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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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에 있었던 일(사순절세번째주, 2016년2월28일)

하늘기차 | 2016.02.28 16:50 | 조회 1640

 

                   화요일에 있었던 일

사순절세번째주                                                                                         막12:28-34;41-44

     화요일 이른 아침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벼르고 있던 종교지도자들이 다가와서 당신이 무슨 권한을 가지고 성전에서 그렇게 했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받으시고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는지, 아니면 사람에게서 왔는지’ 답 하면 자기도 답 해 주겠다고 합니다. 당시 세례는 유대교에서는 없는 의식이었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의 의식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요단강에서 요한이 백성들에게 세례를 주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할 때에 예루살렘에서는 못 마땅해 했지만,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 하여 어찌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는 무슨 권한을 가지고 전 날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 쫓았을까요? 예수님은 무슨 권한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묻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자기 정체성에 확고히 서 있는 분이지 무슨 권위를 내세우는 분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중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나에대해 무어라고 말 하느냐고 물으셨고, 그 다음에는 늘 함께 했던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그 물음을 겟세마네에서 밤 새 물으셨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러한 면에서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찿는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나는 생명의 떡,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이요, 생명, 길이요, 진리요, 생명, 참 포도나무, ,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삶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사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은 니고데모가 대화 중에 자꾸 하늘에대해 이야기 하며 신앙이 종교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자, 인자는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서 하늘로 올라 간 사람은 인자 밖에 없다고 하시며 종교적 말놀이를 멈추게 합니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를 보고 더 이상 하늘 이야기 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포도나무 비유에서는 자신과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면서 포도나무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라 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은 한 번도 이 세상에서 자기의 뜻을 관철시킨 적이 없다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이 세상에 왔으며 못 믿을 것 같으면 내가 그동한 행동한 것을 보라고 합니다. 주님의 자기 정체성은 어릴 때부터 철저하였습니다. 12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도 예수를 잊어버린 줄 알고 이리 저리 수소문 하다가 예루살렘 성전에 앉아 있는 예수를 보고 한 마디 하자,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주님의 권위는, 자기 정체성으로부터 빛처럼 뿜어져 나오는데 사람들이 감당을 못합니다. 예수는 하늘의 지혜로 세상을 봅니다. 하늘의 지혜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자기 낮춤, 자기 겸손입니다. 겸손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에게 권한을 물어보았던 사람들의 권한은 어디에서 오나요?

     화요일에는 여러 가지 말씀과 행동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고난주간 중에 가장 많은 일들을 기록한 날입니다. 특히 막13장은 계시록과 같은 묵시적 말씀입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다가오는 우주적 대 파국, 로마의 침략으로 인한 예루살렘의 멸망, 그리고 구약에서 말씀하는 주의 날의 심판이 뒤 섞이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마지막 때에대한 이야기를 듣자, 어리둥절하여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성전을 나오시며 제자들이 성전의 위용에 입 다물 줄 모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 예수님은 이 성전이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훼파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몸이 달았습니다. 13:4에 보면 언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일어나기 전에 어떤 징후가 있는지 말씀해 달라고 합니다. 그 마음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곧 예수님께서 왕권을 탈환하여 그동안의 모든 어렵고 힘들었던 일들을 뒤로 하고 다윗왕권을 회복해야하는데, 이렇게 못 알아들을 파국에대해 이야기하니 오금이 저립니다. 예수님은 13:21에서도 ‘보아라,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다. 보아라, 그리스도가 저기에 있다’하더라도 믿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대해 말씀하실 때 언제 오는지, 어디에 있는지에대해 이야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산과 들과 그리고 이스라엘의 주된 일터였던 포도원, 그리고 갈릴리 바닷가 어부들의 고기잡이, 식물들이 자라는 모습, 새들의 노래 소리와 같은 실제 삶의 이야기들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셨는데, 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하찮게 여겼는지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모두 잿밥과 자기 벽 쌓고 자기 이기심을 키웁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고 행하신 것이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어디에 있느냐? 언제 오느냐? 라는 질문은 관심없는 사람들의 질문입니다. 정말 관심이 있으면 그렇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화요일에 매우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이 권위에대해 질문하고, 서로 어울리지 않던 헤롯당원들과 바리새인들이 작당을 하여 세금에대해 질문을 하고, 또 사두개인들 까지 가세하여 부활에대해 올무를 씌우려고 던진 질문에 오히려 그들이 덫에 걸립니다. 이런 와중에도 성경은 두 사람에대해 관심을 귀울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과부요, 또 한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이 바리새인은 12:28에서 예수님이 대답을 잘 하는 것을 보고 진지하게 질문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예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을 읽으시고 진지하게 첫째는 한 분이신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아주 명쾌하게 답하십니다. 그러자 이 바리새인이 추임새를 올립니다.

“옳거니, 한 분 하나님 외에는 다른 분이 없습니다” 이 한 분이라는 문구를 단지 1개의 하나로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온 우주와 역사에 편만해 있는 하나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물활론으로 보면 또 골치 아퍼집니다. 온 우주와 역사와 더불어 하나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이 남 달리 진지하게 듣고 답하는 모습을 보고 슬기롭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음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하였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에대해서는 슬기롭게 대답하시는 것을 칭찬하시는데, 거기 까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바리새인의 것이 아니라 합니다. 그냥 가깝다고 만 하십니다. 이 전에도 어느 율법사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면서 자기가 10계명을 온전히 지킨다고 하며, 자기 의를 드러내다가, 예수님이 네가 가진 것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 나라는, 영생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문명과 물질의 재화를 다 합하여도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사가 자기 의를 과시하자 주님께서 쓴 소리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재산을 다 드려도 가지 못할 뿐 아니라, 이 율법사는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저으며 근신하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지금 이 바리새인도 칭찬은 들었지만 가까이 와 있지 들어가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혜나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머리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고, 언제 오나요?하고 관심없는 질문 하지 말고 말입니다. 율법사가 영생에대해 질문하고 고개를 저으며 돌아가자, 제자들이 ‘어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하니, 와! 저렇게 율법을 잘 준수하는 사람도 영생을 얻지 못하는데 그럼 우리 같은 사람은 아무도 천국에 못 가겠네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나요? 그렇게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이며, 이야기를 나누며, 권면하며, 칭찬하시는 중에 예수님이 마침 성전 앞에 있는 헌금함에 많은 사람들이 과시를 하며 헌금하는 중에 한 여인이 헌금하는 것이 눈에 띠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개를 드렸습니다.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

     모처럼 예수님의 얼굴이 활짝 피었습니다. 적들에게 둘러쌓여 변론하느라 쉴틈이 없었던 예수님의 마음 편하게 한 것은 습관적인, 아니면 입과 머리로 하는 종교생활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인 화요일 이른 아침에 제자들이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놀라자 예수님은 그 사건을 통해 바로 믿음에대해 교훈하셨는데, 믿음은 산을 번쩍 들어 바다에 빠지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산을 번쩍들어 바다에 빠뜨리지 않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모래성 쌓고 부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 안의 물질숭배, 내 안의 우상을 모두 뽑아 바다에 빠뜨리려면 믿음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겨자씨 만합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에 대해 눅17에서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어느 양을 치는 종이 열심히 일하고 돌아 왔을 때, 주인이 수고했다 이제 식탁에 앉으라고 할 주인이 어디있는가 라고 하면서 내 식탁을 차리고 내가 먹는 동안 시중을 든 다음에나(여기서도 그냥 시중을 드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동이고 라고 합니다)먹고 마시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종이 명령한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고마워 하겠느냐고 하면서 17:10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고 합니다. 요즈음 이러는 고용주가 어디 있습니까? 노동법에 걸릴 겁니다. 그러나 그 당시 하인의 모습을 통해 믿음이 어떠한지를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모든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한 것은 바로 모든 주권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제발 말로 하지 말고, 머리로 하지 말고, 내 삶이 모두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일상 속에 드러내는 것, 그러니까 산을 뽑아 내는, 그러니까 내 머리나, 내 말의 논리가 아니라 이 과부처럼 그렇게 산을 뽑아버려야 한다는 것을 기나긴 논쟁 끝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렇게 신앙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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