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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을 뚫고(성령강림후스무번째주, 2015년10월11일)

하늘기차 | 2015.10.11 14:38 | 조회 2426


                         지붕을 뚫고

성령강림후스무번째주                                                                                              마6:25-34

     기독교는 오랜동안 사람에게 생겨나는 질병의 대부분은 죄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 왔습니다. 도르트 죌레 라는 독일의 여성 신학자는 이것을 기독교적 자기 학대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도 우리가 겪는 형벌, 고통이 하나님의 공의로움에서 오는 진노이니 달게 받아 마땅하며,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이유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분이 아니며, 고통과 형벌에는 다 이유가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며, 이렇게 징계를 받고 채찍을 받은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사죄를 받은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표상은 복음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전혀 모순됨에도 인간의 인위적인 종교성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인의 하나님이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도르트 죌레는 이러한 하나님에대해 가장 강력하게 저항을 한 것이 복음서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도 모두 죄인으로 여겨 죄책감에 매여있는 한 중풍병자를 죄라는 틀에서 자유롭게 해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처벌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서로를 또는 스스로를 정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하기 위해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계시며, 이러한 죄의식이 우리 기독인들을 옥죄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가학이며, 성서 구절을 인용해 경고와 진노, 저주와 형벌을 말하는데, 이러한 이야기들은 글자 그대로 비유여서 그 상징적인 의미를 찿아내야 하는데, 이러한 심판, 멸망에대한 말씀은 대부분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종말론적인 삶을 일깨우는 것이지, 지옥이나, 최후의 심판을 글자 그대로 사실적으로, 또는 예언적으로 묘사한 것들이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논리에 많이 공감을 하며 오늘 말씀을 읽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죄에 무감하며,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 속에서 야곱은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상속받는데, 죄 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베델에서 돌베게를 베고 잠을 자다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알게 됩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는 기생 라합을 포함해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유다는 며느리 다말이 자기와 동침하여 자손을 이으려고 한 것을 알고 불에 태워 죽이려 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다말의 그 행동 때문에 끊어질 뻔 한 가문의 대가 이어졌고, 다말은 다윗 왕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도 들어옵니다. 또 모세는 이집트의 왕궁에서 이집트인을 죽이고, 동족에게 비난을 받아 미디안 광야로 쫓겨나지만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광야에 묻혀 사라지기 보다는 그곳에서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을 이루며,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도, 스스로 말을 못하는 열등감이 있고, 자기 동족에게 인정 받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기적을 보여주고, 꾸짖기도 하여 모세를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지도자로 세웁니다. 성경은 죄에대해 이야기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과 만나며, 열등감과 자괴감에 젖어있는 사람에게 찿아가 함께하시며 동행하시는 지에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창세기에서도 카인이 동생 아벨을 질투하여 돌로 쳐 죽이지만, 오히려 아벨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창세기를 이어가는 사람은 동생을 살해한 인륜을 무너뜨린 카인입니다. 바로 그 죄인을 사랑하며, 품어주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가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가 그물을 던져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자, 스스로 무릅을 꿇으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데, 이 고백도 자신의 개인적인 행동이나, 부끄러운 과거사에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짐과 같은 죄와 그 책감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끼는데, 그것은 마치 호렙산 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날 때의 그 순간이며,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며 말 위에서 굴러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전 존재가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체험하게 되는, 그것은 어떤 개인의 윤리적인, 또는 행위적인 것에서 부터가 아니라, 찿아오신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에 내 모든 존재의 껍질을 벗는 사랑의 은총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한다는 윤리나, 도덕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일하시는 지를 말씀하는 책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그 어떤 죄로 부터도 매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으로 참 자유인으로 평화롭게 살 수가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규례로 병자들을 죄인이라 하며, 평생을 죄 짐에 얽매여 살아가게 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죽어 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찿아가 죄용서를 선언합니다. 이미 용서받았으며, 죄가 사해졌으니 너도 그렇게 용서하며 사랑하며 살라고 선언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활동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여,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던 때, 그리고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에게도 이목이 집중되던 때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내용적으로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부분과 그로인하여 바리새인들이 신성모독이라는 잣대로 예수를 바라보는 것과 맞물려, 예수님 스스로 죄를 용서하는 주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동네에 중풍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도 같은 동네에서 어릴적부터 함께 자라 온 친구들이어서 자신들 처럼 건강을누리지 못하는 친구를 바라볼 때, 늘 안타깝고, 미안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자신들의 동네에 소문으로 듣던 예수님이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왜 기쁜 소식일까요? 인간에게 기쁜 소식은 하나입니다. 죽음을 이긴 한 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두려울 수 밖에 없는 죽음을 온 몸으로 받아,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주님이 맛보신 생명의 기쁨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친구들은 누워있는 친구를 들 것에 실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데리고 왔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에게 다가설 수가 없습니다. 아마 친구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했을 것입니다. 그냥 돌아가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회는 한 번입니다. 영적 기회는 가 있습니다. 마치 농사와 같습니다. 씨 뿌릴 때와 비료를 줄 때가, 잡초를 뽑아 줄 때와 거둘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농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중동의 집 구조는 천장이 슬라브형인데, 나무기둥을 벽과 벽사이에 얹어 놓고, 나뭇가지를 얼기 설기 놓아, 진흙과 회로 마감을 한 구조입니다. 그 위에서 빨래도 널고, 휴식을 취하며, 묵상을 하기도 합니다. 통상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집 옆에 놓여져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그 계단을 따라 지붕 위로 올라 가서, 지붕을 걷어냈습니다. 구멍을 뚫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그 구멍을 통해 내려 보냈습니다. 한 영혼을 위한 연민이 없으면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데리고 와서, 올라가, 걷어내고, 뚫고, 달아 내립니다. 아마 실내는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체하는 사람들은 선생님의 귀한 말씀을 듣는데, 이 무슨 무뢰함이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집 주인은 어떻했을까요? 보상해 달라고 난리를 쳤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누가 있었나요?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가 무슨 이야기하나 하며, 뭐 율법에 반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까 하며 꼬투리만 잡으려 합니다. 제자들은 어떻했을까요? 성질 급한 베드로는 바깥으로 나와 지붕으로 뛰어 올라 중풍병자의 친구들과 멱살잡이라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영혼이 구원을 받기 위해 여러 정황들 속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설마 바리새인은 아니겠지요? 마음 넉넉한 집주인이어서, 잘되었네, 지붕을 다시 이으려고 했는데 하며, 허허 하고 웃는 여러분인지요? 아니면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마지못해 예수님이 계신 곳 까지는 함께 왔는데, 너무 사람이 많자, ‘거 봐, 내가 뭐랬어, 사람이 많다고 했지, 내가 그래서 다음에 오자가 했잖아 하지는 않는지? 아니면 이 난리를 불구경하듯이 팔장을 끼고 바라만 보고 있는 역할인지?

     촛점은 환자와 예수님입니다. 환자를 예수님 앞에 세워야 하는데, 이 많은 난관을 뚫은 것은 연민과 믿음입니다. 지붕을 뚫고 환자를 내려 보낸 원동력입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님 만나려고 할 때도 그 많은 방해물을 뚫을 수 있었던 것은 사슴이 시냇물을 찿듯 하는 간절함이요, 갈급함이요, 사모함입니다. 그 여인의 간절함에서 나온 작은 손짓 하나를 주님은 기억하시어 누가 내 옷을 만졌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밀치는 것이라고 하지만, 밀치는 것과 그 여인이 죽음의 경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오직 한 가지 소망을 품고 주님께 나아 와 남자들이 둘러 쌓은 성같은 포위망을 뚫고, 그것도 뒤에서 간신히 만진 그 손길을 느끼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표현한 것처럼 밀쳤다고 하지 않으시고, 내게 손을 댔다고 주체가 분명히 있음을 시사합니다.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은 모르나,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많습니다. 온 세상 전 지구 촌에 그 많은 사연들 속에 내 사연이 하나님께 들려 올릴까 라는 것은 기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을 세시는 분이십니다.

     환자와 예수님이 촛점인데, 그 촛점을 정확히 맞춘 사람들이 있습니다. 친구들입니다. 아마 중풍에 걸린 친구는 오고 싶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이미 죄인으로 낙인찍혀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감히 나아갈 수도 없고, 이미 좋다는 의원 다 찿아 다녀서 치료의 희망이 사라진지 오래여서 갈 마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 마음을 다독이며 힘을 모아 들 것에 실어 예수님에게 찿아 온 것입니다. 5절 말씀에 예수님이 보신 것이 있습니다. 친구들의 믿음입니다. 주님은 혈루증 앓는 여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병을 고칠 때에도 그 아이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는 그 믿음,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는 그 믿음을 친구들에게서 본 것입니다.

     그 믿음을 따라 주님께서 이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아마도 이 사람은 자신의 육신도 육신이지만 마음이 더 깊은 병에 걸려 있었을 것입니다. 평생을 천형에 매여, 사람 대우 받지 못하며, 죄책감에서 죽지 못해 살던 한 영혼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평생에 용서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아니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었을 텐데, 그 마음이 얼마나 평화했을까요.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말하기 더 쉬울까요? 당연히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고 하는 것이 편하고,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율법과 규례와 십계명에서 파생된 세분화된 법조문으로 온 이스라엘이 죄에 매인 것을 아시는 주님은 작정을 하고,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바리인들 앞에서 들으라고 선언을 합니다. 결국 이것은 신성을 모독한 죄라는 빌미를 주었고, 이 죄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사람이면서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한 육신의 질병을 안고 있는 영혼을 보았고, 그 영혼을 살리려고 온 마음을 다해 자신에게 데리고 온 친구들의 믿음을 보았으니, 예수님이 어찌 ‘일어나 걸으라’하였겠습니까? 앞으로 이 말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이며, 이 말로 코가 꽤어 당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은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한 영혼을 위한 것이지만 온 인류를 향하여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더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하십니다. 이중풍병자는 그동안 자신의 전 존재를 옭아 매었던 죄 사함을 이미 받아, 온 몸에 하나님의 생명이 피어났을 것입니다. 주님이 일어나라! 하시는 말씀 한 마디에 이 사람은 기꺼이 평생을 누워있던 자리를 박 차고 일어났습니다. 생명의 은혜가 한 영혼을 어떻게 회복시켜 생명에 충만하게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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