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Ⅰ(주현절후첫번째주일, 2015년1월10일)

하늘기차 | 2016.01.10 14:34 | 조회 1837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

주현절후제1주                                                                                                          사42:1-9

     이스라엘민족은 유대교라는 종교적 틀에 고집스럽게 병적으로 집착하며, 욕망에 사로잡혀, 끝없이 희생제사를 드리면서도 여전히 죄의 틀을 견고하게 세워 나가다가 결국 패망국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목이 곧은, 염소와 같은 이스라엘을 대속하기 위한 대안이 무엇인가 라고 물으며 52장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운 섭리와 계획은 너무 새로워 아무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며,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사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우리가 포로된 것은 바벨론의 신에게 하나님이 패하였기 때문이라는 무력감, 자괴감이 널리 만연하였을 때, 이 패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이사야의 선언은 이스라엘을 큰 충격에 빠뜨립니다. 인간에게서 온 것이거나 악마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다윗왕권의 계보를 따라 기름부음 받은 자를 통해 다윗왕권을 회복할 것이라고 바라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고레스라는 이방인 왕을 통해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이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왕들의 군사적, 경제적, 전치외교적 자부심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지고, 그 우상에 찌든, 오만한 민족주의는 완전히 훼파됩니다. 그러니 이 치욕과 굴욕에서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입니다.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이 단지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와 우주로 향하여 열려있다는 것에대한 당위성을 공의로운 하나님, 공의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이라 증언합니다.

     이사야는 끊임없이 공의로운 하나님에대해 반복하여 선언을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3번이나 반복합니다. 그 공의로움을 회복하기 위해 나의 종을 내가 직접 불러 세우는데, 그 종의 모습이 고난받는 이미지입니다. ‘고난받는 종’에대한 스팩트럼이 넓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사야가 6장에서 말하는 남은 자일 수 있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일 수 있고, 익명의 크리스챤일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고난받는 종을 극단적인 시련의 고통 속에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려고 애쓰는 사람들, 공동체, 집단적 의미로 받아들이는데, 타르굼에 보면 11세기 십자군 전쟁 때 예루살렘에서 집단학살 당한 사람들을 세계 열방의 죄를 대속한 죽음으로 바라봅니다. 아마도 2차대전의 학살 역시 그렇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스라엘 가나안 땅에서는 그 반대의 학살이 이스라엘에의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난받는종에대해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종말론적인 신앙에 근거합니다. 그냥 귀에 걸면 귀거리, 코에 걸면 코거리가 아닙니다. 긍국의 회복, 하나님의 창조의 선한 뜻이 역사와 우주 속에 긍국적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신앙에서 바라볼 때, 고난받는종의 스펙트럼은 넓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회복의 스펙트럼은 이제 인간의 자유, 평화의 회복이 아니라, 지구상의 자연, 생태, 기후에 까지 더 확대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이사야서는 지금도 살아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53장은 고난받는 종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털을 깍기 위해 기다리는 말 없는 양으로 비유합니다. 그 모습은 상한 갈대, 꺼지지 않는 등불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마른 땅에서 비쭉이 삐져나온 순 같아서 볼품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듯이 그리 아름답고, 모양새를 갖추지 못한 모습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훌륭한 풍채나, 흠모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고통을 많이 받고, 병치례를 합니다. 사람들이 그를 외면하여, 멸시를 받음으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히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가 사실은 우리의 고통과 병치례를 몸소 하고 있으며, 그것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인류 구원을 위한 섭리와 계획에 따라 그 종을 그렇게 병들게 하셨다고 사53:10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모든 논리와 합리성과 경험은 다 무너집니다. 그렇게 병들고, 상하여, 고난받는 것이 그 사람이 몸 관리를 잘 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고난받는 종의 이미지와 레위기의 희년의 이미지와 이사야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회복의 이미지, 나아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증언한 주님의 말씀이 함께 다 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주에 세월호 가족이 성경읽기를 통해 가족들이 스스로의 아픔으로 눅2장의 시므온의 찬양을 풀어낸 해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진정 고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풀어낸 이 시대, 이 아픔의 해석입니다.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은 부정한 많은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했

                          지만, 숨어 있는 양심들을 일깨워 일어서게 하고 거리로 나오게 만

                          들었고, 이 사회의 숨겨진 민낯을 드러내게 했으며, 하지만 이 일

                          로 아이들과 유가족들은 표적이 되었고, 우리들의 가슴은 칼로 쪼

                          개는 아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차마 제3자가 이 해석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직 당사자들, 가족들만이 그 해석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소수의 세월호목요성경읽기모임에서 세월호참사를 성경을 통해 읽어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선언한 것을 세월호 목요성경읽기 엄마들이 읽어낸 것입니다. 언젠가 인도네시아, 네팔, 그리고 일본 후쿠시마의 자연 재해와 핵발전소 폭발로 수 많은 인명을 잃었을 때, 되도 안한 목사들이 강단에서 그것이 그들의 죄라고 하며 회개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이사야나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보면 그 말씀과 그리고 그 말씀의 당사자와 스스로를 동일시 하며 그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아파합니다.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선언하는 말씀의 내용과 자신을 분리시킵니다. 유체이탈을 합니다. 영적 분별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도 진리 그 자리에 설 수는 없어도 그것이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분별할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 곁에 함께하려는 자리에 서야하지 않을 까 십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누구를 세우는가 하면 ‘내가 붙드는 사람’, ‘내가 택한 사람’, ‘내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심 기뻐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지난 주에 저는 교회가 창립50주년을 이 전과 같은 생각, 같은 틀로 맞이한다면 지나가는 50년으로 체울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신용복 교수의 글을 인용하여 변화는 변방에서 온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중앙은 누리는 기득권을 지키려 하기 때문에 결코 변화도 새로워지는 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용복 교수는 변방과 중심은 결코 공간적 의미가 아니며, 낡은 것에 대한 냉철한 각성과 그것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이 변방성의 핵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을 팔지”말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자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이야말로 냉철한 각성의 바탕이라 할 수 있으며, 변화의 못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현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스스로를 드러내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인데, 변화산에서 변화하는 모습도 바로 현현을 드러내 주는 본문 말씀입니다. 마17:5에 보면 예수님이 변화할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근데 이 소리가 언제 들려오는가 하면 예수님이 변화할 때인데, 베드로는 여기가 좋다고 합니다. 좋고, 편하며, 자기 연민과 자신의 것에 메이고, 누리는 자리에서는 변화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막9:6에서 예수님이 변화할 때,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여기가 좋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한 결정적인 이유는 제자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겁에 질렸기 때문에 무마하려고 얼떨결에 한 말인데, 겁에 질려하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과 소리를 접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하늘로부터 울려온 것입니다. 변화가 기쁨입니다. 변하지 않고는 하늘의 기쁨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에대해 묵상하며, 한 사람이 떠 올랐습니다. <캄보디아, 흙 물 바람 그리고 삶>이라는 사진집을 지난 2014년에 펴낸 임상진 사진작가의 출판기념 콘서트 동영상을 작년 교회홈피 문화산책 96번에 올린적이 있습니다.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보아도 참 좋습니다. ‘참 좋다’ 는 말을 지금 제가 했는데,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좋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임 작가는 사진을 통해 ‘어떤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그를 고통의 현장으로 다가가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한, 이라크 전쟁의 종군기자로도 활동하였는데, 직업사진작가로서 그 고통받고, 가난한 상처가 있는 분들의 아픈 삶을 사진으로 담아네, 부각시키고, 드러내 세상에 알리는 일에 열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캄보디아와 인연이 닿은 2004년에 에이즈말기환자센타 자원봉사자로 가게 되었는데, 가면 환자들과 바로 악수하고, 옷도 갈아입히고, 목욕도 시켜주겠다는 열심과 기대감으로 2004년7월 센타에 도착하였는데, 자원봉사센타에는 아무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머뭇거리고 있던 중에,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나서, 뒤를 돌아보니, 온몸이 바짝 마른 눈만 동그라니 뜨고있는 한 사람이 휠체어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놀랬고, 만나자 마자 악수하려던 생각은 어디로 사라지고, 보자 마자 몸이 뒤로 확 빠지는 그 0.0 몇 초의 찰라에, 누군가를 위해 살아보겠다는 그동안의 허위와 오만함이 다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0.0 몇 초에 사진과 모든 것이, 그동안 그의 삶이 모두 무너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의 삶을 체우기 위한 것을 마치 그들을 위한 것인 것처럼 여겼다는 것을 깨닫고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하기 시작했고, 그 후에 다시 봉사하기위해 월차 휴가를 내어 다시 가게 되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사진기자로서가 아니고, 회사를 그만 두고, 다큐멘타리 작가로서의 사진도 아니구, 작품적인 다가서기도 아닌, 그래서 내 사진이라는 것이 사진 속의 대상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찿기로 결심하고 잠깐이 아니라, 긴시간 여행을 계획하고 2008년에 다시 캄보디아로 들어가 엔지오활동을 하며 달팽이무료사진관을 열어 사진을 찍었다고 합니다. 무언가 찿으려 하지 않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곁으로 다가서면서 그동안 가난, 피부색의 차이, 장애, 수많은 사회적인 시선의 기재들이 이들의 참 삶의 가치를 가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 사람들의 참 삶의 따뜻함을 전달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사진이 참 따뜻하다고, 그래서 저의 마음이 따뜻한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삶이 따뜻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장애와 가난과 피부색의 차이 속에 가려져 잇는 그들의 따뜻한 삶을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찿으려고 애쓴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전쟁과 폭력과 테러, 갈등으로 인한 고통, 아픔, 눈물, 분노, , ,등으로 가득찬 것 같지만 따뜻합니다. 겉으로 보기와 달리, 그 아픔과 눈물의 자리에서 사랑과 온유를 봅니다. 용서와 관용이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참담한 인간들의 욕망의 자취 속에서 따뜻한 인간애를 보고, 나누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모습입니다.

     대만의 신학자 송천성이 <아시아인의 심성과 신학>이라는 책의 머리말에서 ‘사람들이 개나 닭을 잃어버리면 찿을 줄 알면서도 마음을 놓치면 찿을 줄 모른다’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잃어버린 마음을 찿는 노력을 하면서 하나님의 아픔과 사랑을 이해하려면, 기독교가 스스로 금그어 놓은 울타리 저편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에 크게 공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픔과 사랑과 하나가 되려면 내가 금 그어놓은 이만큼이라는 경계를 허물어야 합니다. 아마 베드로와 제자들이 두려워 하는 것도 예수님의 변화가 황홀하지만 자신 스스로는 변하고 싶지 않아, 바로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습3:17,18으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축제 때에 즐거워하듯 하실 것이다." "내가 너에게서 두려움과 슬픔을 없애고, 네가 다시는 모욕을 받지 않게 하겠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11/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421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770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135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708 2005.09.02 16:30
775 "바이러스에게 묻고 싶습니다."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908 2020.02.29 18:25
774 그리스도의 샘물(주현 후 마지막주일, 2020년 2월23일) 사진 하늘기차 920 2020.02.23 14:24
773 사람아! 두루마리를 먹어라!(성령강림절후열번째주일, 2020년 2월16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122 2020.02.16 13:10
772 어떤 포도원 주인(주현절후다섯번째주, 2020년 2월 9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834 2020.02.09 13:28
771 곧 일어나야 할 일들(주현절후네번째주, 2020년 2월2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846 2020.02.02 14:02
770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주현절후세번째주, 2020년 1월26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511 2020.01.26 12:59
769 약함과 성령(주현절후두번째주, 2020년 1월19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904 2020.01.19 13:34
768 내 기뻐하는 아들(주현절후첫번째주, 2020년 1월12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305 2020.01.12 14:28
767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화관을(성탄절 후 두번째주, 2020년 1월 5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952 2020.01.05 14:19
766 침묵하시는 하나님(성탄절 후 첫번째주, 2019년12월29일) 사진 첨부파일 [4] 하늘기차 1277 2019.12.29 13:24
765 나타나서, 그리고 따라서(성탄절, 2019년 12월 25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34 2019.12.25 11:12
764 바울의 거룩함과 진실함(대림절 네번째주일, 2019년12월22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281 2019.12.22 14:42
763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대림절 세번째주일, 2019년12월15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211 2019.12.15 14:08
762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대림절 첫번째주일, 2019년11월24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982 2019.12.01 14:30
761 깨어 있어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창조절 열세번주일, 2019년11월1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092 2019.11.24 13:23
760 직면과 외면(창조절 열두번째주일, 2019년11월17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943 2019.11.17 22:35
759 사랑은 공동체 언어(창조절 열한번째주일, 2019년11월10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873 2019.11.11 18:40
758 노아의 홍수 이야기(창조절 열번째주일, 2019년11월 3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180 2019.11.03 14:17
757 종교개혁과 평신도(창조절 아홉번째 주일, 2019년10월27일) 사진 첨부파일 mungge 781 2019.11.03 08:43
756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창조절 여덟째주일, 2019년10월20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957 2019.10.20 1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