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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편협함과 하나님의 큰 사랑(성령강림후 열한째주일, 2016.7.31)

mungge | 2016.08.03 15:17 | 조회 1793

(2016 어린이부 여름성경학교를 마치며, 7/31일 주보 대문사진)

 

설교자: 유경재 목사님

인간의 편협함과 하나님의 큰사랑

욥기 42:1-6, 요나서 4:5-11, 누가복음 15:25-32

 

 

우리말에 쩨쩨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의 성격이나 하는 일이 잘고 지나치게 아끼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입니다. 주로 친구들이나 이웃에게 인색하게 구는 사람에게 쓰는 말입니다. 비슷한 말로 쪼잔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쩨쩨하거나 쪼잔한 사람은 대개 인간관계보다는 돈이나 물질을 더 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친구나 이웃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은 대체로 누구나 다 쩨쩨합니다. 인간이 타락하면서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었고, 영원의 세계와 단절되면서 백 년 미만의 짧은 삶 속에 갇혀 살다 보니 다 쪼잔해졌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그 마음 씀씀이가 넉넉지 못하여 하찮은 일에도 화를 내고, 한 번 틀어지면 좀처럼 화해할 줄 모르며, 자기 가족 이외의 사람에 대해서 지극히 배타적이고 인색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도 별로 달라지지 않고 그 양상만 바뀔 뿐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한 번 배운 교리를 절대화하면서 폭넓은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타종교인에 대해서는 지극히 배타적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성격이 푸근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쩨쩨해지고 인간관계가 더 경직됩니다. 근본주의적인 경향을 띤 한국교회는 대체로 편협하며 쩨쩨한 종교로 낙인 찍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쩨쩨한 사람 싫어하듯 한국교회의 쪼잔함을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요?

 

꽉 막힌 교조주의자인 욥의 친구들

구약성경 욥기에 보면, 욥이 어느 날 갑자기 재산과 자식들을 잃었고 몸에는 견딜 수 없는 종기가 나 고통을 당할 때 그 친구들이 위로차 그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고난을 만난 친구를 위로하기보다는 그가 당한 고난이 죄의 결과라고 한 목소리로 욥을 힐책(詰責)하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사상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상은 신명기에 분명하게 기록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욥도 자기가 고난당하기 전에는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죄를 지은 것이 없는데도 그가 고난을 당하면서 그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욥은 죄 때문에 자기가 고난당한다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억울하게 고난을 당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이제까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신념과는 상반된 것입니다. 그는 친구들과 이 문제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하면서 끝까지 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욥을 공격하였습니다. 욥이 계속 자기 무죄를 주장하니까 친구 엘리바스는 없는 죄를 만들어 내어 공격을 하였습니다.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22:5-9

그러나 여기 지적한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욥은 오히려 그런 가난한 자들을 아주 열심히 돌봐주었습니다. 친구들은 자기들의 신념을 입증하고자 거짓 증거를 나열하기까지 하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교리나 신학 혹은 이념에 사로잡혀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려하지 않는 꽉 막힌 교조주의자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러했고, 오늘날 한국교회 보수적인 신학자나 목사들이 그러합니다. 자기들이 붙든 교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서슴치 않으며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의 죽음에 대해 조금도 양심에 거리낌을 갖지 않았습니다. 교조에 갇혀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보지 못하는 편협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욥과 친구들의 논쟁의 와중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욥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욥기 38장부터 무려 네 장에 걸쳐 하나님께서 이루신 창조이야기가 나열됩니다. 욥과 그 친구들의 논쟁의 초점은 고난이 죄 때문이냐 아니냐인데 반해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거론하시며 욥을 몰아붙였습니다. 창조하신 우주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큰 섭리와 비교할 때 욥과 친구들의 논쟁은 정말 하잘 것 없는 말장난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래서 욥이 하나님께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2:3

우리가 아무리 신학을 연구하고 교리를 만든다 하여도 어찌 하나님의 큰 사랑의 역사를 담아낼 수 있으며, 그 신비한 섭리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내가 조금 아는 것으로 남을 정죄하는 교만을 버려야 할 이유입니다. 내가 믿었다고 믿음 없는 이들을 경멸하여서는 안 될 이유입니다. 우리는 겸손히 마음문을 열고 하나님의 역사와 그 부르심을 기다리며 새롭게 깨닫게 될 진리 앞에 머리를 조아릴 뿐입니다.

 

옹졸한 국수주의자인 요나

구약성경 요나서에서 또 한 사람의 편협한 예언자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요나입니다. 요나는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라는 명령을 받고 도망가다가 붙잡혀 다시 니느웨로 파송 받았습니다. 사흘은 돌아야 되는 큰 성읍인데 요나는 단 하루만 다니면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 소리를 들은 니느웨 왕이 회개하고 모든 성에 조서를 내려 금식하며 회개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성에 내리려던 심판을 멈추셨습니다.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기대하였던 요나는 그 기대와 달리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니느웨 성을 보고 크게 실망하고 격분하였습니다.

앗시리아, 그들이 과거 몇 백년간 이스라엘에게 행하였던 그 부당한 악행들, 그들의 그 천인공노할 폭력과 침략 행위, 그들의 그 엄청난 비인도적 만행들이, 그리고 백년을 넘는 세월 동안 한 민족을 통째로 괴롭히며 짓밟았던 그들의 악행이, 단 며칠 사이에 회개하였다고 그 모든 죄가 일시에 용서되고 탕감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뭐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우리도 지을 수 없습니다. 요나는 바로 이 점을 항의하였습니다.

이런 항의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한 넝쿨나무가 자라게 하셔서 요나에게 시원한 그늘을 주게 하셨다가 그 이튿날 말라죽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뜨거운 햇볕아래서 견디다 못해 사는 것보다 죽는게 낫겠다고 하소연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배양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박 넝쿨의 생명과 12만 명의 무구(無垢)한 생명의 비교! 국수주의자 요나의 그 쪼잔함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대비입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 지성인 예언자 요나가 12만 명이나 사는 대도시 니느웨의 멸망을 마음 아파하기보다 오히려 한 그루의 하잘 것 없는 나무가 시드는 것을 더 마음 아파했다는 것은, 인간 지성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로 그의 이기심을 보게 하시면서 그가 지금까지 주장해 온 애국심이 바로 자신의 이기심 위에 세워진 허울 좋은 구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잠시의 고통은 못 견뎌 하면서 12만 명의 죽음 같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드리는 요나의 지독한 이기심은 바로 인간의 심성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나라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35년간 지배했던 일본을 지독히도 싫어합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일으켰고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는 북한을 말할 수 없을 만큼 증오합니다. 이런 증오심은 곧 애국심의 발로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증오심이,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복음과 합치하는 것인가요? 죽어도 니느웨에 못 가겠다고 한 요나나 죽어도 북한과는 함께 하기 싫다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요? 그것은 애국이 아닌 이기심의 발로에 불과하며, 복음과는 상관없는 아니 복음에 반하는 적그리스도의 생각일 뿐입니다. 옹졸하고 쩨쩨한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요나처럼 자기 불편한 것은 조금도 못 참으면서 북한에서 굶주려 죽는 수많은 아이들에 대해서는 무심합니다. 그러면서 요나처럼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 북한을 빨리 망하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위선자인 맏아들

누가복음 15장의 아버지 사랑의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 역시 쩨쩨하고 쪼잔한 위선자입니다.

큰 아들이 밭에서 돌아왔을 때 집에서 들려오는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종을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아버지 유산을 미리 가지고 집을 나갔던 동생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아버지가 기뻐 잔치를 베풀었다는 하인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화를 내면서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맏아들은 도저히 탕자인 자기의 아우를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가 지금 어떤 상태로 돌아왔든지 상관없이 그를 용서하고 용납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를 달래려고 나온 아버지에게 그는 따지듯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기 의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었지만, 아버지가 진정으로 원하였던 사랑의 마음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 잘 내고, 기도 열심히 하며 성경공부에 열성을 다 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 없다고 자부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서 탕자처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지옥 갈 놈들이라고 저주를 하곤 합니다. 사실 그런 탕자와 같은 사람들을 두둔할 마음은 없습니다. 탕자는 어디까지나 탕자이지 저들이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들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움과 용서와 관용과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그것을 배우기를 힘써야 할 텐데 그러지를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세등등한 맏아들이 아버지께 따졌습니다.

제게는 염소새끼 하나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유치하고 쪼잔한 생각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맏아들 비슷합니다. 열심히 기도한다고 하지만 기껏해야 자기와 자기 가족을 위한 기도에 머물고 맙니다. 통일과 평화,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굶주린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는 아주 인색합니다. 염소새끼 한 마리 주신 적 없다고 불평하는 맏아들처럼 쩨쩨하기 짝이 없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은 아주 감동적입니다.

얘야,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이 얼마나 너그럽고 사랑이 넘친 말입니까? 염소새끼 한 마리를 따지는 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은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의 하찮은 욕망을 위해 기도할 때에 애야, 하늘에 있는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라고 응답하십니다. 놀라운 사랑이며, 통 큰 은총입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는 아마도 하나님만큼은 아니어도 좀 넉넉하고 여유가 있는 품성을 지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런 품성이 사라진 것은 결국 죄를 짓고 타락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타락하면서 인간은 옹졸하고 편협하며 이기적이며, 위선적인 존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잃은 것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쩨쩨한 인간으로 변하였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잃은 것은 하나님, 곧 영원성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쫓겨나 그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쫓겨난 인간의 삶은 이 땅에서 육체로 사는 100년의 삶에 갇혀버렸습니다. 이 짧은 백년의 삶 속에서 인간은 여유를 잃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얻으려다 보니 아등바등 싸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쩨쩨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8:32

백년의 삶에 갇힌 인간을 자유롭게 풀어주셔서 영원을 알게 하시고 영생에 이를 수 있게 하여 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11:25-26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백년의 삶에서 해방되어 영원을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잃었던 삶의 여유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옹졸함을 벗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편협함 대신 너그러움을 지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쩨쩨하게 굴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넉넉합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허락 받았기에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풍성함 안에 있게 되었으니 인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그럽게 이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애국심이나 증오심 대신 하나님 안에서 모두 한 가족이 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을 긋고 내 나라 네 나라하며 싸울 때에 서로 평화롭게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는 평화주의자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을 지향해야 하며, 모든 종교가 함께 협력하여 공동선을 추구하도록 우리가 앞장 서야 할 것입니다. 이런 여유로운 삶의 변화는 바로 우리가 영생을 약속 받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탕자처럼 탐욕에 빠져 하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맏아들처럼 위선자가 되어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 못하는 냉혈한이 되지 마십시오. 욥의 친구들처럼 교조에 매몰되어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친구를 몰아세우는 옹졸한 교조주의자가 되지 마십시오. 요나처럼 애국심만을 내세우며 이웃나라를 저주하는 편협한 국수주의자가 되지 마십시오. 이 모두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지 못하는 쩨쩨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제 여러분 속에 있는 의심을 모두 버리고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자유롭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애국심으로 알고 있는 증오심을 모두 버리십시오. 내 나라 사랑보다 모든 나라, 모든 이웃, 모든 자연을 사랑하십시오. 이웃 종교인을 저주하지 말고 함께 손잡고 공동선인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짧은 지식으로 알고 있는 교리를 절대화 하지 말고 항상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영의 정보를 받아드리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활짝 열어놓고 날마다 새로워지며, 날마다 자라며, 날마다 감사함으로 그곳으로부터 오는 기쁨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좁은 땅에 살지만 영원을 바라보면서 여유롭게 너그럽게 풍성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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