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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 (성령강림후 스물네번째주, 2015.11.8.)

사무엘 | 2015.11.09 18:38 | 조회 1748


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 

                                                      여호수아 24:14~15

저는 평신도의 한 사람으로 작은 믿음 속에서 평소 고민하고 생각하는 바를 부족하지만 나누고 함께 하였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강남 향린 교회 심우기집사입니다. 고기 교회 성도님과 목사님 그리고 낙엽이 마당에서 뒹구는 아름다운 교회를 알게 돼서 반갑고 기쁩니다.

평신도 강단 교류의 일환으로 오늘 고기 교회에 왔는데 고기를 많이 낚는 어부가 되었으면 좋겟습니다. 성서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받은 이가 인간이라고 나옵니다. 신을 닮은 얼굴, 신의 영성이 있는 인간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보아 주시지요. 따스한 미소와 인사 한 번 나누시지요. 안녕하세요.

 

창세기 하나님의 형상이란 단지 외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여기에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하나님의 품성, 신의 속성, 영성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는 갈고 닦아야 드러나고 쌓여 가는 것이라고 보는데 이는 기도와 예배 그리고 실천의 삶이라고 봅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면 특히 잠든 모습을 보면 얼마나 평화롭고 사랑스럽습니까. 우리 모두도 그러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라면서 환경, 교육, 경제적 영향 등으로 성격이 형성되고 변하기 시작합니다. 탐심이 생기고 승부욕과 욕심도 생기기도 합니다. 또한, 학습과 교육된 대로 인간과 생명에 대한 존중과 부모와 어른에 대한 효심, 인간애, 우정, 사랑을 배우기도 합니다. 믿음의 시작은 우연히 오기도 하고 운명처럼 오기도 하지요. 타성에 젖은 믿음도 있지만 매일 매일이 시험인 믿음도 있지요. 이걸 믿어야 하나 믿는 대로 어떻게 사나 . 힘이 들고 실천은 더 힘든 믿음이지요. 우리가 믿는다 하여도 옳지 못하거나 부정과 부패 혹은 불의한 자의 편을 드는 들거나 그 당사자가 되는 이를 종종 보기도 합니다. 그것은 끝까지 겸손하나 가운데 갈고 닦지 않아서라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두레 공동체를 만들었던 김진홍 목사가 자기 신도에게 구타당하고 더 이상 오지 말라는 프랭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뉴스를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깜짝 놀랐지요. 초기에 가난하고 헐벗은 자의 편을 위로하여 함께하던 이가 돈이 모아지고 권력이 생기더니 권력자 편에 서고 끝내는 신도는 물론이고 사회에서도 지탄받는 이가 돼버렸습니다.

 

완전한 믿음이란 저는 큰 자만이라고 봅니다. 왜냐면 기본적으로 저희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고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자기 정진이 필요하고 회개와 반성, 그리고 기도 속에 신앙과 믿음의 올바른 실천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지요

 

한번 믿음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남녀 간의 사랑도 뜨거워졌다가도 금방 변하여 식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데 신에 대한 믿음을 온전히 지키고 현실 삶에서 실천하며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단련과 기도가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일주일의 예배는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일주일 단위로 자기 삶을 반성하고 다시 일주일을 사는 결단의 시간이 된다면 뜻깊은 시간이 되겠지요

 

오늘 주어진 본문의 말씀 신약 디모데전서 610,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는 말씀을 보면

욕심내는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슬픔으로 결국 자신을 찌르는 비수가 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이나 믿는 자나 경계해야할 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린 너무 열심히 일합니다. 과거에 너무 가난했으니까요. 그래서 잘 살고 싶고 굶주리고 싶지 않으니까 열심히 일합니다. 굶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 행복하고 감사해야 하는 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과연행복한가요. 대한민국 아이들과 부모가 하루 이야기 하는 시간 이 평균 23분이랍니다. 부부간의 대화는 10분도 안된답니다. 언제부터인가 온 식구가 모여 도란도란 식사하는 저녁이나 아침이 사라졌습니다.

서로가 일하고 공부한 대가와 가치를 우선 가족부터 함께 나누고 공유해야 하는데 따로 즐기고 쓰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친구가 더 좋고 아내들은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노인은 노인끼리 각자 다른 취미와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 절대 만족스럽진 않습니다. 과거보다는 부자인데 더 바쁘고 더 힘들고 그래서 병들고 사람 도리도 바쁘다는 핑계로 못하게 되고. 우리 이제는 한 번 뒤돌아 봐야겠습니다. 놓치고 온 것이 있지는 않았는지. 사람답게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 된 삶을 위해서는 덜 일 하고 덜 벌고 덜 쓰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가 소비하고 쓰기를 요구합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벌어야 하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간의 주인도 아니고 노예처럼 되어서 할 수 없이 일하고 즐거움도 사라진 노동으로 서로를 옥죄이고 자신도 병들어 늙습니다. 성공이나 그 대오에서 벗어나면 마치 세상의 패배자가 된 듯한 분위기를 몰고 가서 요새 젊은이는 돈도 없고 취직도 안되면 결혼도 연애도 사랑도 하면 사치라는 듯한 분위기가 있는데 이게 현재의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입니다. 우리가 성서의 디모데 전서의 이 말씀을 듣고 묵상해 보면 인간의 탐심이 본래 우리에게 맞는 것인가 생각이 들 것입니다.

 

저마다 형편대로 삶대로 나누고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검소하고 소망한 대로 살고 자기 욕망을 억제하지 않으면 늘 가난할 것입니다. 성서의 가난한 자 이야기는 알다시피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 하였습니다. 천국이 그의 것이라 하였죠. 우리가 익히 아는 말씀입니다. 저는 물질적으로나 마음으로나

비워져야 채워진다고 하는 일상의 진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자지만 마음이 가난한 자가 있고 마음은 부자지만 물질이 가난한 자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함께 어우러져 교제하고 나누는 것이 교회공동체인데 교회를 넘어 우리 사회, 전 세계로 퍼진다면 복음이 올바로 펼쳐지는 것이겠죠. 그런데 교회가 편을 나누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타 종교를 미워하고 분열을 획책한다면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하에 얼마나 많은 사이비 교단은 많은지요. 가득하여 있으면 들어올 곳이 없습니다. 더 큰 집 더 큰 마당, 더 많은 부와 재산 어디 감당하겠습니까. 최근 중국에서 부패로 체포된 저우융캉이 경찰이 급습하여 압수해간 현금이 5톤 트럭 20대분이라고 합니다. 1,000억위안(165,000억원)의 뇌물을 챙기고 수십 명의 첩을 두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부럽습니까. 상상이 됩니까.

 

이때 그것은 돈이 아니라 똥입니다. 독입니다.

조금 있으면 식사하실 텐데 똥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이 사람의 돈과 부는 사람을 병들게 하고 썩게 하는 독입니다.

요새 도둑들은 가을이나 봄에 이사 오는 신혼집들을 유심히 봐둔다고 합니다. 왜냐면 신혼 때는 인사도 다니고 갈 때도 잦으니 집을 비워 두는 경우가 많고 모든 것이 대부분 새것이고 귀금속 등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라고 합니다. 이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많은 현금이나 비싼 예물, 귀금속을 하고 다닌다고 생각해 보시면 얼마나 불편할까요. 도둑과 강도도 겁나고 보관 때문에 경비 등등 신경 쓰일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도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요사이 젊은 친구들의 경제적 관점은 분명한 듯합니다. 어린 학생들도 돈을 되게 좋아합니다. 대학생에게 인간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가 충돌할 때 선택을 하라고 하면 거의 비등비등한 수준의 조사 결과가 나온다 합니다. 사실은 물질을 택하는 친구들이 더 많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아이들의 문제만은 아니고 우리 어른과 특히 믿는 기독교인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최근 청년들에게 물은 설문에 가장 고민이 무엇인가에 취업이 1위고 이성문제가 다음이고 3위가 자아정체성이라고 합니다. 사랑도 투쟁도 취직이라는 논리 앞에 다 사라진 청춘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취업해도 행복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고 불의에 싸우거나 모순과 부패에 맞서 싸우기보다 헬 조선이라 말로 자신의 조국을 지칭하고 이민하여 도망가려 합니다. 부패한 정치인과 관료, 부정한 재벌, 억울한 노동자와 서민, 세월호 참사 많은 문제가 매일 같이 사건이 터지고 죽고 병들고 웁니다. 특히나 세월호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위장되고 포장된 우리 사회의 거대한 메카니즘을 보여주었습니다. 재벌과 고위관료의 결탁과 유기적인 관계, 이를 비호하는 언론과 경찰과 검찰, 누가 세상을 지배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제발 아이들을 살려달는 부모의 절규앞에 거짓말로 그리고 무시하는 관료와 대통령, 우리는 똑똑이 보앗습니다.

세월호 이후 달라진게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우리가 안아야 할 몫이고 외국도 사람 사는 곳이라 갈등과 문제 똑같습니다. 도망치듯 외국간다고 될일 이아닙니다. 예수는 인류의 전 죄악을 대속하였습니다. 그 잔을 피하지 않았기에 오늘 우리가 살고 믿음을 공유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문제를 피하여 후손에게 물려준다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마태복음서 6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재물 중 선택을 원하시고 있습니다. 재물은 사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재물이 주인이 되어서 병원과 약이 있는데도 사람이 죽어가고 먹을 것이 있는데 굶어 죽는 자가 있으니 이것이 문제입니다. 재물을 탐하다 보니 재물이 자본이 돈이 주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일하는가 어느 사이인가 본래 목적은 사라지고 오직 수단과 방법만 남아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잊힌 존재자로 남아버리게 되었습니다.

물질이 나쁜 것이 아니라 물질을 바라보는 시각과 마음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물질과 재화, 자본 모두 잠시 빌려 쓰고 남겨야 할 것들이고 물려주어야 할 것이지요. 그런데 이를 악용해서 어떤 사이비 목자나 이단들은 헌금을 강요하고 교묘히 이야기하며 돈을 축적하지요. 요새 시쳇말로 교회 헌금하면 헌금이 어디로 간다. 은행으로 간다고 합니다. 교회가 왜 돈을 쌓아 두어야 하지요. 왜 이자를 받고 혹은 돈을 빌려 은행에 이자를 내야 하지요. 돈을 사랑하면 사역자도 믿음에서 떠나는 불의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의 대형교회, 기업형 교회를 보십시오. 여성문제 탈세와 세습, 기업비리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하나님 기업을 경영한다고 하지요. 교회가 성도 모아 돈 버는 곳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가난한데 교회는 부자가 된다면 말이 됩니까.

쓸 만큼만 모으고 나머지는 구제와 봉사에 사용하라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형편대로 모이고 교제하고 말씀을 나누고 신앙을 가지면 안 될까요. 저도 교인의 한사람으로 많은 고민이 되는 부분입니다

과연 교회 건물이 필요한가 이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모으고 세금과 이자를 내야 하고 관리가 필요하고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셨지만, 성전의 의미를 중요시한 것이지 교회 건물 자체를 사랑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서 본문에 이야기는 하나님을 믿고 따를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속성, 이기나 자본을 믿을 것인지 택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둘다 다하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요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이슈가 넘어는 갔는데 놓치지 말아야 할것이 있습니다. 3당 합당 무렵 비정규직법이 날치기 개정되어 당시에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국회의원들이 싸우는 모습만 보고 정치인들은 쌈박질만 한다고 욕만 햇습니다. 당연히 싸울 수 밖에 없는 일이었죠. 결국 우리사회에 큰 재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뭡니까. 같은 일을 하고도 사람에게 차별이 있고 불안정한 고용에 묶인 노동을 합법화 시켜준 법입니다. 지금 대졸자의 70-80 프로가 사회에 나오면 비정규직으로 취업하고 전국 일자리의 과반이 넘게 비정규직인데 가정과 국가가 안정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노동자가 해고라도 되면 가정의 경제가 파산되는데 그 당사자는 절박한 마음으로 결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쌍용차, 콜텍 노동자 외에 노조가 없는 중소 기업의 형편은 더 심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노동 5개 개악법은 해고를 더 자유롭게 하는 법안을 상정했습니다. 이게 뭡니까. 그나마 정규직도 해고를 자유롭게 하겠다는 겁니다. 60조의 대기업 보유금을 쌓아두고도 쓰지 않고 인색한게 대기업재벌입니다. 돈 벌어주고 일하는 노동자와 직원을 부품처럼 생각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처럼 복지 후생이 빈약한 현 체계에서 해고는 죽음과 같습니다. 실제 쌍용차 해고로 40여 분이 자살 및 질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가족이 해체되고 지역 경제도 위기를 맞았습니다. 해고가 되더라도 안정적인 지원이 있다면 고공 항의농성하는 노동자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이념적 잣대로 비난만 하는 언론이나 정치인, 사업가들의 반성이 필요한데 이윤과 이득 앞에 반성이라는 말은 먹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재정을 위해서는 국민이나 노동자도 세금을 더 내야 합니다. 가진 자만 내라 이도 안됩니다. 모두가 세금을 더내야 재원 마련이 가능하겠지요. 어떤 이들은 가난하니까 무조건 받기만 하려하고 당연히 여기기만 합니다. 형편 되는대로 세금내고 기부하고 봉사하는 것이 맞습니다. 있어서도 하지만 없어서도 할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웃음과 칭찬, 미소와 따뜻한 마음 친절한 위로와 말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는 돈으로 줄 수 없는 겁니다.자발적 가난과 검소한 삶 속에 청렴한 삶을 성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자와 부자 되기를 소망하는 만큼 나눌 수 있는 마음도 그만큼 커지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봅니다

 

(구약) 여호수아 2414~15,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 조가 강 저편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삼상 12:14)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 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 하는 땅 아무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18:19)

 

 

 

이스라엘 온 백성들을 향한 여호수아의 한편의 장엄한 설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남아 있는 헛된 우상 맘몬 숭배를 완전히 제거하고 "여호와만 진정으로 섬기라"는 여호수아의 도전은 그 자리에 모인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영혼을 각성시킬 만큼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상의 제거 없이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신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의 우상은 자본과 권력, 탐욕입니다. 죄와 헛된 우상, 탐욕들 앞에서 더는 머뭇거리지 말라고 성서에서 하나님은 말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향한 도전은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는 것입니다. 선택은 곧 '결단'입니다. 거기에 나는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매일의 도전이며 숙제인 말씀을 내려놓고 제 졸시 한편 낭독하고

말씀을 이만 줄이겠습니다.

 

호박잎 그늘을 사랑하네

 

                                   심우기

 

 

커다란 호박잎 그늘을 사랑한 것이

개미만은 아니었네

가난한 시인도 호박잎 그늘을 사랑하네

먼 산과 바다로 갈 형편이 못 되는 시인은

마을 텃밭 울타리에 올라온 호박 덩굴과

개여울 지나는 줄기 끝,

호박잎 그늘을 사랑하네

돌쩌귀에 걸친 해거름을

발끝으로 툭툭 치며 놀다

등 뒤를 미는 노을에 마지못해 웃으며

앞길을 비춰주는 낮달에 이끌려 나오네

가난한 시인에게

당연히 가난할 수밖에 없는 아내와

떡잎 같은 아이들 있는 집으로 돌아가네

호박잎은 무럭무럭 커가고

그늘은 그늘을 사랑할 줄 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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