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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의 역동성 (성령강림 후 일곱째 주일. 2020년 7월 19일)

마중물 | 2020.07.24 10:49 | 조회 826

제목 : 거룩의 역동성

본문 : 누가복음 711~17

 

(11) 그 뒤에 곧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읍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과 큰 무리가 그와 동행하였다.

(12)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고 있었다.
그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13)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

(14)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그래서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 하였다.

(17) 예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대와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지역에 퍼졌다.


 

 



저희 가족은 201712월 둘째주에 고기교회에서 처음으로 예배했습니다. 그때 교회 입구 아기 예수님 탄생 마굿간에는 싸우지말고 평화라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 글귀를 보는 순간 우리의 신앙이 개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삶의 문제들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1년은 지나봐야 고기교회를 알게된다는 어떤 분이 말씀대로 1년 동안은 교회를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겨울에 와서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을 맞이할 때마다 늘 새로운 주변의 자연환경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1년간은 매주 새로운 교회모습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가장 최근에 교회에서 놀랐던 일은 바로 지난주 김지만 전도사님의 설교였습니다. 작년 뉴스앤조이 기사글을 통해 장신대 소식을 들었는데 그때는 김지만 전도사님과 관련이 있는 사건인지 몰랐습니다. 한동안 고기교회에 놀라운 소식이 없었는데 전도사님 덕분에 또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고기교회 강단에 서게 된 저는 여러분들에게 또 작은 놀라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지난주 설교시간 김지만 전도사님이 김현식 전도사님을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교육전도사 시절 때에는 말이지...’하며 아내와 추억에 잠겨 이야기를 나눴는데, 지난 화요일 안목사님께서 제가 설교를 해야한다며 전화를 주셨네요.

 

오늘 저는 누가복음 7장의 본문을 통해 거룩의 역동성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가 성경을 통해 이해하는 우리의 신앙에서의 거룩은 멈춰져있거나 고정되어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레위기의 주제는 거룩입니다. 레위기 1145절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주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하나님의 백성들도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시대의 신앙은 모세시대에는 성막으로 솔로몬 이후에는 성전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임재는 성전의 가장 거룩한 곳 지성소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신앙 이 모든 것이 다 성전중심으로 이해되었던 시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이 거룩함은 특정 장소가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 계시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성전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행렬에 집중해야 합니다.

첫 번째 행렬은 죽음의 행렬이고 다른 행렬은 생명의 행렬입니다.

 

죽음의 행렬과 생명의 행렬이 나인성 입구에서 만납니다. 죽음의 행렬 앞에는 남편도 잃고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행렬 앞에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있습니다. 강렬한 대조가 그려집니다.

 

이 두 개의 행렬이 만나면서 죽었던 과부의 아들이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성경에는 이런 역동적인 설정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동적인 이야기는 늘 강렬한 대조가 설정되어 있고 그 한쪽에는 늘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성경은 문학적인 양식이라는 일반은총에 기록된 특별계시입니다. 문학적인 구조 속에서 강렬한 대조는 역설이라는 문학적 기법으로 표현되고, 강렬한 대조와 역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꿈틀거리는 한마디로 역동적인 신앙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온통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마디로 역설은 논리적 모순입니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이성이 아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기독교의 역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한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100% 하나님, 100% 인간으로 존재하신다.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는다.

그리고...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먼저 죄악이 가득한 인간을 사랑하셨다.

 

이 모든 것들이 논리적인 설명을 할 수 없는 역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들을 진리라고 믿고 있는 우리의 신앙 자체가 역설적입니다.

 

폴 틸리히라는 독일의 신정통주의 신학자는 자신의 저서 신앙의 다이나믹스에서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구분합니다. 틸리히는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은 상징에 대한 이해에서 달라집니다. 거짓 신앙은 상징 그 자체에 머물러 있고, 참 신앙은 상징이 가리키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제가 손가락을 가리키며 여러분 저 하늘에 달이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거짓 신앙은 제 손가락에 머물러 있고, 참 신앙은 제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까지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참신앙을 경험하기 위해 이 사건이 가지는 상징성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7장 앞 사건에서는 로마제국의 장교인 백부장의 병든 종을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고쳐주시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로마의 장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실 필요가 없고 그저 말씀만 하시면 자신의 하인이 낫겠다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힘이 물리적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믿음입니다. 요즘 말로 표현한다면 언택트, 비대면으로도 치유가 가능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직접 나인성까지 찾아오셨을까요? 비대면 사역은 치유까지만 가능하고, 죽은 사람은 불가능해서일까요?

 

누가복음 7장은 네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가 가버나움 백부장의 종을 치유해준 사건, 두 번째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신 사건, 세 번째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당신이 메시아입니까라고 묻는 사건 마지막 네 번째는 용서의 메시지를 담은 사건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이 죄를 사하여주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의 사함은 오직 하나님만 가능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당신이 메시아입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메시아와 관련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들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의 메시아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누가의 기록 722절에서는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구약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 것인데 누가는 특별히 당시의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 또한 복음서들 중에서는 오직 누가의 기록에만 존재합니다. 그리고 더 인상적인 점은 역사학자이면서 의사였던 누가, 의사로서 역사학자로서 객관적인 관점을 가져야 하는 누가는 오직 이 사건에서만 예수님의 감정, 과부에 대한 동정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713절입니다.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

여러분은 거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반적으로 거룩이란... 구별되는 것. 하나님의 임재앞에 서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구별되는 삶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제가 중학생일 때 제 고향에 있는 시골 모교회가 교회당은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로 신축을 했습니다. 당시 저희 학교 다음으로 가장 큰 건물, 높이로 따지면 가장 높은 건물이었습니다. 꼭대기 층까지 4층 건물이었으니까요. 본당의 높은 설교단을 보면서 학생회와 청년들은 연극을 공연하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담임목사님은 예배시간 외에 강대상을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결국 강대상 앞에서 문학의 밤이나 성탄절 행사 등을 해야했습니다. 결국 학생회와 청년들의 지속적인 간청으로 강대상 위에서 연극이나 행사를 하게 되었는데 저는 당시 목사님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아니 한국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을 당연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과 교회와의 단절된 생각으로 성도들은 통합적이지 못하고 분절된 세계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이원론적인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세계관을 태동시킨 신칼빈주의자들의 개혁주의 기독교학교들은 이런 이원론적인 신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기독교학교도 부분적으로 개혁주의의 기독교세계관의 철학을 교육과정에 담고 있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 신앙과 학문, 우리의 믿음과 이 세상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통합적으로 배워나가야 합니다.

 

저는 학교 성경수업 시간에 종종 학생들과 기독교 상징물을 이용한 악세사리에 대해 토론을 합니다. 십자가 목걸이나 귀걸이 등 또는 요즘 핸드폰 꾸미는 장식들도 성경말씀인아 기독교관련 디자인제품들이 많이 나오곤 합니다. 이렇게 거룩한 문장들과 기독교의 상징이 우리 생활의 디자인으로 들어오면 이원론의 문제가 해결이 된 것일까요?

 

우리의 신앙고백과 십자가의 상징은 꾸미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캘리그라피로 쓴 아름다운 성경구절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며 개인적인 위로와 만족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성도로서 어떠한 삶이 거룩을 지향하는 삶일까요?

우리가 거룩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구원자로 믿고 그분의 삶을 본받아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는 스위스 개혁교회 신학자인 레온하르트 라가츠의 신앙고백의 의미에 대한 글을 통해 거룩한 삶의 한 부분을 보았습니다. 레온하르트 라가츠는 종교사회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신학자입니다. [예수의 비유]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지 못했고, J.M 로호만의 [사도신경 해설]에서 레온하르트 라가츠의 글을 인용한 것을 읽었습니다. 레온하르트 라가츠가 말하는 신앙고백은 무엇인지, 제가 로호만의 책에 소개된 글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도그마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런 인상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그것은 거부감을 안겨주고, 어디까지나 죽은 사실일 뿐이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진리를 고백하고 주장해야하는 기회와 의무는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바알, 즉 피와 땅, 종족과 문화의 신화에 대하여 반대한다. 또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일체의 통제를 반대한다. 우리는 새로운 가이사, 즉 국가의 신화에 대하여 반대한다.

우리는 기계와 기술을 신성시하는 것을 반대한다. 우리는 맘몬의 지배와 군국주의의 괴물에 반대한다. 우리가 이러한 힘들에 결연히 저항하고 인간, 영혼, 정신, 인격, 정의, 사랑을 옹호하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영이고, 그의 진리이다.”

 

- 레온하르트 라가츠(J.M 로호만, [사도신경 해설]에서 인용)

 

여러분 강남스타일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여러분은 어떤 것이 강남스타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혹시 강남역에서 거룩한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지난 1년동안 강남역 사거리를 지나가면서 거대한 중세교회와도 같은 대기업 권력앞에 꺼지지 않는 작은 촛불으로 맞섰던 거룩함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시대의 물질주의 오만함, 거대기업의 횡포에 맞서는 것 또한 거룩의 한 모습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으로 오늘의 본문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지금 거룩한 신비의 자리(A place of Holy Mystery)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일하고 계심을 깨닫고는 조용히 경배했다. 그러고는 떠들썩하게 감사하며, 서로 큰소리로 외쳤다. 하나님이 돌아오셔서, 자기 백성의 필요를 돌보아주신다.”

 

우리가 읽은 새번역 성경에 없는 표현이 나옵니다. 바로 거룩한 신비의 자리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구약배경으로 본다면 오직 거룩한 시온산, 그리고 예루살렘, 그 안에 있는 성전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메시지 성경은 예루살렘이 아닌 남편과 아들을 잃은 과부가 사는 가난한 동네 나인성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의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는 표현을 메시지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돌아오셔서, 자기 백성의 필요를 돌보아주신다.”고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 또한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봉헌할 때 하던 기도문의 내용과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구약 배경에서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이라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성전은 지금 남편과 아들을 잃은 한 가난한 과부와 함께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것이 가장 비천하고 낮은 자리에 오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이자 거룩입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거룩한 삶은 소외되고 낮고 천하고 사람들이 외면하는 곳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움직입니다.

 

히브리서 4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낸다.’

고 말합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의 혼과 영을 가르고,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내는 것처럼 성도들의 거룩한 삶도 고정화되거나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나인성의 홀로되고 경제적인 자립을 할 수 없는 과부를 직접 찾아가신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 소외되고 차별받고 애통해하는 사람들에 다가가는 역동적인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 억울한 자들, 압제받는 자들과 함께 하는 삶은 진보적인 삶이 아닙니다. 그러한 삶은 정치적인 구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거룩의 역동성, 우리가 거룩한 무리인 성도로서 살아내야 할 삶의 또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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