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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Ⅲ(주현절후제3주, 2016년1월24일)

하늘기차 | 2016.01.24 13:48 | 조회 1832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Ⅲ

주현절후제3주                                                                                                      사42:1-9

   오늘 말씀에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회의를 합니다. 쟁점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예루살렘에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친 동생인 야고보가 일어나서 사도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어떻게 부르셔서 택하셨는지에대해 증언하는데, 그 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처음으로 한 백성을 택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을 통해 하십니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처음 사람을 만날 때 명함을 주고 받습니다. 명함에을 보면 그 사람의 이력과 현재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기독인에게 명함이 있다면, 별칭으로 ‘하나님이름으로 불리어지는 사람’이라 쓰여져야 하지 않나 십은데, 기독인이라는 별명은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바울을 만나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심히 가르치면서 생겨납니다. 처음에 예수의 제자들은 나사렛당이라 불리었습니다. 예수가 나사렛출신이어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그렇게 조롱하며 부른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지면서 그 별명이 그리스도인으로 바뀝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에 ‘무엇에 속하다’라는 접미사 anos가 붙어 Christianos 즉, 그리스도에게 종속된 자라는 의미로 비방하며, 멸시하는 이름으로 불리어 졌습니다. 벧전4:16에도 이 말이 나오는데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

                     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당시 고난과 박해, 멸시의 대명사였습니다. 유대교의 한 종파로 알려진 이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주라고 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하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허황된 사람들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비아냥거림을 받았다는 것은 그 당시 마이너리티로서 기존의 어느 종교적, 사회적 질서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기독교는 극심한 박해를 받아오다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공인되었고.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던 사람들이 그리스도교가 된 것입니다. 제도화 되며 종교화 되어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교회는 그 과정을 통해 유대교처럼 교회 밖을 이방으로 부르며 유대교의 종교적 전철을 밟아왔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는 끊임없이 성도들과 교회의 신앙고백을 통해 드러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이 시대, 여전히 분단된 우리나라, 민족 뿐 아니라 전 지구적인 생태 기후적 위기 속에 교회는 그 존재감을 잃어갑니다. 그러한 교회 신앙의 흐름 속에 저는 늘 교회신앙고백의 내용과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배, 성경해석, 신학, 기도. . . 교회 내 뿐 아니라, 특히 세상에대한 관점,,,등 그러나 아직은 이 정도입니다. 바뀌어야한다는 것은 분명한데, 교회와 신앙의 정체성이 어떻게 세워져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동기를 찿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 같이 고민해 보아야할 제목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교회 신앙의 변화, 패러다임의 변화의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소박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기뻐할 때는 매우 자의적이고, 이기적이며, 집단적인 체면에 빠지기 십상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교회라고 하면 그 때부터 자기를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자기 정체성을 찿기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나에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위로의 말씀이 되고, 지혜와 힘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속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언젠가 예수회에 속한 리차드 로어 신부의 ‘불멸의 다이아몬드’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부활이야 말로 진짜 자기의 모습인데, 처음 부활을 만난 사람들 모두가 부활에 다가서기를 두려워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가짜 자기에 매여있어 진짜 자기를 만나려 하지 않기 때문이며, 가짜 자기에 매이는 이유는 세속적인 가치와 문화에 매여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판단하며 에고 중심적인 이분법적인 사고 방식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바다의 썰물이 밀려 올 때 미쳐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바닷물에 빠져드는 것처럼 중독 문화에 빠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기독교에 중독되어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영적 어두움과 답답한 종교적 문화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동안의 패러다임은 바뀌어야할 것입니다.

     되도 아닌 것 같지만, 저는 그 실마리를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에게서 찿아 봅니다. 왜냐하면 기뻐한다는 말에는 희년의 의미가 듬뿍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은 기독교의 근원이기도 한데, 바로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에 그 근원이 있습니다. 자유와 해방의 기쁨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이 기쁨은 사58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으로 드러납니다. ‘풀어주고, 놓아주고, 꺽어버리고, 나누어주고, 맞아들이고, 입혀주고, 숨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요? 사58:6-7 이후에 그렇게 행하는 사람들에대한 축복은 개인이 스스로 감당하기에 벅찰 정도로 과하고, 그러나 마땅히 누려야 할 주의 자녀들의 풍요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빛 같으며,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며, 성도와 교회의 의로움이 드러날 것이며, 마치 물 댄 동산 같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우뚝 설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61장 1-3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레25장을 해석합니다. ‘소식을 전하고, 싸매어 주고, 선포하고, 선언하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가버나움 회당에서 읽은 말씀입니다. 또한 사도행전에서 이 비죤이 유대교를 넘어 이방 사람에게 선포되고, 증언되는 것을 봅니다.

     희년은 글자 그대로 기쁨의 해입니다. 올 해가 우리 고기교회와 성도들에게 기쁨의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기쁨을 찬찬히 보면 만남의 기쁨이 있습니다. 변화의 기쁨도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서는 기쁨을 이야기 합니다. 그 기쁨을 한 마디로 하면 회복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에대해 예수님은 눅15장에서 3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잃은 양을 찿는 이야기, 잃어버린 은 전 한 잎, 그리고 회복의 결정판은 잃어버린 아들이 다시 돌아오는 기쁨입니다. 레25장은 희년에 모든 것들이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사람은 물론, 노예, 땅, 가축에 이르기 까지 원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본래의 자기 모습을 찿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모두 변화하고, 돌아섭니다. 그러기 위해 떠납니다. 단지 나 혼자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사회, 나라와 민족, 인류와 온 천지 만물의 회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전에는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여 나와 그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하며, 내가 잘 믿어야지 하는데 유혹이고 집착입니다. 이제는 그 보는 시각이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특히 이 시대의 기후 생태적인 지구적 멸망의 위기 속에 어떻게 인류가 돌아설 것인가에대해 기독교는 분명한 전거가 있고, 또 복음의 핵심이 이 희년이라는 것을 알아 우리의 일상 속에 드러내며 살아내야 합니다. 신앙으로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기뻐하는 사람을 택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라고 합니다. 겔3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이유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멸망하여 흩어져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지만, 내가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회복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가게 할 것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동인은 하나님 스스로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나는 스스로 있는자’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신9:5을 보면 당신들이 마음이 착하고 바르기 때문에 당신들이 들어가서 그들의 땅을 차지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약속은 이름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하난미의 이름을 걸고 약속을 한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온 우주와 역사와 피조된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조화로운 하나입니다. 이 조화가 어긋나고 더럽혀졌습니다. 회복되어야하는데 하나님이 회복하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택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을 통해 회복하십니다.

     다윗이 그러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우는 전쟁터에 형들에게 먹을 것과 옷가지를 전해주러 왔다가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직접 골리앗 앞에 섭니다. 그 때 다윗이 외칩니다.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너를 나의 손에 넘겨 주실 터이니, 내가 오늘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사람의 주검을 모조리 공중의 새와 땅의 들

                 짐승에게 밥으로 주어서, 온 세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고 외칩니다. 하나님이 기뻐할 만 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며 함께하십니다.

   빌3:7에서 사도바울은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8절에서는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

                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무엇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동안의 자기가 가지고 누렸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무엇을 얻는 줄 압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도 그렇고, 아브라함도 그렇고 다 잃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 믿고 깡통을 차는 것입니다.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만난 삭케오도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

               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다고 회개를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조심스럽게 해석되어야 할 것 같은데, 모든 것이라 하니, 사람들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모든 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은 바울이 평생을 끌어 안고 살아온 바울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전부였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율법에서 오는 의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한다고 고백을 합니다. 삶의 가치관이 바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바울에게서 돌아서는 회복과 희년의 기쁨을 봅니다. 삶의 가치관이 예수 이름으로 바뀝니다. 명함에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여러분 명함에 몇 가지 프로필이 적혀있나요?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그 프로필을 다 지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라합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조롱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앞 세우고 사는 사람은 안 팎으로 조롱당하기 싶상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놓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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