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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성령강림후 넷째주일, 2020.6.28.)

mungge | 2020.06.29 22:07 | 조회 1056

말씀 본문: 눅가복음 15장 25~32절 (11~32절)
제목: '함께'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설교: 김준표 목사

오늘의 말씀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예수님의 비유 중 하나입니다. 보통 탕자의 비유라고 알고 있습니다. 비유는 짧은 문장으로 압축된 표현을 쓰는 것이 보통인데, 이 비유는 분량이 가장 깁니다. 읽다보면 영화 한편을 보는 듯한 생생한 이미지를 전해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내용이 생략되어 있어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무대위에 올려진 하나의 연극이라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1: 작은 아들의 떠남과 몰락

작은아들이 갑자기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며 떼를 씁니다. 아버지 재산 가운데 유산으로 받을 자기 몫을 미리 달라는 겁니다. 이 작은아들은 부모 속을 많이 썩였던 자식인 것 같습니다. 만약 이 작은아들이 이런 요구를 요즘시대에 했다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이런 행위는 아주 진취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헤쳐나가려 하는 감탄할 만한 의지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는 전혀 아닙니다. 이러한 요구는 아버지에 대한 공격으로 아버지에게 빨리 죽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자식에게 유산을 나눠줄 때 무조건 큰 아들에게 2/3를 주고, 나머지는 남은 자식들에게 나눠주라고 율법으로 정했습니다. 가족의 땅을 지키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산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새번역에서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눠주었다는 표현은 그리스어 본문에서 생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요청에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들려주는 이 비유에 청중들은 시작부터 경악 했을 듯합니다.

이 작은 아들은 정말 부모에게는 큰 골칫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이 작은 아들의 일탈과 반항은 결국 당시 유대인들이 자신의 생명과도 동일시했던 종교에 대해 배교의 길까지 이어집니다. 부모에게 받은 꽤 많은 재물을 모두 유흥에 탕진하고 알거지가 된 다음에 작은 아들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몸을 의탁합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는 돼지를 키우는 사람이었습니다.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니 먹지 말라는 모세의 율법에 신경도 쓰지 않는 이방인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부정한 동물을 만져서도 안 되는데, 작은 아들은 그렇게 조상대대로 이어져온 모세의 율법을 너무도 쉽게 무시하고 제 목숨을 연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망나니도 이런 망나니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이 아들이 그렇게 인생의 밑바닥에 완전히 떨어져서야 제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아하! 내가 아버지와 같이 있었더라면 이렇게 비참하게 굶어죽지는 않았을 터인데...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죽을 죄를 지었다고 이야기하고 자식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테니 일꾼으로라도 받아 달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면 이 작은 아들이 정말 마음으로 깊이 회개하고 뉘우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 직접적인 표현도 없고, 말의 뉘앙스는 어휴 내가 이렇게라도 해서 살아야하지 않을까!’라는 궁여지책 같은 느낌입니다.

 

2: 아버지의 자비로운 환영

작은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는 집 앞 작은 언덕에 올라 매일 마을 입구를 쳐다봅니다. 망나니 같았던 작은 아들이 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겠지요. 나중에 큰 아들이 돌아온 아우에 대해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버렸다.’ 고 평가하며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면 아버지도 그 소문을 분명히 들었을 겁니다.

하루 종일 하염없이 마을 입구를 지켜보던 아버지는 비참한 모습의 거지꼴을 한 사람이 저 멀리서부터 비틀비틀 걸어오는 것을 보자 금방 작은아들인 것을 알아채고 그에게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냄새나는 거지꼴의 작은아들을 끌어안고 얼굴에 입맞춤을 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오면 청중들은 처음보다 더 놀라게 됩니다. 우선 아버지에게 몹쓸짓을 한 괘씸한 둘째아들이 어떻게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세오경은 율법에 순종하는 이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율법에 불순종하는 이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으리라는 모세의 유언과 당부로 마무리됩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엄격하게 작은아들을 꾸짖고 다시는 그런 못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너무 유약합니다. 아니 꼭 어머니와 같은 성품을 보여줍니다.

고대근동지역에서 아버지는 가족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만큼 아주 엄격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유산을, 자신의 생명을 미리 달라는 요구에도 순순히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거지가 되어 다시 돌아온 아들을 멀리서 지켜보고 그를 가엾게 여겨서 먼저 달려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아버지는 누구보다 자비로운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작은아들이 측은히 보이다라는 번역은 헬라어로 자비를 보이다라는 뜻을 지닌 스플랑크 니조마이로 포현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 창자를 뜻하는 스플랑크논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애절한 감정입니다. 그 정도가 애간장이 녹고, 창자가 끊어질 듯한 아픔과 고통 가운데 나타나는 연민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하나님 자비의 넓이와 깊이는 우리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습니다.

 

3: 큰 아들의 분노

앞의 잃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드라크마 비유와 연결 지어 생각한다면 이제 3막은 즐거운 축제와 잔치로 무대를 꾸며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3막에서는 큰 아들이 등장하면서 묘한 갈등이 첨예하게 뻗어갑니다.

밭에서 한참을 일하다 돌아온 큰아들은 집앞에 이르러서 음악소리와 춤추며 노는 소리를 듣고 의아해 합니다. 종 하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거지꼴로 돌아온 아우와 그를 환대하고 잔치를 열어 받아준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자 여러분이 큰아들이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 비유 속에 등장한 큰 아들은 종의 말을 듣고 아버지에게 화를 크게 냅니다. 집으로 들어가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잔뜩 골이 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달래려고 나온 아버지를 향해 이렇게 소리치며 울부짖습니다. “나는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나를 위해서는 조그마한 잔치자리도 마련해 주지 않았으면서...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큰아들이 충분히 화가 날만하지 않습니까?

작은아들이나 큰아들 모두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버지의 반응을 보십시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내쫓을 수도 있고, 집안 어딘가에 반성하고 뉘우칠 때까지 가두어 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작은아들에게 그랬듯이 큰아들에게도 무한한 자비의 모습을 보이십니다. “얘야하고 부드럽게 큰아들을 부르시고,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라고 조용히 타일러 주십니다.

약간 불쌍해 보이고, 억울해 보이는 큰 아들은 도대체 무얼 잘못한 걸까요? 우직하게 아버지 말에 순종하고 가족을 위해 묵묵히 일해 온 큰아들인데, 왜 이 연극에서 거지꼴이 된 작은 아들보다 더 어리석고 비참한 아들로 저에게는 보일까요?

작은아들은 아버지에게 대놓고 반항하고 거슬렀다면, 큰아들은 아버지를 잘 몰랐습니다. 아버지를 잘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잘못입니다. 본인은 아버지를 섬기고,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다고 소리쳤지만 이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섬긴다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잘 헤아리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큰아들이 아버지와 함께작은아들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즐겁게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함께라는 단어는 아주 중요합니다. 앞의 두 비유에서도 강조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후 주인은 벗과 이웃들을 불러모으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드라크마 열 개중 하나를 잃었다가 찾은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아버지를 섬긴다는 것은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아버지는 어떤 분입니까? 권위와 독선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가 아닌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아버지입니다. 자식의 잘못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잘못된 길에서 스스로 깨우쳐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인자한 아버지이십니다.

이런 아버지의 성품을 알고 닮아가려 했다면 큰아들은 아우에 대해서 그런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네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은 눈에 보이는 재산만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성품을 닮으라는 조용한 타이름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그런데 끝맺음이 뭔가 이상합니다. 그래서 큰아들이 잔치에 참여해서 함께 기뻐했다는 건지, 아니면 여전히 화를 삭이지 못하고 집밖에서 씩씩거리며 있었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훨씬 시간이 흘러 아버지가 죽었을 때 두 아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이 이어졌습니다. 가인과 아벨처럼 형제갈등이 깊어져서 살인까지 가지는 않았을지, 아니면 야곱과 에서가 극적으로 서로를 포옹했던 것처럼 서로 용서하고 화해했을지 말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마지막 장면을 이어가라고 말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갑자기 70년전 돌이킬 수 없는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 원수처럼 등을 돌린 남과 북의 상황이 떠올랐습니다. 앞으로 남과 북은 갈등과 다툼이 더욱 깊어져서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갈까, 아니면 화해와 용서와 협력으로 새로운 한반도의 이야기를 써내려 갈까? 저는 두 형제가 진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게 되고,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모습으로 이야기의 끝을 맺고 싶습니다. 우리 남과 북의 이야기도 그렇게 써내려가기를 희망합니다.

 

, 하여튼 예수님이 들려준 이야기는 아쉽게도 열린 결말로 3막에서 마무리 되었습니다. 저는 이 연극을 상상하며 또 스스로에게 질문했습니다. “나는 큰 아들인가, 작은 아들인가하나님이 이 땅을 향해 세우신 큰 구원의 뜻인 하나님 나라를 거슬러 살아가는 작은아들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닮으려고도 하지 않는 큰아들인가. 여러분들은 어떤 아들입니까?

그러나 이 질문에 너무 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들려준 이야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고, 그들 모두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아들의 모습이라도 하나님은 얘야~”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안아 주십니다. 이 진실을 보시고, 이 진리 안에 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깨닫고 그 자비의 품안에 살며, 그 자비를 닮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아니 나 때문에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니 어서 하나님 품에 안겨 그 분 안에 있는 모든 풍성한 것을 맘껏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감싸고 흠뻑 젖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 이웃에게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잔치의 비밀은 함께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주고,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웃어 주는그리스도인이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저는 인간의 탐욕과 욕망으로 신음하고 있는 피조세계의 구원을 위해 함께탈핵을 외치고, 기후위기시대에 작은 생명을 함께돌아보는 우리교회가 좋습니다. 무작정 우리교회에 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을 내치지 않고 하소연을 들어주고 도움의 손길을 나눠주는 우리교회가 참 좋습니다. 1년 가까이 철탑위에서 나 살려달라고 외쳤던 김용희님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있어준 우리교회가 자랑스럽습니다. 건축으로 빠듯한 재정에서도 끊임없이 도움이 필요한 사회 약자들과 이웃들에게 후원금을 더 늘리려 하는 우리교회가 너무 자랑스럽습니다.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이웃들을 초청하고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성도님 모두에게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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