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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속되어야 한다(사순절네번째주, 제4회 탈핵주일)

하늘기차 | 2016.03.06 17:34 | 조회 1511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사순절네번째주(제4회 탈핵주일)                                                                                    롬 8:22

   김형률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은 원폭피해2세인데, 어머니가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당했고, 그것 때문에 평생 ‘면역글로블린결핍증’이라는 질병에 시달립니다. 세균감염에대한 면역체계가 마치 신생아처럼 약화되어 질병을 달고 삽니다. 그는 일반 평범한 사람들처럼 직장, 결혼, 가정을 이루고 싶어 컴퓨터를 전공합니다. 간신히 취직을 해도, 늘 고열과 기침으로 중도에 회사를 나올 수 밖에 없었는데, 마침 재택근무가 가능한 웹디자인 전문학원에 들어가 졸업 작품에 매진하다가 그만 페렴이 다시 재발하여 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병원에 실려가게 됩니다. 그것이 2001년 5월, 그 때서야 김형률씨는 자신이 가졌던 소박한 평범한 삶의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한계에 부딪치고 맙니다. 그에게는 이제 아무 것도 없고,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병상에 누워 뒤척이며, ‘나는 누구인가?’를 되묻는 생활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게 됩니다. 자기는 원폭2세라는 것, 그것도 건강한 원폭2세가 아니라, 평생, 아니 태어날 때부터 병을 안고 태어난 원폭2세라는 자기 정체성을 봅니다.

     형률씨는 그 때부터 자신의 병에대해, 이 병이 원폭에서 비롯된, 1)유전적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리고 그러면 2)원폭투하는 왜 일어났는지, 3)왜 우리 어머니는 히로시마 근처의 농촌에서 살게 되었는지? 4)왜 한국피해자들은 일본 사람들처럼 치료, 보호, 보상을 받지 못하고 방치된체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원폭피해가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 민족, 식민지, 가난, 소외, 편견 등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러면서 형률씨는 2002년 3월 22일 스스로를 원폭피해2세임을 밝히며 커밍 아웃을 합니다. 커밍아웃이 참 어려운 것은 원폭피해자 가정이 시달리게 될 사회적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원폭2세이지만 건강하여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잘 사는 사람들은 원폭2세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1세들도 지금 일본정부와 비록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했을 때 체결한 청구권 협정으로 국가적 보상은 끝났다고 주장하였지만, 그럼에도 개별적으로 일본정부를 대상으로 재판을 걸고 승소 까지 하면서 1세를 위한 피해보상에 근접해 가고 있는데, 느닷없이 2세피폭환우들의 문제가 대두되면 지금 까지 진행되던 협상도 다 유야무야 될 것 같아 김형률씨의 커밍 아웃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그는 스스로 계속 원폭피해자의 복지와 치료와 일본 정부와 미국정부의 공개사과 등을 위한 활동을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그의 건강은 더 악화되어 9월에 부산대병원에서 검진한 결과는 폐기능이 정상인의 20%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 후 10월17일 저녁에는 피를 토하는 것이 그치지 않아, 너무 많이 토하여 소스라치게 놀라 병원에 재입원을 합니다. 그러면서 11월에 ‘김형률을 지원하는 모임’이 생기고, 그 모임이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지원하는 모임’이 결성됩니다.

     2003년 8월 4일(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틀 전날) 담당의사 만류를 뿌리치고 ‘외출 허가’를 받아 부친과 함께 서울로 향해 한국 원폭2세 환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설립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고 이어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합니다. 2004년 9월 1일에는 드디어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첫 번째 공식 모임이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열립니다. 현 한정순 회장은 당시 김형률에 대해 “작고 마른 체구로 무더위 속에 점퍼를 입고 있었으며 목에 수건을 감고 기침을 계속하면서 준비한 자료를 나눠주고 힘들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고 진술합니다. 합천에 원폭피해자들이 모여 사는 이유는 합천은 유난히 독립운동과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던 지역이어서, 일본의 탄압과 강제 징용과 물자 징발이 심하여 농지도 비좁은 지역에서 정말 살 수 없는 상황에 내 몰려 역으로 일본으로 살기 위해 떠났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히로시마로 가서 살게 되었는가 하면 히로시마는 청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 태평양전쟁에 이르기 까지 일본의 군사대국화 과정에 필요한 모든 군수물자를 만들어 내는 병참기지여서, 도로를 내고, 항만을 건설하고, 공장을 세우는 일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래서 값싼 조선의 노동력이 이 곳으로 몰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합천이 고향인 조선인들은 히로시마에서 살다가 원자폭탄에 피폭을 당하게 됩니다. 하여간 김형률은 2003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면역글로불린 제제(製劑) 주사를 맞았는데, 2004년 9월 9일 그 주사 직전에 과잉반응을 억제하는 주사를 맞는 순간 쇼크를 일으키고 혈약이 급격하게 떨어져 쓰러지는 바람에 부산대학병원에 입원했다가 보름 정도 지나 퇴원합니다. 2004년 12월에는 크리스마스 저녁 갑자기 객혈이 심해졌고 연말에는 기관지동맥 수술을 받게 됩니다. 2005년 3월 31일 김형률은 서울 활동을 위해 경기도 군포시에 지인이 마련한 숙소에 머물며 4월 11일부터 대략 50일 동안 아버지와 함께 ‘원폭피해자특별법’ 제정을 위해 활동을 벌입니다. 5월 초순 이래 20일 남짓은 지독한 강행군이었다. 자동차, 기차, 비행기로 이동하는 동분서주의 나날들이었으며, 설명회에 공청회에 발표 등 육체적 정신적으로 그의 피로는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한 뒤 부산의 집으로 돌아와 5일째 되는 아침 김형률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에서 함께 동행하며 활동하였던 아오야기 준이치님은 2005년 5월24일 나리타공항에서 헤어질 때 수척한 모습으로 자신을 향해 웃음 짓던 김형률의 모습이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이 됐다고 추억하면서, 당시 그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던 한국 사회는 물론, 일본의 아오야기도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아오야기씨는 “형률씨의 글을 일본 사회에 꼭 소개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고, 우여곡절을 거쳐 9년 만에 <피폭자 차별을 넘어 살아간다-한국 피폭자 2세 김형률>을 출판하게 됩니다.

     김형률씨를 도왔던 건강세상네트워크의 강주성님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김형률 평전 추천사의 제목을 ‘그가 바로 평화였다’라고 씁니다. 그는 불 같았다고 회고합니다. 중학생 보다도 작은 왜소한 몸으로 늘 숨이 멎을 듯 연방 기침을 하면서 원폭2세환우들의 삶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그는 당사자로서 자신들의 이익 만을 위한 이기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웹디자이너가 되려다가 포기한체 느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따라가며, 이 병이 원폭에서 비롯된, 유전적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리고 그러면 그 원폭투하는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왜 우리 어머니는 히로시마 근처의 농촌에서 살게 되었는지? 왜 한국피해자들은 일본 사람들처럼 치료, 보호, 보상을 받지 못하고 방치된체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등을 알게되면서 조금씩 당사자로서 만이 아니라, 원폭1세, 그리고 건강한 원폭2세의 자기중심적인 한계를 지적하며, 사회운동의 ‘사’자도 모르던 사람이 소외된사람들의 인권과 전쟁, 민족, 식민지, 가난, 소외, 편견을 바라보며 평화, 반전의 문제를 인식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해갑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성주님은 작은 예수를 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마을의 목수로 살다가 요한에게 세레를 받고, 광야에서 40일을 기도하고 나서 3년 공생애를 시작하는데, 김형률씨도 스스로 컴잉아웃하며 자기 정체성을 밝히고 꼭 3년 동안 그야말로 공적인 삶을 시작하는데, 그 3년의 모습에대해 강주성님은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난 몰랐었다. 작은 키에 병든 그가 그인지 몰랐었다. 죽을 것처럼 연신 기침을 했던 그가 바로 그인지 몰랐었다. 난 그가 전태일인지 몰랐었다. 그가 예수였는지 난 정말 몰랐었다. 내가 그를 안 것은 그가 이 세상을 떠난 후였다. 죽어도 그의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고 이제야 그가 이 세상의 평화인 것을 알았다. 이 책이 이 세상의 모든 편견과 차별에 저항하고 전쟁에 반대하며 평화를 만들어나가는 또 다른 김형률이 되길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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