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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 있었던 일(종려주일, 2016년 3월 20일)

하늘기차 | 2016.03.20 15:00 | 조회 1601


                    금요일에 있었던 일

종려주일(사순절여섯번째주일)                                                             막15:1-5;16-20;42-47

     새벽부터 오후 3시 까지 모두 6시간여 동안 죽음은 어두움의 일을 합니다. 체포, 배반, 부인, 재판, 거짓증거, 조롱과 멸시, 십자가에 못박히심, 그리고 돌무덤으로 막아버립니다. 예수님을 죽음이 둘러쌉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을 담담하게 받으십니다. 금요일 6시간을 보며 느끼는 것은 예수님은 참 사람 이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이는 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금요일 십자가에 달리기 까지, 어떤 인위적인 종교성이나, 정치적인 힘이나, 경제력을 앞세우지 않으시고 연약하고, 유한한 참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십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 공생애 3년을 이런식으로 마무리 지으면 안될 것 같았습니다. 무언가 변화를 주어 지금이라도 스승으로 하여금 지난 월요일처럼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듯이 이번에는 진짜 하늘의 군대를 불러 로마제국과 종교지도자들을 예루살렘에서 다 쫓아 내어 본때를 보여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에 스승을 팔아넘깁니다. 그러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님은 유다의 키쓰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두 번이나 돌이킬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을 기어이 합니다. 유다는 유다의 일을 하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갑니다. 제자의 배반을 말없이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기소장도 없이 바로 산헤드린 앞에 끌려갑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대해 증언을 하지만, 서로 말이 틀립니다. 성전을 헐고 다시 짓겠다는 자라고 증언을 하지만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가야바가 직접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대가 말을 하였다’고 하시며, 권능의 보좌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영광, 예수님 뿐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함께 장차 누릴 당연한 영광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이 영광을 종교적으로만 풀이하여 하나님에게만 돌리지만 주님은 사람뿐 아니라 온 우주의 피조물의 영광도 바라본 것입니다. 바로 참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과 누릴 당연한 영광인데, 종교적으로 2원화시킨 산헤드린이 이것을 신성모독이라 하며 기뻐 날뜁니다. 그러나 산헤드린에게는 사형의 권한이 없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빌라도 역시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인가?’라고 묻자, 예수님이 ‘네가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여러가지 증거를 대며 예수를 고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만약 유대인의 왕이면 처형해야 할 것이고, 유대인의 왕이 아니면 무혐의로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빌라도는 명절에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곤 하였습니다. 예수는 자기가 생각하는 로마에 저항하였던 이전의 혁명가는 아니었습니다. 어찌보면 예수를 놓아줄 생각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전 날 저녁에는 부인이 꿈이 사나웠다고 하면서 이 이일에 개입하지 말라고 합니다. 빌라도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냐고 할 때, 유대사람들은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합니다. 어찌보면 빌라도가 책임훼피를 위해 대중들 앞에 바라바를 세웠을 확률이 높습니다. 웨냐하면 유대인들 때문에 예수를 그냥 놓아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아무 명분없이 십자가에 처형할 수는 없고, 그래서 여우같은 빌라도는 바라바를 내세워 양자택일을 하게 하는데, 유대인들이 당연히 바라바를 놓아주라 할 것이 뻔합니다. 유대인들의 요청에 따라 빌라도는 예수를 넘겨주며 손을 씻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하는데, 가룟 유다에게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도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나누면서 예수님이 나와함께 한 솥밥을 먹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라고 하자, 오금이 저린 유다가 ‘나는 아니지요?’하자, 예수님이 ‘네가 말하였다’고 합니다. 유다가 ‘나는 아니지요?’라고 동료들에게 자신이 꾸민 음모를 모르는척 덮으려 하였지만,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 한 마디에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과 예수님과 가룟 유다에게는 거짓이 드러난 것입니다. ‘네가 말하였다’는 우리의 양심을 일깨웁니다. 빌라도처럼, 그저 빨리 사태를 수습하여 종결지우고 싶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고, 가야바처럼 분명한 목적이 있어 드러난 양심의 소리를 묵살해 버리기도 합니다. 고난주간 첫 주 종려주일에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역시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실까요?

               ‘형제님, 자매님, 집사님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예수님이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저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면

                                                                              예수님이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사람 왜 저래, 주제 파악 못하네’라고 하면 예수님이 ‘네가 그렇게 말했다’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라고 하면 예수님이 ‘네가 그렇게 말했다’ 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고 하면 예수님이 ‘네가 그렇게 말했다’ 합니다.

               ‘원수를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예수님이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기교회는 참 좋은 주님이 함께하는 교회입니다’라고 말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고 우리의 마음을 향하여 분명하고 또렷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 것은 빌라도를 생명과 진리의 자리에 초청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자신의 껍질을 벗고 예수님에게 다가갔다면 예수님이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요, 평화의 나라의 왕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 초청을 거절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유월절의 민족해방의 열기를 어떻게든지 잠재워 예루살렘의 치안을 잘 유지하기만을 바랬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했다’는 화려한 수사도, 힘있는 웅변력도, 논리정연한 논술도 아니지만,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며, 하늘의 뜻을 드러냅니다. 이 말 앞에 우리는 모두 무릎을 꿇거나, 모른척하거나, 다른 가치에 몰입하여 아예 관심이 없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사람이기를 원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싶은 간절함이 있다면 마땅히 ‘네가 그렇게 말했다’는 하늘과 땅을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나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매달리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롱합니다. 침을 뱉고, 멸시합니다. 때리기도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 와 보아라’

                                   ‘다른 사람은 구하면서 자기 자신은 구하지 못하는구나’ 만일 내가 그 십자가 밑에 있었으면 무어라 말을 했을까요? 예수님 내려오셔서 저들의 조롱을 물리치시고, 주님의 나라를 세우세요 라고 말 할까요? 아니면 아무말도 못하고 여전히 눈물로 바라만 볼까요?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하였을까요?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벗어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을 때,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거듭 고난에대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에대해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인자는 글자그대로 ‘사람의 아들’입니다. 여러 가지 신학적인 해석이 있지만 저는 이 ‘사람의 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결정적인 지표를 제시한다고 봅니다.

     다니엘서는 당시 지중해세계가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이스를 넘어 로마라고하는 가공할 제국으로 패권이 넘어갈 때에, 환상가운데 이 나라들이 각기 무시무시한 가공할 폭력적인 짐승들로 나타나는데, 그러한 네 짐승이 물러나면서 사람 같은이가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단7:14에 보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

                              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

                              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인자, 사람에의해서 다스려지는 나라,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나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사람의 아들’을 통해 이 세상에 평화의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데, 아니 이미 있는데 예수님께서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 나라는 기적이나, 정치권력이나, 경제력이나, 사람들에게 가벼운 위로나 베푸는, 거짓 평안의 값싼 이교적인 종교가 아니라, 순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그것도 평범한 참 사람에게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 세상 나라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계십니다. 어떤 힘도 없이 그러나 자유한 모습으로 아버지 하나님에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하나님나라의 열정으로 세상의 정치와 종교와 경제의 힘 앞에 힘없음으로부터 오는 자유한 참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서 있습니다. 겉으로는 세상 법정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법정 앞에 인류를 세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람으로서 사람의 역할을 신실하신 하나님에대한 신뢰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아무런 설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사람 예수는 참 사람으로 자유와 사랑과 공의로움과 평화로 그렇게 서 계신 것입니다. 이 모습은 온 우주와 역사를 주님 안에 품는 모습입니다.

     누가 참사람일까요? 어렵지요. ‘예수님 외에 누가 참사람일 수 있어?’하고 반문 할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필요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냥 천사를 통해 일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입니다. 어떻게 참사람일까요? 그래서 주님은 ‘어린아이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모습 그대로 다가 아닙니다. 투정부리고 매달리고 할 때는 정말 짜증납니다. 거짓말도 은근슬쩍 하구요. 그러나 아이는 엄마, 아빠가 전부입니다. 엄마가 울면 울고, 웃으면 웃습니다. 얼마나 아빠와 엄마에게 집착하며, 연민을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모든 생각과 감정과 습관이 모두 부모와 하나입니다. 그게 아이들에게 자유이고, 평화이고, 힘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말은 아버지 하나님에대한 전적 신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사람의 모습입니다. 신뢰.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 물질의 풍요와 과학 문명의 발달이 성도들에게 조차도 하나님과 사이를 멀리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바쁘다고 하며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언제부터인가 상대적으로 바라봅니다. 여러 일들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십니다. 아이들에게 아빠, 엄마는 먼저입니다.

     예수님의 금요일 죽음으로 이어지는 고난의 6시간은 아버지 하나님을 ‘아빠!’하고 부르는 참사람의 모습의 시간이었습니다. 10여년 전에 멜 깁슨이라는 미국 배우가 만든,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기도 한데 <The Passion of the Christ>이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단세포적인, 그리고 선혈이 낭자한 하드코어의 기법으로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영화였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즉 Passion 을 극사실주의적인 기법으로 촬영하여 말들이 많았던 영화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정신, 사랑, 뜻은 없고 폭력적인 것 만 부각시켰던 영화입니다. 사순절 고난주간이 되면 이 영화 생각이 얼핏 납니다. 그만큼 자극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도 단체로 극장에 가서 이 영화를 눈물과 회한으로 가슴졸이며 본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은 왜 이 고통, 고난<Passion>을 자처하였을까요? 영어의 Passion에는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난이고, 또 하나는 열정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어희적 표현을 사용하여 예수의 Passion<고난>은 예수의 Passion<열정>에서 왔다고 합니다. 무엇에대한 열정일까요? 이 Passion은 어디에서 오나요? 아버지와 하나됨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됨을 호도하면 안됩니다. 종교적인 맹목적인 하나됨이 아닙니다. 그저 교회에 나와서 보험도장 찍는 그런 종교적 하나됨이 아닙니다. 세상은 참사람의 모습으로 아빠 하나님과 하나되려하는 사랑을 쪼갭니다. 멀어지게 합니다.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평화와 자유와 힘이 엄마와 아빠에게서 오듯이,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자유롭고 평화롭게 그리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고난을 받아들이는 힘은 아빠 하나님과 하나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사슴이 시냇물 찿듯이,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그렇게 사모하고, 갈급한 것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 사라졌습니다. 일과 엔터테인과 관계와 자본에의해 갈급함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월터 브루그만이 최근에 출판한 ‘안식일은 저항이다’라는 책의 내용에 공감을 합니다. ‘네가 그렇게 말했다’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릴 때 우리의 양심을 돌아보는 참사람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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