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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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강림후 여섯째 주일. 2020년 7월 12일)

만지다 | 2020.07.12 23:23 | 조회 831

 

1) 교회 내 성담론

제가 오늘 설교를 맡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부터,

과연 이 자리에서 어떤 말씀을 나누면 좋을까를 한참을,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10일 금요일이 돼서야,

이제는 미룰 수 없다라고 생각하며, 말씀의 주제를 겨우 정하고 설교문을 써내려 갔습니다.

,,, 저는 오늘!

우리 고기교회 공동체에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주의 깊게 반응하지 못했던 주제에 대해서, 같이 말씀으로 나눠보려고 합니다.

바로 페미니즘’/‘여성주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오늘 페미니즘/여성주의에 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것은,

아무래도, 지금 제가 처한 상황과도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 사랑하는 고기교회 공동체로 올 수 있게 된 이유와도 관련되어 있는 것인데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학교에서 성소수자 차별을 반대하는의미의 행동했다가,

학교로부터 고발당하고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학교와 또 이전에 사역하던 교회,

그리고 우리 교회가 속해있는 예장 통합 교단으로부터,

거의 쫓겨나게 된 상황을 겪었고, 그 상황은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쫓겨난 저를 우리 고기교회 공동체가 따스하게 맞아 주셨는데요...

아무튼 이러한 상황 속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기독교 내에서의 젠더이슈와 성담론, 저에게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관심이자 주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교회 내의 성담론들,

특별히 그동안 교회 안에서, 숨겨져 있어야만 했던 성소수자들의 이야기, 여성들의 이야기들이,,,

그 제가 경험한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단순히 저의 삶의 상황들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젠더 갈등으로까지 불리는 성담론은 아주 오래 전부터 쉽사리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 앞에 놓여있고,,,

그리고 지금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도 역시,

매일매일 성담론 차원에서의 사건들이 나타나며, 심화되고 있습니다.

올해 초,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라든지,

그리고 얼마 전, 21대 국회에 발의되었던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든지,

또 이번 주에 논란의 여지를 남기면서, 다소 간의 안타까움과 실망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던 누군가의 죽음이라든지,,,

이렇게 성담론 차원에서 논의되고, 갈등으로 이어지는 일들이 바로 우리 눈앞에 놓여 있습니다.

교회는 결코 사회와 분리된 곳이 아닌, 참여의 주체로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에,

사회 안에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기 위해선,

지금 대두되고 있는 현대 사회의 성담론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담론을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관점에서 다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물론 남성으로의 정체성을 가진 제가 페미니즘, 여성주의라는 주제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여성 당사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여성주의를 말한다는 게 매우 조심스럽고, 어렵게 느껴지도 합니다.

그러나, 숨겨져 있던 담론들은, 부족함을 시작으로 해서라도, 드러나야 합니다.

이렇게 남성으로의 정체성을 가진 저를 시작으로 해서라도,

여성주의에 대한 담론이, 나아가 모든 성 정체성에 대한 담론이,

우리 고기교회 안에서, 더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나누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여성주의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2) 마르다님과 마리아님의 이야기

먼저, 오늘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어떤 한 마을에 들어섭니다.

그 마을에 들어선 예수님은 마르다라고 하는 한 여성의 집에 초대를 받습니다...

! 이제부터는 제가 오늘 말씀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말할 때,

예수하고, 이렇게 자를 붙이는 것처럼,

모든 인물들에게 존중의 의미를 담아서 모두 자를 붙여서 언급하려고 합니다.

다소 간에 어색하고 낯설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오늘의 주제가 주제이다보니,,,

여성주의의 근본이 되는 가치인 존중과 동등함의 의미를 담아내는 것이구나

하고서,,, 기억해주시면서, 잘 감안해서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마르다님은 정성을 다해,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합니다.

마르다님의 그 대접함은 매우 분주했다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분주하게, 예수님과 당신의 제자들을 대접할 식사를 준비하고,

또한 불편한 것이 없나를 계속해서 살피며, 편안한 공간과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을 것입니다.

 

한편, 마르다님의 집에는 그의 동생, 마리아님이 함께 있었는데,

마리아님은, 대접함으로 분주한 마르다님과는 다르게,

제자들 무리에 섞여 앉아서, 마치 제자인 것처럼,

심지어는 가장자리나 끝자리가 아닌,

예수님의 발 곁에, 바로 그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아주 중심이 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님은 이러한 마리아님의 모습을 보고,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만 일하는 상황에 대한 이기적인 마음으로 비롯된 불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분명 남성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여성은 사회적으로 열등한 위치에서 남성에게 종속되어 수동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의 그 남성과 여성의 다름에 대해 진술해본다면,

여성은, 남성의 자리에 섞여 있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것이 어떤 선생님의 가르침을 듣는 자리라면, 더더욱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여성은, 선생님의 가르침의 자리에서, 남성의 자리에서 배제된 존재였습니다.

당시 여성은 그저 가장자리에서, 변두리에서, 분주하게 대접하는 일을 하는 존재였습니다.

앞선 마르다님의 말은, 이러한 가부장적인 인식과 상황 속에서 말해진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유대사회의 규범을 따르지 않은 마리아님에 대한 수치, 부끄러움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과 함께하던 남성 제자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침범한 마리아님을 향해 눈치를 주고 있었던 상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치가 빠른?! 마르다님이 그것을 알아채고, 그러한 말을 했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저는 마르다님의 말에서 어떠한 모순되는 지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맨 처음,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한 사람이,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있던 마리아님이 아닌,

분주하게 일을 하던 마르다님 임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다님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 이유, 본래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냥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셔놓고, 그저 분주한 일을 하기 위해서 초대했던 것일까요?

마르다님은 정말로, 예수님과 당신의 제자들을 대접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충분해하며,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한 목적을 이뤘던 것일까요?

 

그것은 분명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르다님도,,, 제자들처럼, 그리고 마리아님처럼,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가까이서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실, 당시 가부장적인 유대사회의 규범 안에서, 한 여성이 처음 만나는 남성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것은 물론,

먼저 말을 거는 것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획기적이고 센세이셔널한 일이었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껴서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들었던 마리아님 못지 않게,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마르다님 역시도 매우 도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도전적인 일을 실행했던 마르다님이야말로,

그 자리에 있던 그 어떤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듣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분명, 마르다님은 예수님의 말씀, 가르침을 어떻게서든 듣기 위해서, 듣고 싶어서,

감히 규범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했지만,

결국, 유대사회의 규범이 마르다님에게 다시 커다란 벽과 유리천장으로 작용하면서,

마르다님이 스스로를 제한하게 만들었고,

마르다님의 자리와 권리를 빼앗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르다님도, 마리아님의 자리를 빼앗고 싶지 않았겠지만,

여성의 빼앗김이 정당화된 환경과 상황 속에서,,,

마르다님은 마리아님을 예수님께 부당하게 고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이 마르다님에게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님, 당신은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군요.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입니다. 마리아님은 좋은 몫을 택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무도! 마리아님에게서! 그의 자리와 권리를 빼앗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심으로,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뺏아긴 상태로 있었던 여성의 자리와 권리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결코! 남성의 자리와 여성의 자리가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그 자리와 권리는, 원래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져 있던 것 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의 자리이고, 하나의 권리입니다.

그것은 성을 기준으로 나누어지는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한 자리에서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어느 권리나 어느 자리도 빼앗기지 않는 것이 바로 주님의 일입니다.

그것은 분리되어 떨어져 소외되어 있었던 여성들을 향한 기쁜 소식,,,

바로 복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마르다님에게, 앞서 하신 말씀은,

다소 간에, 비난과 비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마르다님을 향한, 자리로의 초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르다님, 아무도 당신의 자리와 권리를 빼앗지 못합니다!”라고 하는 예수님의 위로이자, 응원의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리를 빼앗긴 마르다님의 자리를 회복시켜주시고 확정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남성 제자들을 향해서,

마르다님의 자리에 대하여 확실하게 선언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의 41절부터 42절의 말씀의 이면에,

이런 뜻이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마르다님! 당신의 자리와 권리를 빼앗길 염려는 하지 마세요.

마리아님과 같이, 당신의 좋은 몫이 여기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여기 와서 같이 가르침을 들으세요!

똑같이 가르침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당신의 의견을 당당히 말해주세요!

그리고나서 우리 모두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식탁의 교제를 합시다!”

 

3) 자리를 빼앗지 않는 것

오늘 제가 이렇게 여성주의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면서,,,,

2012년에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실시하였던, 20대에서 40대까지의 교회 여성 1,340(천삼백사십)명을 대상으로 한 교회 내 여성의식조사 발표자료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발표를 보면, 여성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로,

교회 내 불평등한 성 역할과 성차별, 소통 부재 등이 꼽혔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내 성차별 개선과제에 대한 응답으로는,

여성리더 할당제, 고정된 성 역할 및 여성 차별과 배제 해소,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여성참여 보장 등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응답들은 당시에, 남녀 모두 동등하게 예수님의 제자로 있어야 하는 교회가,

여성들의 자리와 권리를 빼앗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와 권리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조사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교회에서의 상황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차별과 배제 등의 이유로 여성들이, 교회에서 고통받거나, 떠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고기교회는,,,

이러한 여성주의 주제에 대해서,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무언가 비교를 해서는 안될 일이지만,

저는 확실히 우리 고기교회 공동체가, 다른 많은 교회 공동체들에 비하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관점에서의 여성주의를 실천해내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잘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했던,

그러면서 그냥 넘어간 상황들과 외면되었던 목소리도 분명 존재합니다.

 

작년 하반기, 청년부 모임에서는 교회 안에 성평등 위원회가 세워지면 좋겠다는 논의가 시작된 적이 있습니다.

그 논의 속에서, 우리 고기교회 안에도 오랫동안 고정되어버린 성 역할이 존재하고,

여성의 목소리가 나타나기 어려운 구조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여성들에 대한 어떤 크고 작은 차별과 피해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제대로 다루어지고 회복될 어떠한 창구나 자리도 없이,

우리는 잘하고 있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라는 식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숨겨져 왔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난 청년부 내의 성평등 위원회에 대한 논의도 잠시 멈춰있는 상태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당연히 우리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었던 차별과 피해를 마주해야 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관점에서, 마주한 문제들을 고쳐가야 합니다.

분명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어렵고, 불편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렵지만 옳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그렇게 좁은 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가, 우리 고기교회 공동체를 보다 더,

주님이 머리되신 교회의 모습으로 다듬어져 가게 할 것이고,

또한 이 세상 가운데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의 발걸음이 될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우리 성도님들께, 먼저,

여성주의적 성서읽기를 제안 드립니다.

그동안 성서가 전통이란 이름 아래, 남성의 서사 중심으로 읽혀져 왔고,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오랜 교회에 역사 동안에, 성서 속 여성은,

남성 서사 중심 안에서, 남성의 도구와 대상으로 소비되고,

때로는 순종과 헌신의 이미지로, 때로는 유혹자나 부정함의 이미지로 그려졌습니다.

심지어는 야곱의 딸 디나님이 성폭력을 당한 이야기에서조차도, 그것이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킨 사건으로 여겨지며, 디나님이 비판받던, 한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 정도까지가 아니라더라도,

남성 중심의 성서 읽기가 익숙한 환경에서는,

결코 교회 여성의 자리와 권리가 회복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성주의적 성서 읽기를 통해서,

성서 속 여성들의 서사들을 발견하고 회복해야 합니다.

왜곡되어 있던 성서 속 여성의 이미지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우리들에게,

여성의 교회 내에서 빼앗긴 자리와 권리를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찾아보면 성서에는 생각보다 많이,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선지자 훌다님과 사사 드보라님,

상속권을 당당히 요구한 슬로브핫님의 따님들,

도래할 메시아의 나라를 예언한 한나님,

나라와 민족을 구한 에스더님,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서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한 어머니 마리아님,

예수의 부활의 첫 증인이자 전달자인 막달라 마리아님,

또한 오늘 말씀에서의 도전적이며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마르다님과 마리아님,

이외에도 시대의 성적 편견과 가부장적 한계에 매이지 않았던 여성 제자들의 이야기들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발견하고 읽는 것을 시작으로,

성서 속 더 많은 여성주의적 서사와 해석들을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와 함께, 제가 또 한 가지 제안드리는 것은,

우리 고기교회가 지금보다도, 더욱 더, 여성리더십을 세우기를 힘쓰고,

여성이 참여하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고정된 성역할, 호칭, 태도 등을 변화시키는 모든 일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아름다운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평등, 포용, 돌봄과 섬김을 위한 친교 공동체입니다.

그것에는 결코 남녀의 구분, 나아가 모든 성의 위계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남성과 여성,,, 모두는 동등한 파트너로서,

하나님의 언약과 섭리에 따라 제사장적 지도권을 함께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며, 피조세계를 함께 돌보며,

주님의 복음전파 사명을 위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함께 헌신해야 합니다.

여기에 배제와 차별의 공간은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현대 신학자 한스 퀑에 따르면,

처음의 교회는 권력기관이나 재판소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들의 친교 공동체였고,

어떤 계층이나 인종, 목사의 교회가 아니라

동등함을 원칙으로 하는 공동체였으며,

가부장적 조직이 아니라 자매들과 형제들의 공동체였다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이 머리가 되시는 교회는,

남성이 여성에게 열리고, 여성이 남성에게 열리면서,

모든 성이 공존하고 화해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나가는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4)결론

이제, 앞서 드렸던 말씀을, 다시 한번 재언하며, 오늘 저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드러나지 않았던 차별과 피해를 마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관점에서 회복시키기를 힘써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무심코 빼앗기고 있었던 여성들의 자리와 권리들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러면서 여성의 자리, 남성의 자리 구분이나 위계없이,

어느 자리도 빼앗지 않으면서,

우리는 하나의 자리로,,,

우리 교회의 이름처럼, ‘처음 자리!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어떠한 한 가지 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교회의 온전한 모습이 되는 과정 속에서 실천되는 것임을

이 시간 우리 고기교회 성도님들께서 함께 기억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기도로 이 시간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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