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함께하시는 성령(성령강림후두번째주일, 2020년6월14일)
함께하시는 성령
2020년 6월 14일(성령강림후둘째주일) 출3:13-15;딛3:3-8
지난 헤른후트 6월8일(월)묵상말씀은 출3:13-15절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장면인데,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물을텐데 그러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는 곧 나’라고 하시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는 그래서 ‘나는 나’이고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나는 나’입니다. 교회당 2번 째 H빔 기둥 위에 둥지를 튼 딱새(지난 번 우체통에는 박새였습니다.)지금 한 창 피어오르는 인동초, 올 해에도 기대에 보답하며 늦게 새싹을 낸 배롱나무, 얼마 피어나지 못한 올라오는 길 옆과 청소년부 비닐하우스 입구의 섬초롱, 큰방 보일러실 쪽 돌담에 피어난 바위취, 나한억님이 심어놓은 두 그루의 감 나무(올 해 감을 따 먹을 수 있다고 분양하는 분이 이야기했다고 하길래 웃었는데, 꽃이 피었습니다), 연못의 연꽃들, 베어버림을 당한 대나무(대나무는 아랑곧하지 않고 퍼져나가는데, 그 퍼지는 속도가 엄청납니다. 건축설계를 하면서 건축물이 대나무 숲 까지 들어와 있는 것을 못 본 것입니다). . 모두 ‘나는 나’입니다. 소수민족, 성소주자, 난민들 모두 ‘나는 나’입니다. 근데 이렇게 설명이 끝나면 추상적이어서 막연한데 묵상하며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15절에서 ‘주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 설명이 없었다면, 온갖 상상력으로 ‘나는 나’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온갖 우상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하셨습니다. 중동지방의 역사 속에, 그리고 역시 400년 고통 받던 히브리 노예들과 하나님은 ‘나는 나’로 함께하였으며, 지금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 이 예배자리에 함께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찬송한 ‘죄짐맡은 우리 구주’는 죠셉 스크라이븐이 만든 찬송입니다. 이 죠셉 스크라이분은 아일랜드 태생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믿음이 신실한 청년이었는데 그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던 약혼녀와 결혼을 할 즈음 결혼 하루 전에 불의의 사고로 죽게됩니다. 그 충격에 이 사람은 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몸이 허약하여 더 이상 훈련을 받을 수 없게 되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카나다로 이민을 갑니다. 그 곳에서 그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약혼녀를 잃은 아픔을 조금씩 고쳐가던 중에 한 여인을 알게 되어 결혼을 준비하였는데, 이 여인이 또 병으로 죽게됩니다.
죠셉의 마음은 점점 더 큰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친구의 위로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그런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고국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게됩니다. 어떤 삶의 희망도 다 접고 절망과 슬픔, 고독으로 하루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하나님께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죠셉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고, 이에 감사하여 죠셉은 어머니에게 찬양의 시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부른 찬양인 것입니다.
1절)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2절)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 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3절)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이 찬송은 지금도 절망한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살리는 것은 육이 아니라 영입니다. 롬8:6은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라고 합니다. 8절에 보면 육신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9절에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계시면 우리는 육신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지금의 상황, 어려움을 인정하고, 왜곡되고 뒤틀린 것을 반듯하게 펴고, 혼란 가운데에서도 나아갈 길을 보며, 궁색하거나 구차하지 않고, 어렵고 힘든 속에서도 나누고 베풀며, 그리고 그러려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야 하니,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없는 것은 없다고 하면서 되어지는 일, 앞으로 되어질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감동시키며 하시는 입니다.
그 다음날 묵상말씀은 디도서였습니다. 3:3-8의 말씀인데,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하심, 자비하심때문이라 합니다. 구원은 ‘나의 의’, ‘나의 행위’, 어떤 업적, 선을 쌓거나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인정받는 것에서부터인데, 부름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야하는데 무엇을 해야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령은 갈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6절은 이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라고 합니다. 성령은 그냥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세상에는 영들이 많이 있습니다. 온갖 세상의 가치들로 포장한 영들이 내 마음의 생각을 주장하려고 합니다. 매우 이기적이며 개인적입니다. 오직 예수의 영 만이 참된 영입니다. 예수의 영은 아버지의 선함을 십자가를 통해 사랑으로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운 분이 계신가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이 여러분을 위로합니다. 보다 큰 고통을 겪은 분, 바로 예수님이 위로자이십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우리를 회복시켜주십니다. 여기서 조심해야합니다. 회복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은 회복이전에 회복의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참 희망으로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부터 옵니다. 교회는 회복을 기다리는 희망으로 종말의 삶을 삽니다. 모든 세상 가치를 내려 놓는 삶으로 주님 다시 오심의 희망으로 현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를 맛 보며, 머물며 확장시키며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