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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것(성탄절두번째, 새해첫번째 주일,2015년1월3일)

하늘기차 | 2016.01.03 14:43 | 조회 1756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것

성탄절두번째, 새해첫본째 주일                                                                                 딤전1:3-5

 몇 일전 페이스북에 2013년도에 있었던 제4회 2013 새벽기도 목회자 국제컨퍼런스에서 새벽기도 성장 노하우를 전했다는 내용의 글이 다시 올라 온 내용을 보았습니다. 서울 낙성대동에 위치한 교회의 목사님이 새로 부임 후 새벽예배 참석자들 수가 50명 미만에서 5년여 만에 1000명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매달 1일 가정과 교회를 깨우는 <새날 새벽 예배>에는 청소년들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교인이 출석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글을 찬찬히 보니 내용이 없습니다. 역시 성장에대한 이야기입니다.

     성장에 온 총력을 기울이니, 자라면서 그 에너지를 다 소진하여 그 다음 가장 중요한 열매가 없습니다. 열매는 교회 밖 삶 속에서 맺어지는데, 교회에서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합니다. 나무가 기쁨을 주는 것은 자라나는 가지와 짙푸른 이파리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들꽃들과 나무들은 한 여름에는 한 껏 주변의 식생들과 키 자랑 하며, 세력 다툼을 합니다. 그 과정을 보면 목숨 걸고 합니다. 식물들이 세력다툼하는 것 보았습니까? 살벌합니다. 세력이 약해지면 그냥 사라져 버립니다. 거기에 어느 연민도 없습니다. 어느 때는 산국이, 어느 때는 물봉선이, 그리고 쑥부쟁이가 큰 군락을 이루다가, 사라지곤 합니다. 그러나 매 년 변함이 없는 것은 한 여름 그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주춤하면서 찬 바람이 휙 하고 부는 그 때에는 모든 식물들이 성장을 멈춥니다. 그리고 내실을 기합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집중합니다. 한 겨울이 오기 전 종족 보전을 위해 열매를 맺어 다른 종에게 나누어 줍니다. 새와 사람과 짐승들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줍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겨울잠에 들어갑니다. 단순합니다. 생명입니다. 생명의 본래 모습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생명을 뭍 생명과 주고 받으며 나누는 것입니다.

     이제는 ‘부흥이다, 성장이다’ 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한국 개신교 120년에 지금 한국 교회가 위기라고 합니다. 위기가 아니라 정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도착한 배가 배 표면의 녹과 오물을 떨어내듯이 교회도 복음 아닌 것을 떨어내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교회가 신화에 목말라 합니다. 새벽기도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새벽에 교회 예배당에 나와 조용히, 아니면 읊조리며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을 백화점 세일 하듯이 시장 바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흥분과 광기에 스스로의 이기심을 그대로 노출시켜 하나님의 공의로우며, 평화로운 뜻에서 쉽게 이탈되어 버립니다. 그러한 면에서 이벤트가 되어버린, 기독교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송구영신예배에서 벌이는 성구 제비뽑기 또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경배와 찬양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찬양이라고 하면 될 것을 ‘경배와 찬양’이라고 하여 교회의 모든 것을 다 흡입해 버립니다. 그냥 찬양이면 족합니다. 우리 뿐 아니라 온 세상의 피조물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것이 어찌 입으로, 노래로 만의 찬양이겠나요. 리듬과 멜로디와 열광이 아니라, 찬양의 가사, 찬양의 시가 우리를 어떻게 일깨우나, 어떤 삶으로 찬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자훈련도 단계별로, 시리즈별로 훈련하여, 마치 그 훈련을 다 마치면 믿음의 고수가 되는 듯이 되어버리는 양상이 잘 못입니다. 제자훈련을 통해 예수의 제자가 한 사람이라도 나와야 하지 않나 십습니다. 그러니 어느 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하였다. 무슨 제자훈련이 좋다, 또는 목사님 설교가 좋다, 어느 교회에 가니 참 은혜롭다는 식의 이야기들, 신화와 족보 이야기들이 아니라, 교회는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하듯이 깨끗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야 할 것입니다.

     세월호 가족들이 목요기도회와 주일 예배를 통해 신앙을 회복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전에는 성경읽기를 하였는데, 교회를 끝까지 떠나지 않고 이사야가 이야기하는 ‘남은 사람’을 통해 목요기도회에서, 주일예배로 그리고 성경읽기로 나아 갑니다. 누가복음의 아기 예수 탄생을 읽으면서 아이들의 태몽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을 모를 정도로 기쁘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눅2:34절의 시므온의 찬양시로 속이 끓었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할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표적이 될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생각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은 칼로 쪼개듯이 아플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며,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은 부정한 많은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했지만, 숨어 있는 양심들을 일깨워 일어서게 하고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고, 이 사회의 숨겨진 민낯을 드러내게 했으며, 하지만 이 일로 아이들과 유가족들은 표적이 되었고, 우리들의 가슴은 칼로 쪼개는 아픔을 맛보아야만 했다고 합니다. 어미로서 갖는 저희들의 심정을 너무나 잘 표현한 말씀이었습니다. 탄생에 관한 기쁨의 소식에서 시작해서 눈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첫 시간이었지만, 성탄절을 앞둔 저희 모두에게, 기쁨의 흥분과 더불어 다가올 예수의 삶, 예수가 오신 목적을 기억할 이유를 알려주는 부분이 아닌가 싶었다고 합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해서도 그 십자가가 어떻게 계획되고 만들어져가는 지를, 권력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이들과 돈으로 매수된 사람들과 무관심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 모두가 만들어가는 예수님의 죽음은 이 일에 가담한 모든 이들과 여전히 그들 모습을 답습하는 수많은 이들의 죄의 결과이고, 결국 대속은 수동적이기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뤄졌으며, 예수의 의지로 끌어온 고난이 아니라 예수에게 강요된 고난과 죽음이기에 저희는 더 부끄럽고 미안했다고 하면서 바로 세월호 가족들의 삶으로 십자가의 죽음이 해석되어 들어옵니다. 세월호 참사로 죽은 아이들도 자신들의 죄보다는 이런 악의 구조 안에서 계획되고 방관당한 죽음이기에 더 부끄럽고 더 미안하고 더 처절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대속은 결국 나의 죄가 타자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다는 연대의 책임을 묻게 하는 하나님의 신호임을 배웁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서는 바울이 ‘미항’에서 겨울을 지나고 떠나자고 말렸지만, 선주의 욕심으로 무리한 출발을 하여 로마로 향하는 중에 광풍을 만나 배가 표류하는데, 배가 육지에 가까이 이르러 암초에 부딪혀 깨질까봐, 선원들이 배를 버리고 도망하려 하자 배에 함께 탔던 로마 병정들이 선원들이 배를 버리고 도망할까 봐 거룻배 밧줄을 끊어버립니다. 배가 육지 가까이 이르러 두 물살이 모이는 것에서 배 앞쪽이 깨지자, 병사들이 죄수들이 도망 갈까 죽이려하는데, 이번에는 백부장이 바울이 죽을 까 보아, 헤엄칠 수 있는 사람들은 물에 뛰어들라 하여, 배에 탄 사람이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2,000년 전 267명의 생명을 살린 지도자도, 선장과 선원의 야비한 도주를 막은 군인(공무원)도 세월호 가족들에게는 없습니다. 2,000년 전보다 더 미개한 이 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어찌 보면 대단한 과학 기술이기보다는, 생명을 사랑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고 하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말씀 속의 내용이 진실이라 확신을 하며, 저희가 겪는 진실도 알리기 위해 가족들도 사도들처럼 끝까지 알려야 한다는 소명 의식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올해 교회는 창립50주년을 맞이합니다. 여러 가지 50주년 행사를 준비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같은 생각, 같은 틀로 50주년을 맞이한다면 우리는 그저 50년을 지나가는 50년으로 체울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월호 가족들이 예측하지 못한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분노하며, 위로받으면서 사실과 그 사실에서부터 오는 진실을 증언하는 소명 의식이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정신을 판다면,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와 흐름에 붙들려 아무런 변화도 진정한 소명과 사명에도, 오늘 이 시대의 역사적 부름에 응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자기 정체성도 찿지 못할 것입니다.

   3년 전인가 신용복교수님께서 <변방을 찿아서>라는 책을 냈습니다. 변화와 새로움은 중앙이 아니라 변방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부단히 변화한다. 변화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다. 중심부가 쇠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은 그곳이 변화의 공간이고, 창조의 공간이고,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라 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중앙은 누리는 기득권을 지키려 하기 때문에 결코 변화도 새로워지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또 “변방과 중심은 결코 공간적 의미가 아니다. 낡은 것에 대한 냉철한 각성과 그것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이 변방성의 핵심”이라 하면서 “변방을 찿아가는 길이란 결코 궁벽한 곳을 찿아가는 것이 아님며, 각성과 결별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있는 곳이라면 그 곳이 바로 변방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고 하면서 그러한 변방의 이야기들이 우리를 위로하며, 세상의 모든 변방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희망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딤전1:4에서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을 팔지”말라 하면서, 5절에서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월호 가족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사실과 진실에대한 소명의식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불러일으켜진 것입니다. 예측하지 못한 감흥이 말씀읽기를 통해 일어난 것입니다. 말씀읽기로 하늘의 위로와 성도로서의 삶의 정체성을 찿은 것입니다.

     인류 구원의 변화의 탄생은 중앙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방 베들레헴, 그것도 마굿간에서 였습니다. 고기교회 창립 50주년 희년을 맞이하며 더 이상 중앙에서 이루어지는 신화와 족보에 착념치 말고,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여준 사랑을 불러일으켜 드러내는 단초가 되는 해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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