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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에 있었던 일(사순절다섯번째주, 2016년3원13일)

하늘기차 | 2016.03.13 13:41 | 조회 1600

 

                   목요일에 있었던 일

사순절다섯번째주                                                                                                  막14:12-42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예루살렘에 머물고 계셨는데, 목요일의 정황은 그 전과도 또 다른 어려움이 닥쳐옵니다. 화요일에는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힘겨운 논쟁을 벌이던 와중에 두렙돈 헌금한 과부에게 마음의 위로를 받았는데 지금은 늘 함께 하던 가룟 유다에게 배반을 당하고, 가장 가까웠던 베드로가 부인을 합니다. 그것도 유월절 절기 식사를 나누면서 그러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목요일 오늘은 유월절입니다. 모두 민족해방의 기운을 품고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그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은 고난의 무거운 짐에 힘겨워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길을 가는 도중에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지 티격태격하며 상상의 임시정부를 꾸립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니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이을 적자라고들 여기며 어깨를 으쓱거렸을 것입니다.

     예리한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3번 반복된 고난과 죽음에대한 예고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왕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베다니에서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와는 그 대응이 달랐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이 죽음을 향하여 가시는 길에대한 연민과 애통함을 옥합을 깨뜨려 온 방안을 향으로 가득 체워 그 길을 열어주었다면, 유다는 철저하게 예수님을 이용합니다. 돈을 위해 그렇게 예수님을 고발했는지, 아니면 3년을 쫓아다녔는데, 그렇게 체포당하여 죽으면 너무 허무하니, 단독으로 예수님을 코너에 몰아부쳐 예수님의 기적을 이끌어 내어 로마와 그 수구세력을 몰아낼 심사였는지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 넘기었습니다.

  그 날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기기로 작정한 날,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이 나를 넘겨줄것”이라 합니다. 제자들이 ‘나는 아니지요?’하며 수군댑니다. 나는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정도 밖에 되지 못합니다. 성경은 가룟유다를 지칭할 때, 그냥 가룟유다라고 하지 않고 ‘열두제자중에 하나’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나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저 나 개인입니다. 내가 잘 믿고, 내가 영적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신앙하는 것으로 압니다. 주님이 한 번 더

                     “그는 열 둘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고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함께 먹고 마시며 동거동락한 열두제자 중에 한 사람인 가룟유다가 그렇게 하는 것을 안타까워 합니다. 유다는 홀로 하나가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들 생각은 ‘나는 아니지’합니다. 내가 아니면 다행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왕권 회복의 꿈 속에 몽롱해 하고 있습니다. 자기 욕심에 차 있습니다. ‘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두 번에 걸쳐 유다에게 기회를 줍니다. 너가 하는 일을 멈추어라. 너와같이 똑똑하고, 앞으로 귀하게 쓰일 사람이 그러면 안된다 하고 마음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못하는 가룟 유다에게 21절에서 예수님은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간다고 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예루살렘에 와서 고난을 받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며, 세상과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어서, 이제 나는 내 길을 갈터인데, 하지만 너는 왜 너의 십자가, 마땅히 네가 가야할 너의 길을 가지 않고, 네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느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 합니다. 만찬이 끝나고 올리브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중에, 너희들이 모두 흩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을 하니, 다른 제자들도 같은 말을 합니다. 신앙은 자기 의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받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 안에 머물 때, 그 말과 행실이 옥합을 깨뜨리는 것처럼 향기로 드러납니다. 마리아의 모습에는 어떤 자기 의지가 보이지 않고, 예수님을 향한 애뜻한 연민이 보입니다. 믿음입니다. 향이 납니다.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배반하려는 유다의 마음을 읽으시고 유다에게 한 말씀 할 수도 있으셨지만 끝끝내 침묵하셨습니다. 말을 하면 나늬어 지지만 말하지 않고 침묵하면 끝끝내 결국 상대방의 마음과 하나가 됩니다. 침묵은 내 안의 미움과 원망과 불안과 거짓을 더 이상 확대 재생산 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의 미움이 하나 그대로 남아 있으며, 하나의 원망이, 하나의 거짓이 하나 그대로 있다가, 그리고는 사그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미움을, 원망을, 불안을 말하면, 이제 둘이 되고, 넷이 됩니다. 그러나 침묵은 그 모든 것을 사람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돌립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유다 앞에서 제자들 앞에서 침묵하셨고, 빌라도와 헤롯과 무리와 군병들과 모든 사람들 앞에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섞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섞이지 않으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나도 침묵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침묵에 익숙해 지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속에 우주의 별들과 태양계와 시간과 들꽃과 나무와 새들의 소리 속에서 침묵하시는데, 우리가 침묵하지 못하니, 하나님의 소리와 뜻을 헤아리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우주와 지구의 피조물들과 함께 침묵하며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과 달리 사람들은 그 피조물의 소리를 듣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당도하였습니다. 좀처럼 이런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으셨는데, 제자들에게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살리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이 그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함께 한 제자들에게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함께 기도하자는 뜻입니다. 교우여러분! 교회가 함께 기도하자고 할 때 어린 아이처럼 되세요. 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소망하는 일에 무심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그 속에서 진행됩니다. 특별히 신비로움도, 특별히 웅변적이지도, 특별히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 대수롭게 보이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할 때, 그냥 평범하게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가 그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람들 속에서 침묵하던 예수님은 하나님에게는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고고한척, 모든 것을 다 깨달은 척, 도사연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아뢰었습니다. 아버지인 하나님과 하나여서 구지 아뢰지 않아도 될터인데, 예수님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처연하게 매달렸습니다. 아버지 나 살려주세요! 아버지! 그동안 내가 아버지를 위해 헌신하며 쌓아 온 이 모든 것을 이런 고통과 버림받음과 배반과 배척과 소외와 폭력에 잃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침묵하십니다. 우주와 생명의 언어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지금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졸려서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마치면 이제 더 이상 주님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체포와 재판과 십자가와 죽음이 기다립니다. 세 번을 기도하셨습니다. 기도 후에 예수님은 기도 전의 예수님과 달랐습니다. 마음이 근심으로 죽을 지경이었지만, 이제 그 죽음을 향하여 가자고 합니다. 제자들은 그 죽음에 등을 돌리고 두려워 하였지만, 주님은 그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으시고, 아니두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품으십니다. 생명이십니다. 여러분 죽음이 생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15:55에서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하며 죽음의 본질이 죄요, 그 권세가 율법이라는 것을 밝히 드러냅니다. 여러분 우리를 죽게하는 것이 무엇이라구요? 죄입니다. 그리고 죄의 힘을 휘두르는 권세가 율법입니다. 이 법이 죽음을 등에 엎고 행세를 합니다. 법의 논리와 합리성으로 이성과 지성으로 말입니다. 법은 가치중립적이지 생명이 아닙니다. 교우여러분! 사도 바울은 고전15:57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고 합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까? 인류 역사상 죽음을 생명으로 품으신 죄없으신 유일하신 분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능력이나 지혜나, 힘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로 모든 것을 맡긴 그 신뢰를 통해 주님은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나아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주님을 통해 승리를 준다고 말씀합니다. 죽음을 이기는 이김은 은혜입니다. 선물입니다. 왜 은혜이고, 선물일까요? 죽음이 죄이기 때문이고,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 죄와 법을 우리가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죽음 저 넘어의 생명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에대한 신뢰가 예수님을 생명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광야의 기도자리로부터 시작이 되어 이제 그 이름이 기름짜는 압착기라는 뜻의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하기 까지 기도하며 마무리를 짓습니다. 이곳에 사탄은 어김없이 찿아와 광야 때 속삭이던 것처럼 그대로 잔을 내려 놓으라고, 하늘 군사를 동원하여 제압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외면을 당하였을 뿐만아니라 아버지에게서도 아무런 말씀을 듣지 못하고 홀로 남으셨습니다. 바로 그 때가 예수님의 내면에서 예수님의 예수님됨이 드러납니다. 혹 여러분! 나혼자 밖에 남지 않았어 라고 생각되십니까? 그 때가 가장 자기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기회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예수님됨은 어떤 모습일까요? 신뢰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순전한 신뢰입니다. 죽음에 내 몰리는 버림 받음 속에서 신뢰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에게 온전히 자신을 맡기며 아빠, 아버지 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사랑하는 자녀로서의 신실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죄가 얼마나 이 세상과 인류를 황폐시켜버리는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장차 있을 사도들의 고난과 초대교회의 타락과, 이단들, 교회의 외식, 우상숭배, 불순종과 교만, 죽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알코홀과 도박 중독, 컴퓨터, 게임 중독, 히로시마 원폭과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폭발로인한 방사능 누출 등, 이러한 인류의 황폐함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받기가 버거웠을 것입니다. 내가 이 잔을 마셔도 과연 이로인하여 어떤 생명의 평화가 흘러넘칠까 하며 주저주저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령의 감동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말없이 자신처럼 하나님과 사람들 속에 침묵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나라는 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한 생명로부터인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통해 하늘의 위로를 받으시고 이제는 제자들에게 다시 가서 일어나서 가자!고 하셨습니다. 죽음을 맞으러 가자 하셨습니다. 바로 죽음이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죽음을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성전내의 경비와 무리들이 그 역활을 감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생명의 자리에 서 있나요, 아니면 죽음의 역할을 하고 있나요? 죽음이 하는 일에 내 일이 아니니 무심하며, 무관한가요? 이 세상을 살며 죽음의 역할이 아니라 생명의 역할을 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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