서기에서는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이 어떻게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가정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생각하니 이사야를 통해 돌아오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얼마 전에 성가대가 호스피스 병원에 가서 찬양으로 한방 치료로 함께 하였습니다. 또한 자연 기후 생태의 위기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행동함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 보존에 나서며, 우리 지역의 현안들, 그래서 다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역시 문자에 묶여 그리스도 안아니라 종교 안에 머물게 됩니다.

  이제 교회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주님의 뜻을 따라 다른 72인처럼 친히 가려고 하시는 모든 곳, 모든 고을로 둘씩 짝을 지어 세상으로 나아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쫓겨 가는 가슴 벅찬 기쁨을 안고 돌아 와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 부름 받은 사람들의 사랑이 넘치는 고기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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