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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지금 부활(부활두번째주일, 2016년 4월 3일)

하늘기차 | 2016.04.03 15:10 | 조회 1635

   

                     여기, 지금 부활

부활두번째주일                                                                                                      막16:1-8

     지난3월에 프랑스 떼제공동체의 신한열 수사님을 초청해 50주년 희년 신앙의 잔치를 3일 동안 열었습니다. 첫 날 신한열 수사님께서 <‘하나님의 오늘’을 살자>의 의미는 과거에 메이거나, 앞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여기, 지금 이 시간을 살기 위해서 라고 하였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떻게 생명으로, 창세 때에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에게 부여한 생명으로 여기, 지금 있는가 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죽음으로 살 수도 있고, 생명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신수사님은 삭개오이야기를 이 번 신앙 봄잔치 주제의 본문 말씀으로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에게 어서 내려오라고 하면서 오늘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고 삭개오를 초청합니다. 저는 ‘어서’라는 말씀이 너무 와 닿았습니다. 예수님의 애뜻함과 연민이 묻어납니다. 아시다시피 삭개오는 로마를 도와 동족을 수탈하며 여기, 지금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동족들 속에서 삭개오가 어떤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어떻했을까요? 눅19:1은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성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리고성에 들어가기 전에 함께하는 제자들에게 3번이나 자신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체포, 재판,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당할 것이고 부활할 것이라는 말을 반복하였습니다. 제자들 중에 그 말을 귀담아들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을 향하여 어느덧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24km 떨어진 여리고성을 가로질러 지나가는데, 당시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이 호화롭게 자리를 펴고 살아가고 있던 여리고는 예수님이 지나가는데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나 하였지만 역시나 하며 씁쓸하게 여리고성을 거의 빠져나갈 즈음에 뽕나무에 대롱대롱 메달린 한 사람을 본 것입니다.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주님은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는 갈급한 한 영혼을 본 것입니다. 아마 삭개오도 삭개오지만 예수님도 크게 위로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뽕나무에 대롱대롱 메달려 코메디를 연출하는 삭개오를 올려다 보며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라고 하자, 6절에 삭개오가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고 합니다. ‘어서’‘얼른’이라는 말 속에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인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 지금 일어나는 생명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찿아가시던 중에, 마르다가 달려와서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하자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안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익숙한 종교적 언어로 한 순간에 넘어가 버립니다. 여기, 지금에대한 삶은 없습니다. 앞으로 좋은 세상 올터이니 위로받으며, 은혜 안에서 가만히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

                                    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묻습니다. 여기, 지금에서도 부활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

                                    을, 내가 믿습니다.” 라고 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질문에 즉답을 하지 않은 채로 대화가 끝납니다. 그리고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안치되어 있는 무덤을 향하여 말합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부르듯이 “나사로야, 나오너라!”하시자 몸에 천을 두른체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살아난 나사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12:10에 보면 부활 사건으로 인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했던 대제사장들이 나사로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는 평생 그리 순탄한 삶을 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인데 말입니다. 부활이면 무언가 행복하고 좋은 세상 열릴 법 한데, 다시 고난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다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로의 부활은 성서가 의미하는 부활은 아니고, 봄에 겨울에 얼어붙었던 동토에서 피어나는 새싹과 같은 부활의 징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종교에 가려지고, 세상의 권력에 무너져 이것이 하늘의 영광인 것을 죽은 사람을 살리어 드러내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을 믿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마르다처럼 마지막 날의 부활을 이야기할 건가요, 아니면 여기, 지금의 부활을 믿는다고 해야할까요? 부활이 죽었다가 단지 육신이 살아나는 것 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또 사도바울 역시 부활의 신비를 말로 표현 못하여 볍씨에서 벼가 되어 알곡을 맺는 비유를 들었듯이, 부활은 신비로운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오는 부활로서 생명과 구원의 신비입니다. 그 부활의 주님께서 여기, 지금에서의 부활을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쫓아 예루살렘 까지 함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자 모두 흩어졌습니다. 이것은 왜 부활이 죽음 이후에 부활이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정황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제자들의 생각들, 의지, 노력, 계획들을 죽게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 죽기 까지 따르겠다고 의지를 불태운 베드로, 누가 높은지 경쟁을 유발했던 야고보와 요한, 공생에 동안 보여준 이적과 기사들, 그 모든 것들의 죽음입니다. 부활은 내 안에 생각들과 경험들과 논리와 개인적인 연민은 죽고 주님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예수님을 바라보던 모든 것들을 죽게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 죽어서 비어있는 마음, 빈 무덤 같은 죽음의 마음에 주님이 머무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머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어떻게 ‘어서’와 ‘언른’을 통해 삭개오와 마음을 주고 받았는지를 보면 답이 보입니다. 주님이 삭개오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며 ‘어서’라고 하자, ‘언른’이라고 삭개오의 행동을 기록하고 있는데, ‘기쁨’으로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주님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 찿아오시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제가 ‘앞에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물었듯이, 그 이후 삭개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신의 재산을 다 정리하겠다고 하였는데, 만약 그렇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에게 찿아와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며 예수님에게 영생에대해 물었다가, 예수님의 미씀에 고개를 저으며 돌아간 바리새인 부자청년의 삶은 어떻했을까요?

     앞에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그리 평탄한 삶을 살지 못하였을 것이라 하였는데, 삭개오 역시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고, 풍요로움의 바탕을 주었던 로마와의 관계, 헤롯당과 당시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의 관계가 청산되는 순간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은 그 기초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게 부활입니다. 부활은 낭만이 아닙니다. 서정적이거나, 연민이거나, 자기만족의 종교행위가 아닙니다. 승리주의에 바탕으로한 열광주의가 아닙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곤욕스러운 삶이고, 현장입니다. 부활은 여기, 지금의 삶입니다.

     행26:18에 보면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서,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

                            고,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또 그들이 죄사함

                            을 받아서 나에 대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들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서커스단에서 공연을 할 때였습니다. 공연중 갑자기 정전이 됐습니다. 1분 간이었지만 관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고, 때마침 무대에서는 조련사가 호랑이 네 마리의 재주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철창 속이니까 관중에게는 위험이 없었으나 캄캄한 데서 조련사가 호랑이의 공격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걱정이었습니다.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이 고요하고 캄캄한데 무대에서는 호랑이의 포효하는 소리와 조련사의 채찍 소리와 호랑이의 동작을 지시하는 명령이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불빛이 다시 켜지자 관중들은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뒤에 기자회견이 열리자 조련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들은 나를 잘 봅니다. 내가 호랑이를 못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 속에 있듯이 행동해야 합니다." 조련사가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를 여전히 제압하고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둠 속에서도 빛의 사람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조련사가 끊임없이 반복하여 훈련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이 여기, 지금의 부활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반복입니다. 왕도는 없습니다. 요즈음 수요일 신앙 강좌를 통해 귀한 말씀의 은혜를 입습니다. 지난 주 하나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자, 카인이 울그락 불그락 합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너! 왜 화를 내느냐, 아직도 그 문제로 연연하는냐 하며 하신 씀이 있습니다.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정황입니다. 어느 철학과 종교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죄에 둘러 쌓여있는 인간의 실존을 이야기 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음의 삶을 사는 것은 바로 이 죄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죄를 다스립니까? 삭개오처럼 주님이 여기, 지금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어두움 속에서도 포효하는 사자 앞에 서 빛이 있을 때 처럼 행동하는 조련사 처럼 살아가려면 주님이 내 안에 계셔야 합니다. 여러분! 여기, 지금 일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여러분 안에 살아계서 삭개오의 기쁨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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