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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성령강림후 다섯째 주일. 2020년 7월 5일)

김현식 | 2020.07.07 13:48 | 조회 1142

사사기 2116-25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서는 자리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는 말이 있는데, 앞에 서니까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제가 전하더라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저의 부족함에 가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기에 오늘의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잘 들어본적 없는 말씀일것입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단락인 본문은 19장부터 시작되는 사사기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마무리 하는 부분입니다.

 19장부터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때에, 한 레위 남자가 에브라임의 산골에 들어가서 살고 있었다. 그는 유다 땅의 베들레헴에서 한 여자를 첩으로 데려왔다.”

 뭔가 싸한 기분이 들지 않으십니까? 이야기의 시작부터 꼬여있는 느낌입니다. 레위인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전담해서 맡는 가문 사람들입니다. 에브라임의 산골에서 살고 있었다고 번역된 단어는 거주지가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뜻입니다. 레위인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생업을 위한 일을 하지 않는 대신 지역 사람들이 안식일에 제사를 위해 바치는 제물과 십일조로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레위인이 떠돌아 다닌다는 것은 그의 생계에 문제가 있는, 종교적 타락상을 보여줄 때 흔히 나타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가 저 멀리 베들레헴에서 여자를 첩으로 데려왔다? 무슨 이야기가 진행되는 걸까요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첩이 화가 나서 친정으로 돌아가서 4개월을 지냅니다. 그러자, 레위인은 그녀를 데리러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장인은 그를 맞아들여서 딸을 돌려보내기로 하고 3일간 사위를 대접합니다. 나흘째 돌아가려는 그를 장인이 붙들어 하루를 더 보내게 되고 닷새째도 장인이 붙들어 저녁에야 길을 떠나게 됩니다. 아마도 장인은 딸을 잘 봐달라는 의미로 사위를 붙잡아두고 싶었나봅니다. 8km쯤 가니까 예루살렘이 나타났는데, 당시에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8km를 더 가 이스라엘 민족인 베냐민 지파가 사는 기브아라고 하는 동네에 들어갑니다. 당시 관습은 여행자가 나타나면 누구나 그를 맞아들여서 대접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기브아에서는 그들을 맞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해가 질때에야 한 노인이 그들을 맞아들였는데, 노인은 에브라임출신으로 그 마을에서 살고 있는다시 말해 그 역시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시간을 보낼 즈음 기브아에 사는 불량배들이 집을 둘러싸고 대문을 두드립니다.

 “그 남자를 끌어내시오. 우리가 그 사람하고 관계를 좀 해야겠소

 관계를 한다는 단어는 야다라는 단어인데, “알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주로 성적인 앎. 그러니까 성관계를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불량배들은 지금 집단 성폭행을 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노인이 불량배들을 달랩니다.

 “이 사람은 손님이니, 그에게 악한 일을 하지 마시오, 제발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마시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상한 제안을 합니다.

 “여기 처녀인 내 딸과 그 사람의 첩을 내가 끌어내다 줄 터이니, 그들을 데리고 가서 당신들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이 남자에게만은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마시오

 하지만 불량배들은 듣지 않았고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레위인은 첩을 밖으로 밀어냅니다. 불량배들은 밤새 첩을 윤간하고 새벽에야 놓아줍니다. 동이 틀때야 집 문에 도착한 첩은 그 앞에 쓰러집니다. 아침이 되어 집을 나선 레위인은 문앞에 쓰러진 첩을 보고 같이 가지고 말하지만, 답이 없습니다. 레위인은 여인의 주검을 타고온 나귀에 실어 고향으로 돌아간 후 시신을 열두 토막으로 잘라 이스라엘 각 지파에 보냅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은 충격과 당혹감에 빠져서 우리가 이집트에서 나온 이후에 이런 일은 듣도보도 못했다. 이에 대해 의논해보자고 하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매우 끔찍하지 않습니까? 마치 잔인한 스릴러 영화같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 이야기가 조금 익숙하시지는 않나요? 창세기에 나오는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 이야기가 이와 비슷합니다. 소돔에 사는 롯에게 천사 둘이 소돔의 심판을 경고하러 가자 소돔사람들이 지금 들어간 사람을 끌어내서 관계를 해야겠다고 말합니다. 재미있게도 두 이야기는 모두 19장에서 벌어집니다. 악이 넘쳐서 심판을 받아 멸망했던 소돔에서 벌어졌던 일이 지금 이스라엘의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창세기에서는 천사들이 소돔사람들의 눈을 멀게 해서 상황을 모면하지만 사사기에서는 레위인이 직접 자신의 첩을 불량배들에게 넘겨준다는 점입니다.

 

 자, 이 끔찍한 이야기를 듣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201절을 보면 북쪽의 단부터 남쪽의 브엘세바까지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모였다고 기록합니다.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라는 표현은 우리식으로 하면 한라에서 백두까지 이런 느낌입니다. 전국에서 다 모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이 레위인에게 진상설명을 요청합니다.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다 대신 첩을 폭행해서 죽였다고 이야기하면서 이제 여러분의 생각과 대책을 내놓으라고 소리칩니다. 그의 진술은 사실의 왜곡입니다. 목숨을 건지려고 첩을 문밖으로 끌어내어 밤새 내버린 자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제비를 뽑아 각 지파에서 병력을 차출해서 기브아 사람들을 응징하기로 결의합니다. 이때 모인 병사가 40만명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에 사람을 보내 기브아에 있는 불량배들을 보내 치리하게 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싸우려 기브아로 모입니다. 15절은 모인 병력이 기브아 중에서 700, 베냐민 지파에서는 26천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머지 11지파와 베냐민 지파간의 내전이 벌어집니다. 베델로 가서 하나님께 여쭤봅니다. 어떤 지파가 먼저 싸워야 할까요? “유다 지파가 먼저 가라그래서 유다지파가 나가서 싸웠는데 22천이 죽는 패배를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계속 전쟁을 해야 하는지 울며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올라가서 싸워라!” 였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전투에서도 베냐민 지파가 승리해서 이스라엘 총회는 만8천명이 전사합니다. 총회는 비통한 마음으로 언약궤가 있고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있는 베델 성소로 올라가 금식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울며 다시 전쟁을 해야 하는지 물었고 하나님은 내일은 틀림없이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답을 주십니다.

 세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매복과 양동작전을 구사합니다. 베냐민을 공격하는 척 하다가 도망을 나오고 골짜기에 매복했던 군사들이 베냐민을 쳐 군사 600명을 제외한 25천을 죽입니다. 그리고 기브아 성안으로 진격해서 남녀노소 모두를 죽입니다. 도망친 600명은 바위굴에 숨어 네달을 버팁니다.


 전쟁이 이렇게 흘러가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신이 들었습니다. 12지파중에 한 지파가 거의 망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총회가 모일 때 이렇게 악한 일을 저지른 베냐민 사람에게는 딸을 주지 말자! 하고 맹세해버렸기 때문에 남은 600명도 자손을 이어갈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베델에 모여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그리고 총회에 모이지 않은 지파가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누구든지 미스바에 모이지 않은 지파는 죽이기로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길르앗 야베스에서는 참여하지 않았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을 근거로 회중은 가장 잘 싸우는 만2천명을 보내서 길르앗 야베스를 징벌합니다. 남녀노소를 죽이고 처녀 400명을 끌고와 남은 베냐민 사람들과 결혼시킵니다. 그런데 아직 짝이 없는 200명이 남아있지않습니까? 그래서 짜낸 방법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매년 실로라는 동네에 주님의 축제때 춤을 추러 나오는 여인들을 납치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의 가족이 시비를 걸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알려줍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 남자들은 그 방법대로 여자들을 납치해서 소멸 위기를 벗어납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기분이 어떻습니까? 뭐 이런 이야기가 있나 싶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다 잘못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목이 꽉 막히는 고구마 같은 이야기라고 해야겠지요.

 우리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감동과 은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타락한 시대의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첩을 잃어서 분노하는 레위인이나 기브아를 공격하는 이스라엘 사람이나 자신들은 정의롭다고 생각하며 분노하지만, 사실은 분노할 자격 없는 자들임을 성경은 보여준다. 정당하게 분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사실 사사기 전체는 이스라엘의 처절한 실패를 보여줍니다.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 사망 이후 바로 타락의 길로 빠져듭니다. 사사기에서는 주님이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다는 표현이 7번 반복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고통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자, 즉 사사를 세우십니다.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이끌어 승리하고 이후 몇 년간 안식을 누립니다. 이것이 하나의 패턴이 되어 사사기 내내 반복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타락상은 심해지게 돼서 사사조차도 타락하게 됩니다. 300용사로 우리에게 익숙한 기드온은 아들만 70명이었고, 마지막 사사인 삼손은 방종한 삶을 살다가 마지막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삼손이야기가 끝난뒤인 17장부터는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라는 표현이 네 번 반복되면서 이스라엘의 타락상이 정치적 지도자인 사사뿐만 아니라 종교적 지도자인 레위인에게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는 두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택한 민족인 이스라엘에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시기적으로 이스라엘은 왕정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없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기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왕정제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되신 하나님을 모시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가 계속해서 강조했던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행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의 뜻대로 사니까 소돔과 고모라에서 일어났던 일이 이스라엘 한복판에서도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이 없었다는 말처럼 하나님은 그들은 떠나신걸까요? 타락한 이스라엘을 두고 보시며 방관하고 계신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하셨습니다.

 타락한 사사의 대표라고도 볼 수 있는 삼손은 자기 마음대로 살았지만 죽음의 자리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야 처음으로 나의 주여! 여호와!”라고 부르며 이번 한번만 더자신을 강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삼손이 눈먼 상태에서 여호와가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간청하자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해주셨습니다계속해서 실패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사를 보내주셨습니다. 동족을 공격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응답해주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응답해주실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성호 계약관계이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19장을 보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여호수아 24장에도 여호수아가 죽기 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언약을 강조합니다.

당신들은 이제 주님을 경외하면서, 그를 성실하고 진실하게 섬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상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섬기십시오.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백성들은 대답했습니다.

 "주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은 우리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을 이집트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 큰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또 우리가 이리로 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고, 우리가 여러 민족들 사이를 뚫고 지나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모든 민족을, 이 땅에 사는 아모리 사람까지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약은 상호간에 맺는 것입니다. 한쪽이 어기면 파기됩니다. 더 이상 언약을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살펴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옳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포기하시지 않고 고통에 부르짖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사사를 보내주시고 그들을 구원해주십니다몇 번이나? 일곱 번이나. 일곱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완전수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칠일째에 안식하시고 특별한 제물은 7마리씩 바찹니다. 신약에서도 일흔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계시록에서도 7교회, 7개의 봉인 7재앙등. 일곱 번 반복되는 타락의 패턴은 역으로 완전하게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자손을 별과 같이 번창하게 하시며 가나안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대의 관습은 계약을 맺을 때 짐승을 잡아 세로로 쪼개놓고 계약의 당사자가 그 사이로 지나갑니다. 이것은 이 계약을 지키지 않으면 내가 이 제물처럼 쪼개져도 할말이 없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자는 사이 하나님만이 그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이후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도, 그 이후로도 타락은 심해져 결국 하나님은 선택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해서 멸망시키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세상 모두를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스라엘이 스스로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게 타락을 피할 길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없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왕이 아닌 자신의 고난을 해결해 줄 해결사로만 여겼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왕을 왕되게 해야 합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왕을 왕되게 했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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