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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구해야 할 일(성령강림후열아홉번째주, 2015년10월4일)

하늘기차 | 2015.10.04 15:33 | 조회 1637


                         먼저 구해야 할 일

성령강림절후열아홉번째주                                                                                       마6:25-34

     오늘 말씀은 19절 말씀에서 자기를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되어 두 마음을 품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 하시면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산상수훈과 관련하여서 저는 늘 김교신선생님의 말씀을 되새김니다. 온 몸을 다하여 성서를 이 땅에 전파하고 살아내셨는데, 해방되던 해 그렇게 열망하던 해방을 보지 못하고 45년 4월 25일에 돌아가셨습니다. 함석헌 선생님과 1901년에 태어나셔서 같은 오산 고등학교를 나오시고, 1900년대의 모진 세월을 살아내셨습니다. 선생님은 생물은 무릇 개체생존과 종족보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어서 무의식 중에 어떻게 하면 자기일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을까 하며, 가능하면 그 자손들의 의식주까지 쌓아두려 한다고 하면서, 수도원 생활을 하지 않고는 실제로 우리는 이렇게 살 수 없을 것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그 말씀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러면 물질도 얻지 못하고, 하늘나라 백성의 삶도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21, 22절에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며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하다’는 말의 원 뜻은 ‘단일’입니다. 눈이 한 가지 만을 주시하여 바라보면 몸 전체가 밝아집니다. 즉 인생을 헛되이 소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둘로 나늬어, 물질로 갔다가, 하늘로 갔다가 하면 안됩니다. 한 마음, 하나님 향한 믿음으로 족합니다. 가난한자도 오히려 땅과 돈에 포로가 될 수 있는 반면에, 거부이면서도 욥은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

                    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다윗은

                    “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라고 기가막힌 고백을 합니다. 물질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공중의 나는 새와 들의 백합을 보라고 하시면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새나, 꽃이 아닙니다. 새처럼 날 수도 없고, 새처럼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보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새와 백합은 편히 그냥 무위도식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지 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지 말고, 계획하지 말고, 땀흘리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창공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게, 또 백합처럼 자기 자리에서 아름답게, 화려할 정도로 자기 모습에 당당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도 일하니 나도 일한다 하셨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않을 수 있나요?

     목숨이라고 하였는데, 생명입니다. 생명은 삶이며 일상입니다. 먹고 마시고, 회사에 가거나, 논 밭으로, 농장으로, 일터로 나아가며, 아이들 학교 가는 길 챙겨주며, 마트에 콩나물 거리 사러 갑니다. 생명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일상입니다. 하나님 현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다면 생명을 닮은 것입니다. 하나님도 하나이지만, 사람도 하나입니다. 모든 개체가 다 하나입니다. 어느 것과도 닮지 않은 존귀한 유일한 개체로 존재합니다. 그런면에서 하나님과 동등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온갖 피조물은 그 역할이 다릅니다. 그러나 한 생명입니다. 주님은 오늘 생명을 부지하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생명을 위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생명을 주신 분께서 생명에대해 말씀하시면서 입는 것, 먹는 것이 생명의 모습이지만, 아니 생명의 현상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걱정이 안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아예 명령하고 계십니다. 걱정과 거리를 두라, 걱정과 선을 그어라, 걱정을 가까이에 두지 말라고 합니다.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내어 놓는 것입니다. 모든 것, 인간의 개체적인 가치, 연민, 의지, 의식, 감정, 그 모든 것을 몸으로 내어 놓는 것입니다. 생명은 다 그렇게 합니다. 인간 만 그렇게 자기 생명 안 내어 놓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음이고, 폭력이고, 싸움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내어 놓으며, 생명이 이런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은 삶인데, 자기 혼자의 삶이 아니라, 온 피조물이 하나인 삶이기 때문에, 내어놓습니다. 눈이 눈을 위해서, 위가 위를 위해서, 입이 입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한 몸, 온 몸을 위해 살아갑니다. 공중에 나는 새들과 백합화를 보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 하나인 생명입니다.

     아이가 태어나 눈을 맞춥니다. 뒤집기를 합니다. 기어가더니, 혼자 서고,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생명은 스스로 자랍니다. 눈맞추고, 뒤집고, 기어가며, 일어설 때 부모는 손잡아 주는 정도의 역할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습니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기다립니다. 부모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염려, 걱정한다고 해서 안 자라는 키가 한 자나 자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사랑의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 생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은 죽어갑니다. 죽음이 피어납니다. 생명과 사랑과 믿음, 그리고 하나됨은 한 뿌리입니다. 팔이 골절되었습니다. 병원에 갑니다. 의사가 뼈를 맞춥니다. 의사가 하는 일은 거기 까지입니다. 그 다음은 몸이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회복시킵니다. 그러니까 훌륭한 의사는 어떻게 골절이 되었는지, 섬세한 것 까지 알아내어 생명이 드러날 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해 줍니다. 어디가 어떻게 문제가 되는지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걱정한다고 부러진 뼈가 붙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와 꽃이 싹을 낼 때 누가 냅니까? 스스로 내는 것입니다.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사랑과 믿음이요, 하나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자들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제가 생명은 일상이라 했습니다. 내가 일상적인 삶을 하루 하루 어떻게 살아가느냐 라는 것입니다. 생명이 일상과 뚝 떨어져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와 백합은 생명에 충실합니다. 오직 생명에만 충실합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에대한 전폭적인 신뢰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이방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나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면, 그것은 하나님의 문제가 되지만, 맡기지 못하면 나의 문제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걱정을 사서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모든 일상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걱정의 삶에서 벗어나는 삶에대해 제안을 하셨습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14:17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

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의와 평화와 기쁨이 그냥 하늘에 떠 있는 의와 평화와 기쁨일까요? 저는 생명이 일상이라 했습니다. 삶이 생명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은 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파트가 없다고, 좋은 차 가지고 있지 않다고, 아이들이 좋은 대학, 소위 좋은 직장 다니지 못한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병이 고통스럽고 힘들겠지만 그래도 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새를 이야기하면서 너희가 새 보다 귀하다고 합니다. 역할이 다릅니다. 새는 의와 평화와 기쁨에대해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구요, 새는 새의 생명에, 꽃은 꽃의 생명에 충실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사람의 생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의와 평화와 기쁨은 생명인 사람이 일상 속에서 풀어내야 할 삶입니다. 소위 피조물 생태계의 최상위에 위치한 사람이 꽃 피워야할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뉘어 사람이 걱정하며 살아가며, 짐승 만도 못한 생명으로 추락하여 하나님을 걱정케 하는 생명이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요? 평화란 무엇인가요? 기쁨이란 무엇인가요?

                                                            먹고 마시지 않는 의가 있나요?

                                             먹고 마시지 않는 평화가 있나요?

                                             먹고 마시지 않는 기쁨이 있나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준다고 합니다. 무슨 도깨비 방망이로 뚝딱 하고 내리 치면 더 해 준다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 첫 마디에 그러므로 라고 하면서 공중의 나는 새와 들의 백합을 보라할 때 그 전에 예수님은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고 하시며 두 마음 품지 말고 한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더하여 준다는 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 돌리기에는 조심스럽습니다. 함정일 수 있습니다. 아니 실제로 솔로몬이 어릴 때 왕이 되어 번제물 1천마리를 드리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할 때, 솔로몬이 판결의 지혜를 달라고 하자 하나님께서

                        “부와 재물과 영화를 달라고 하지 않고, 너를 미워하는 자들의 목숨

                       을 달라고 하지도 않고, 오래 살도록 해 달라고 하지도 않고, 오직

                       내가 너를 왕으로 삼아 맡긴 내 백성을 다스릴, 지혜와 지식을 달라

                       고 하니, 내가 지혜와 지식을 너에게 줄 뿐만 아니라, 부와 재물과

                   영화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후 솔로몬은 그 부와 재물과 영화에 마음이 빼앗겨 이스라엘을 우상을 숭배는 나라로 만들었고, 결국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갈라지는 원인을 제공한 왕이 됩니다.

     주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면서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라 합니다. 어떻게 더하여 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신비로운 풍요로움입니다. 이 풍요로움을 개별적으로 만 풀어낸다면 함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 언덕에서 보리떡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축복하시고 나누자 5천명이 먹고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먹지만 먹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먹고 배부른 것 만 기억하여 수시로 배부른 기억을 되새김질 하였지만 예수님은 먹은 것 기억하지 말고, 영의 양식을 위해 일하라 합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한 술 더 뜹니다. 바로 어떻게 일해야 하냐고 묻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에 매여있습니다. 역시 백합과 새를 통해 그 자유로움과 당당한 아름다움을 배워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생명의 일상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공생애를 살으셨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걱정은 믿음의 결여에서 옵니다. 생명과 하나님, 사랑과 믿음은 모두 하나에서부터 옵니다. 이방인은 그 은혜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생명의 삶을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평화와 기쁨, 감사로, 은혜로 이어지는 자유로운 당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윗 처럼

                               “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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