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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있었던 일(사순절두번째주,2016년2월21일)

하늘기차 | 2016.02.21 14:07 | 조회 1802


                   월요일에 있었던 일

사순절두번째주                                                                                                    막11:12-19

     오늘 말씀에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는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성전에서 예수님이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낸 사건입니다. 두 사건 모두 그동안의 예수님의 행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였을까요? 더군다나 예수님이 시장하시다고 아무 말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그 씨를 마르게 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하루 전 날 막11:11에 보면 예수님은 성전을 둘러보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때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오늘 말씀처럼 그 전날에도 성전 가장 외곽의 이방인의 뜰에서는 멀리서 찿아 온 순례객들에게 필요한 물건들, 간단한 먹거리 등을 파는일, 성전제사에 필요한 향과 물건들, 비둘기 등을 사고 팔며 흥정하며, 또 돈을 바꾸는 일들로 번잡하였을 것입니다. 또 바쁘게 먼지 풀풀 날리며 성전의 이 쪽에서 성전의 저 쪽을 급히 가로질러 가는 모습들, 그야말로 시장바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유월절을 기념하는 기간에 말입니다. 사실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신14:24에 보면 허락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로마의 총독에 의해 임명된 정통성이 없는 대제사장 안나스와 그 가족들이 모든 이권을 가지고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지는 상행위를 독점하여 상납과 부당 이득과, 불평등한 검열을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성전의 부를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의 유대 고대사라는 책에서 ‘안나스의 장터’라는 말을 쓰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 가문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은 사위 가야바를 위시해서 거의 40여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를 지배해 왔는데, 그 기간 동안에 스데반 집사,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의 형제 야고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모두 안나스 가문의 대제사장들에게 처형당하였습니다. 또 헤롯은 그 당시 자신의 모호한 정통성을 인정받으려고 로마 황제에게 헌정하기 위해 도시, 항만, 도로 건설등을 통해 백성들을 노동과 세금을 착취하던 때였습니다. 이 모든 기득권들이 로마의 총독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유지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일본의 신학자요, 뛰어난 주석가인 구로자끼는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가난한 자들과 병든자들을 돌보며, 고치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터인데, 왜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을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그렇게 백성들이 병들고, 감옥에 갇히고, 굶주리고 하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에서부터 오는지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불법과 부정으로, 변측적으로 몰염치하게 지배하는 예루살렘의 기득권의 부정한 카르텔을 폭로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유대의 모든 것을 가진 교권과 정면으로 부딪힘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의 참 모습을 드러내셨다고 합니다. 거친 폭력의 행진을 평화의 발걸음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구로자끼는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평상시와는 다른 두 가지 사건이 모두 예수님의 분노에서 비롯되었다고 풀어냅니다.

     원래 무화과,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무화과와 포도나무는 용도가 목재가 아니라 열매에 있는데, 열매가 없자 저주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열매 없음. 제사장의 나라로서의 하나님과의 약속의 성취도 없고, 믿음의 고백을 따르는 행함도 없는 이스라엘에대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세기의 석학 버트란트 럿셀은 이 대목에서 윤리와 도덕에 있어서 어느 누구 보다도 뛰어난 성품의 소유자여야 할 예수님이 자제하지 못하고 흥분하여 무화과를 저주한 비합리적인 예수님의 모습에 실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로자끼는 무화과 저주의 이야기를 이리저리 돌려 해석할 필요없다고 하면서 수백년 동안에 걸쳐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시장바닥으로 만들어 버린,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역사를 왜곡해 버린 현장을 둘러보시고, 다음날 아침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잎이 푸르면 당연히 열매가 있어야하는데,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순간적으로 예루살렘성전이 떠올라 무화과나무에다가 마음 속에 새긴 격한 분노를 가감없이 쏟아 낸 예수님의 모습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무화과 나무는 3월초순 작은 잎이 나오고 작은 열매들이 열립니다. 그 열매가 ‘파게’라고 하며 3월 하순쯤 자라는데, 그때 잎사귀들은 연초록으로 퍼지지만 크기는 손바닥 만한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파게’는 진정한 의미의 무화과 열매라고 볼수 없고, 4-5월경 ‘파게’는 다 떨어지고 6주 정도 지나서 새롭게 ‘테헤나’라고 하는 진짜 무화과 열매가 열립니다. 본문말씀에 예수님께서 멀리서 보고 주목하신 한 무화과 나무는 3-4월경 잎이 막 돋는 상태의 무화과 나무인데, 여느 무화과와는 달리 잎이 꽤 무성하였던 것입니다. 잎이 무성하다는 것은 열매가 맺혔다는 것을 뜻하는데, 가서 보니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합니다. 웃자란 것이지요. 당시 성전의 모습이었고, 오늘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가 열매 없이 웃자랐습니다. 오늘 한국사회가 그렇습니다. 성숙하지 못합니다. 배려, 관용, 용서가 결여된 사회입니다. 교회는 그러지 말아야하는데, 교회도 똑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를 일깨웁니다. 우리 고기교회는 무슨 열매가 맺혀있나요? 주님이 고기교회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찿아오셔서, 열매를 찿으시면 어떨까요? 흡족하게 드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아! 고기교회무화과 나무는 아직 잎이 피어나지 않았나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냥 지나치실까요?

     이스라엘에도 보릿고개가 있어 파종기인 12월에서 4월 까지는 특별하게 먹을거리가 없습니다. 부자들이야 창고에 쌓아놓은 것을 먹지만, 예수님 당시 90%이상이었던 당시 가난한 소작농들이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는 너무 제한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가난한 소작농들의 유일한 먹을거리가 파게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소중하였겠습니까? 예수님을 쫓느라 집 떠난 사람들에게 파게는 귀한 요기거리 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잎이 무성한 것을 보고 무화과 철은 아니었지만 얼마나 기대감을 가지고 무화과나무 곁으로 다가 가셨겠습니까? 아니 무화과 철이 아니기 때문에 파게는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절실하겠습니까? 근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잎만 푸르게 무성하였습니다.

     무화과 철이 아닌데 잎이 벌써 무성하다는 것은 남들 보다 먼저 자란 것입니다. 욕심, 욕망인 것이지요. 어쨋든 잎이 무성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으니 당연히 ‘파게’ 열매가 열려야 합니다. 그런데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자녀들을 공부, 공부하며, 스팩을 쌓게하고, 남 보다 먼저 조기교육해야 하고, 누구 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선점해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을텐데, 그런데 살 수 있다는 것 보다는 경제적으로 남들보다 더 잘 살려고 그렇게 먼저 모든 것을 선점하고, 독식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사람들의 인격이나, 사회적 양심을 모두 뒤로합니다. 이웃에대한 배려는 조금도 없습니다. 성격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웃자란 무화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매없는 무화과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제 보아두었던 대로 작심을 하고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성전의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 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두 말씀을 인용합니다. 하나는 사56:7의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과 렘7:11의 ‘도둑들이 숨는 곳’, 즉 ‘강도의 소굴’입니다. 오늘 말씀에 장사를 하던 장소는 바로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보여준 비죤대로 이방인의 뜰에서는 이방인들을 통해 경건하게 예배드려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뜰을 장사치들이 점령함으로써 만민이 예배하는 자리에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에게 드려야할 거룩한 예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뜰과 제사장의 뜰을 넘어 성소와 지성소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드리지만 이방인들은 완전히 무시되었고, 이방인들을 위해 아무런 배려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불공평함을 본 것인데, 그 불공평함이 어디에서부터 유래한 것인가 하면, 강도들 때문이었습니다. 문맥상 무심코 장사치들과 강도를 동일시 할 수도 있지만, 강도들은 장사치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장사치들을 관리하고 운용하여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챙기는 종교지도자들과 관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성전 내에서 뿐만아니라, 성전 밖에서 렘7장을 보면 도둑질과 음행과 우상숭배와 거짓과 온갖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짓거리를 하던 사람이 성전에 와서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라고 속일 때, 그것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이미 예루살렘 성전은 성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성전이 아니라고 할까요?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리며, 피를 토하며 끊임없이 선포하였지만, 바로 하나님의 공의가 당시의 기득권자들, 종교지도자들이 로마의 총독과 야합하여 백성들을 굶주리고, 병들고, 감옥에 갖히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불법에대해 성경은 예언자들을 통해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아모스는 암5:24에서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

                   처럼 흐르게 하여라.”고 합니다. 호세아 에언자는 호6:6-9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

                   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그런데 이 백

                   성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나를 배반하였다. 길르앗은 폭력배들

                   의 성읍이다. 발자국마다 핏자국이 뚜렷하다. 강도 떼가 숨어서 사

                   람을 기다리듯, 제사장 무리가 세겜으로 가는 길목에 숨었다가 사람

                   들을 살해하니, 차마 못할 죄를 지었다.”라고 합니다.

     성전을 깨끗게 하신 예수님의 행위는 어찌보면 성전, 제사, 율법이 아니라, 그러한 종교의 틀을 이용해 자신들의 욕망을 제도화 조직화 하여 카르텔을 형성하는 소위 강도들에대한 불의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레미야가 도적이라고 한 말을 강도로 바꾸어 인용할 정도로 보다 단호하게 말씀하셨는데, 주님의 말씀을 듣는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말을 훨신 더 잘 알아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길이 험한 바위 투성이의 산 길이어서 사람들이 종종 강도를 만나 생명과 재산을 빼앗기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강도들은 바위굴속에 숨어있다가 불현듯 튀어나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다 빼앗았는데, 예수님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사람들은 보다 절실하게 와 닿았을 것입니다. ‘아! 진짜 강도는 이 사람들이구나!’ 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바로 그렇게 세상에서 온갖 불법과 편법을 자행하며 부정을 일삼는 사람들의 소굴, 즉 피하는 아지트가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일반 성도들을 포함해서 지도층의 기독인들, 얼마 전에, 아니 지금도 계속되는 지도자들의 숨은 이력들을 보면 온갖 편법과 불법으로 점철되어 부끄럽습니다. 병역기피, 이중국적, 부동산 투기,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말로 다 할 수 없는 거짓과 폭력들 속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키워가면서 헬조선을 만들면서, 주일에는, 교회이든지 성당이든지 아니 어떤 종교단체에 속해 있든지 그곳에 안전하게 자신들의 신을 부르며 그 종교 안에 숨어 위로를 받으며 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거짓종교행위에 분노하여 평화의 발걸음으로 나아가 정면으로  부딪혀 그 실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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