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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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고 싶으냐?”(성령강림후스무한번째주, 2015년10월 18일)

하늘기차 | 2015.10.18 11:15 | 조회 1655


                    “낫고 싶으냐?”

성령강림후스무한번째주                                                                                             요5:1-9

     양떼들이 예루살렘으로 드나드는 동쪽 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 못이 있는데, 천사가 때로 내려와서 물을 휘져어 놓을 때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나을 수 있다고 하여, 중풍병자와 다리를 저는 사람들과 눈 먼 사람들 등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들로 늘 북적였습니다. 지금도 물이 좋다는 곳에는 많은 피부, 관절 류마치스 환자들이 몰려듭니다. 민간치료요법입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미신이 되기도 합니다. 천사가 와서 물을 움직인다는 것을 보면 이 베데스다 연못도 이미 미신으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

     주랑이 5개가 있습니다. 5개의 주랑은 모세5경을 상징합니다. 마치 요한복음의 첫 기적인 가나의 혼인잔치에 등장하는 물항아리 6개와 같습니다. 결혼잔치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에, 잔치에 없어서는 안되는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결혼잔치를 살리는데 정결예법의 물항아리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6은 불완전한 수입니다. 율법의 불완전함을 말해줍니다. 5개의 주랑이 상징하는 모세5경의 율법도 죄는 드러내지만 회심은 없습니다. 죄 앞에 연약한 모습을 율법은 드러내지만 건강하게, 생명이 넘치게 하지는 못합니다. 병든 영혼이 마지 못해 머무를 수는 있지만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주인이십니다

     먼저 뛰어들어야 합니다. 2등은 안됩니다. 일등이어야 합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못 가에 둘러 앉아 있지만, 그 곳은 싸움의 자리요, 분쟁의 자리입니다. 겉으로는 웃고, 서로 위로하고 있지만, 그 자리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자리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보는 것 같습니다. 가요 프로그램 중에 가수 왕을 뽑는 프로그램이 처음 등장할 때, 다른 사람들도 그랬고, 저도 역시 어색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서로 노래 경쟁을 시켜 둘 중에 하나가 탈락하는데, 경쟁을 치르며 웃으며, 서로 위로하며, 어떤 때는 흥분하는 과정을 카메라로 담아 시청자들에게 보여줍니다. 이 전부터 있어 왔던 음악 경연, 콩크르하고는 개념이 틀립니다. 그야말로 살아남는 자가 살아 남습니다. 서바이벌입니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전에는 그렇게 낯이 설어 프로그램을 보기가 민망했는데, 이제는 풍성할 정도로 다양해졌습니다.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이 봅니다. 사실은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사는자 외에 죽는 자에대한 동정이나 연민이 결핍되어 갑니다. 죽을 사람 당연히 죽는다는 분위기입니다. 지금 우리 세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감추어진 따뜻한 시선과 관심과 배려와 나눔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 전체를 주도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서바이벌입니다. 살면 살고, 죽으면 죽습니다. 이러한 죽음의 흐름을 누가 주도하고 있나요?

     자본입니다. 교육, 문화, 정치, 외교, 구멍가게와 아이들의 용돈과 코묻은 돈 까지, 밥상에 올라 온 콩나물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경제, 종교, 모든 영역, 스포츠는 이미 진작부터 그렇게 되어 왔고, 모든 논리가 경제의 논리입니다. 한 가지 가치 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혹시나 하며 물이 돌아갈 때 먼저 뛰어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눈치를 보며 그 신통하다고 하는 베데스다 못가에 둘러 앉아 있는 형국입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이 찿아 오셨습니다. 그 곳에는 많은 환자들이 있었는데, 38년된 환자는 물이 돌아도 스스로는 맨 먼저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갈 수 없는데도, 혹여나 하며 소위 루저로 그 곳에 그렇게 있습니다.

     38년도 상징입니다. 42년일 수도, 36년 일수도 있지만 38년입니다. 신2:14에 보면 38년은 신2:14에 보면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결국 남쪽으로 내려가며 광야길에 들어서는데, 그 고난의 길의 마지막 단계인 에돔과 모압을 경계짓는 세렛 시냇가를 건너기 직전, 그러니까 가나안 동쪽, 요단강 건너편으로의 진입을 눈 앞에 둔 그 세월이 38년입니다. 오늘 말씀의 이 중풍병 환자는 38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누워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찌보면 생명에 관한한 아마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니 그게 당연한 것입니다. 생명은 주신대로 누리는 것이지 생명에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풍병환자는 누릴 것을 누리지 못한지 38년되었는데, 예수님은 그 많은 베데스다 연못 가의 환자들 속에 가장 증세가 심한 38년된 환자에게 시선을 고정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그렇게 오랜 세월 누워있는 것을 아시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 싶으냐?”

우리는 주님의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간다고 그 안타까움을 하소연합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언제요? 방금이요? 아니요 38년 동안 그렇게 살았습니다. 지금껏 모든 힘을 다 쏟아 스스로 해 보려고 하였고, 지금도 그렇지만 되지를 않습니다. 이제 나를 내려놓을 때가 왔습니다. 그래야 함께하는 사람들도 편하고, 그 결과도 좋습니다. 38년 동안 이스라엘이 광야길을 갔습니다. 스스로 해 보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믿고 따르지 못하여 이집트에서 나온 사람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길이 아닌 광야에서 헤메다가 다 죽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오며 걱정했던 광야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가나안 땅을 밟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아무 한 것 없이 38년을 달려오지 않았는지요? 그러나 이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 싶으냐?’ 이 물음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과 성전과 죄사함은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몰아 갔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밖게 했습니다. 요2:19에서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눅5:20에서는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였으며, 오늘 말씀에서는 안식일 규례를 어겼습니다. 유대교를 지탱하는 죄사함과 성전과 안식일, 그리고 더 나아가 제사에 이르기 까지 결국은 십자가에 달릴 수 밖에 없는 선언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안식일 때문에 16절에 박해가 시작이 되었고, 18절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것 때문에 신성모독으로 예수를 죽이려 합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당시의 유대교와 계속 부딪혔을까요? 예수님은 반대하고 싶어서 반대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교의 성전과 제사와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아내지 못합니다. 왜 주님이 생명인가요? 18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38년된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것이 짐을 들어 옮기라고 한 것이라 유권해석을 하여 율법을 어겼다고 예수를 죽이려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1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

                       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그렇게 놀랄 만 한 일을 하는 것은 20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자기에게 모두 보여주기 때문이며, 이 보다 더 크 일도 보여준다고 합니다.

     이제야 유대인들이 왜 자기들 일을 하는지 이해가 갑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보여주지 않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간음하다가 붙들린 여인을 돌려보낸 후 유대인들과 격한 논쟁이 일어났을 때,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요8:44에서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극언을 하면서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아버지가 보여주는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빛이요, 길이요, 생명이 됩니다.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누워있는 병자를 일으킨 것 보다 더 큰 일들을 보여주실 것이고, 놀라게 될 것이라 합니다. 베데스다의 38년 된 환자를 일으켰을 때, 유대인들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대신 안식일을 범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법을 들이대는 바리새인들과 종교인들을 놀라게 할 일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종교에 묻힌 사람들을 놀라게 할 일을 21,22절에서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사람들을 일으켜 살리시니,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

                  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가야바 법정에 섰을 때, 막14:62에 보면 대제사장이 옷을 찢으며 참람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옷을 찢었을까요? 예수님이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

                       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비죤은 유대인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비죤으로,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에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종말과 심판을 기다리며 박해를 이겨내었습니다. 그러나 1세대 기독교인들이 점점 사라져 가지만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은 훼파되었습니다. 교회는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퍼져가기 시작하면서 종말을 다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가 이야기하는 그 이상의 메시야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유대인이 아니라 인류의 심판자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제 주님은 지구라는 행성에 오셔서 인류 와 지구상의 피조물 뿐 아니라 우주의 심판자이시며, 메시야라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복음에서 소외되었던 산과 들, 꽃과 나비 곤충들과 모든 미물에 이르기 까지모두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물론 1세대 기독인들이 사모하였던 우주적 대 파국의 회복과 완성의 종말은 아직 유효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러한 주님 다시 오실 그 기다림 속에 생명이신 주님, 살리시는 주님을 봅니다. 24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지금 여기에서 생명입니다. 마지막 대 파국의 심판이 아니라, 생명이신, 죽음을 일으켜 살리시는 주님이

                                   “네가 낫고 싶으냐?

고 말씀합니다. 이미 심판을 넘어서신 하나님과 하나이신 주님이십니다.

     나사로를 죽음에서 깨워 일으키실 때에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고 하자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라하며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묻습니다. 그제서야 마르다가 정신이 버쩍들어서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종교적 종말론에 익숙한 마르다가 정신이 버쩍 났습니다. 여러분 지금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와 역사가 생명입니다. 그런데 생명은 사랑을 통해 평화와 공의로 그래서 자유함으로 드러납니다. 지금 여기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성도들 사이에 종교와 이데올로기와 피부색과 경제적 격차 속에 ‘오늘은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소’라고 오늘 유대인 처럼 편견과 이기심으로 심판하지 말고, 우주적 대 파국을 뛰어 넘어 계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으로

                                      “네가 낫고 싶으냐?”라고 물으실 때

교우여러분! 지금 ‘네’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실 때, 그동안 종교에 파묻혀, 경제 가치에 몰입되어, 육신의 질병으로, 자기 연민에 빠져 주저 앉아 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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