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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나서, 그리고 따라서(성탄절, 2019년 12월 25일)

하늘기차 | 2019.12.25 11:12 | 조회 738

                       나타나서, 그리고 따라서

20191225(성탄절)                                                                고후7:5-12; 3:4-7

   디도는 사도행전에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몇 몇 바울 서신에서 특히 고린도 후서에서는 디도가 사도 바울을 대신하여 마케도니아와 고린도를 오가며 헌금을 모금하고,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바울에게 전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전도자입니다. 고후13:1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자신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고린도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디도를 고린도로 먼저 보내었는데, 후에 마케도니아에서 고린도교회의 소식에 목 말라 전전긍긍 할 때 디도가 돌아 와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잘 이야기해 줍니다. 그 때의 정황을 고후7:6실의에 빠진 사람을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디도를 돌아오게하셨다고 합니다. 또한 디도가 고린도교회로부터 어떻게 위로를 받았는지 바울에게 이야기 하자, 바울은 디도의 말에 위로를 받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그리워하고, 내게 잘못한 일을 뉘우치고, 또 나를 열렬히 변호한다는 소식을들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4번에 걸쳐 편지를 썼는데 고린도후서가 4번째 편지고, 그 중 지금 바울은 고후 7:8에서 눈물로 쓴 3번째 편지에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번째 편지에대해 이야기하려면 사도행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고후13:2에 고린도에 잠깐 다녀 왔다는 내용의 글이 기록되어 있는데, 2번째 깜짝 방문은 고린도 교회에 특별한 감동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바울에대해 부정적인 생각 만 더 키웠습니다. 바울은 마음이 아펐을 것입니다. 차라리 가지 말 것을, 계획에도 없는 방문을 급박하게 행하고 후회가 밀물 같이 몰려오면서 눈물로 편지를 썼고, 3번째 편지를 바로 디도가 받아 고린도 교회로 가지고 갔고, 후에 마케도니아에서 디도를 만났을 때, 바울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했을 것입니다. 근데 디도를 통해 들리는 소식은 자신을 열렬히 변호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번째 편지의 내용은 고후7:9이하의 내용을 볼 때, 꽤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는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매우 힘들어 했는데, 처음에는 후회하였지만, 지금은 기뻐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픔을 당함으로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0절 말씀은 참 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

                            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 편지 이후에 11절은 고린도 교회가 바뀌었다고 기록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응징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잘못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성 맞춤입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일이 있으면, 그 아픔과 고통에 집착하지 말고, 그 아픔을 하나님께 그대로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히스기야왕 때에 앗시리아의 산헤립 왕이 유대의 대부분의 요쇄들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성만 남은 풍전등화 같은 때에 앗시리아의 장군 랍사게가 하나님을 모독하며 전쟁을 촉발하는 편지를 보내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 왕은 그 편지를 그대로 들고 성전으로 올라가 펼쳐놓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왕하19:19입니다.

주 우리의 하나님, 이제 그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셔서, 세상 의 모든 나라가, 오직 주님만이 홀로 주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여 주 십시오

기다림을 통해 성령님이 내 마음에 감동을 줄 때 까지 내 마음을 먼저 촉발시키지 말고,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쪽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물론 하도 마음이 세상의 것에 이리 저리 빼앗겨서 내 마음이 하나님 뜻에 합한 것인지 익숙하지 않으면, 즉 기도에 깊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가짜 평화에 마음이 빼앗겨 쉽게 생각, 결단, 행동으로 나아가기 십상인데, 평화가 나를 인도할 때 가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행진하고 멈출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고 따라가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저는 이 12절 말씀을 오늘 본문과 디도서의 말씀과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편지한 것은, 남에게 불의를 행한 사람이나

                                 불의를 당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여러분의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환히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라 합니다. 참 복음의 진수를 지금 봅니다. 사도 바울이 눈물로 편지 한 것은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주석가는 불의를 행한 사람이 사도 바울을 배척하려는 사람들이고, 불의를 당한 사람이 바로 바울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한 개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지금 보이는 것은 마음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고린도교회의 사도 바울 일행을 위한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환히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고린도교회 교인들 스스로가 환히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어라고 표현했는가 하면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환히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이 어떤 마음인가 하고 NIV성경을 보았더니 “rather that before God you could see for yourselves how devoted to us you are.”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가 어떻게 우리를 위해 헌신했는지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제가 느낀 감흥하고 틀립니다. ! 이게 헌신이라는 의미가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KJV를 보았더니 역시나입니다. “but that our care for you in the sight of God might appear unto you” 우리에대한 고린도 교회의 마음이 그대로 나타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는 것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편지는 열심히 봉사했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이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도 바울과 하나가 되었는지를 나타내 보여주는 편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타나는 것이지 무엇을 열심히 하는 차원을 뛰어 넘습니다. 나타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면, 성령이 세상일에 매몰된 사람을 돌이켜 그 나타난 것을 보도록 감동을 주시며, 그 감동에 네 마음이 온전히 드려져 하나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돌아서서 그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말과 지식과 생각이 아니라, 깊은 기도와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감동하심에 마음이 움직여 겉으로 보이는 것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대로 성령의 감동을 따라 그대로 나아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생각과 일들로 가득 찰 수가 있습니다. 열심과 수고 만 보이지 은혜, 감사와 용서와 평화와 위로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사도 바울의 마음이며, 디도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디도에대해 아들, 동역자, 형제라 부르며 극구 칭찬을 합니다. 바울의 수족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냥 아들이 아닙니다. 1:4을 보면 같은 믿음을 따라 진실한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 아들이라는 말은 디모데를 부를 때에도 그렇게 부르는데, 단지 친근함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고후 7:15은 디도가 사도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처음 만났을 때 여러분 모두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를 영접하고 순종한 것을회상하고 있다고 전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이 디도에게, 디도의 마음이 고린도 교회에 이어집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연결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누구의 마음인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셨지만 그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였고, 사람의 모양으로 마굿간에 나타나셨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디도서3:4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을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믿음은 나타난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볼 수 있나요?

   5절을 보면 성령으로 새롭게 해 주신다고 하는데, 여기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4절에서 인자하심, 사랑하심을 나타내셨다고 하는데, 5절에서는 그 표현을 자비하심을 따라라고 합니다. 성령이 자의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내 보여주신 그대로를 우리 마음에 감동으로 전하여주고, 일깨우고 인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인자와 사랑하심 따라 다시 태어나 새롭게 해 주셔야 합니다. 동방 박사 3 사람이 그렇게 나타난 별을 따라 그 먼 가나안 땅 베들레헴 시골에 까지 이른 것입니다. 양을 치는 변두리의 목자들이 천사들의 소리를 듣고 따라 나서며 마굿간에 다다른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따르는 모임입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이 기도의 깊은 자리에 머물러 있어 하나님과의 내적 교감의 평화가 밝게 드러나야 하며, 촌철 살인의, 사람 속을 꽤뚫어 혼과 영을 갈라놓으며, 골수와 관절을 찔러 쪼개기 까지하는 말씀의 선명함이 말씀묵상을 통해 언행에 살아있어 좌우로 치우침이 없으며, 먼저 믿은자들이 나타내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인자함과 사랑을 두렵고 떨림으로 따르며, 사랑의 수고, 믿음의 행위, 소망의 기다림을 나타내며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렇게 7절 말씀에서처럼 영원한 생명의 소망, 그 다음 접속어가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따라서 믿음의 상속자가 됩니다. 세상 가치의 상속자가 아닙니다. 전혀 다른 신비로운 인자와 사랑하심의 숨결이 띠를 띠워 교회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됩니다. 고린도 교회가 디도를, 디도가 사도 바울을, 그리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위로를 나누듯이 위로가 순환이 됩니다. 그러면 8절 말씀 처럼 선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울려 퍼지지 않겠나 싶습니다. 나타난 인자와 사랑하심을 따르며 위로가 되는 성탄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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