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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Ⅱ(주현절후두번째주일, 2015년1월17일)

하늘기차 | 2016.01.17 18:55 | 조회 1867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 Ⅱ

주현절후제2주                                                                                        눅9:28-36;히11:5,6

     예수님이 변화할 때, 두 개의 소리가 동시에 났습니다. 하늘의 소리와 베드로의 소리였습니다. 베드로는 여기가 좋다 하였고,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고 하였습니다. 31절은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죽으심에 대하여 말하였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주님의 발걸음에 힘을 실어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분위기를 못 느끼고 그냥 여기가 좋다고 한 것입니다. 변하지 않고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을 감당하기는 커녕 알 수도 없습니다. 원더우먼이 변하듯이, 수퍼맨이 변하듯이 변하는 것일까요?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따로 데리고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 중에 변하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좀 더 기도에 열심을 내었으면 좋겠습니다. 베드로가 왜 주제 파악을 못하였는가 하면, 변화의 황홀함 만 보았지, 그 변화의 내용을 전혀 공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변하기를 바라겠습니다.

     지난주에 유치아동부와 청소년부 예배에 설교자로 참여하였습니다. 설교본문은 우리교단 공과에 따른 에녹에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에녹이 365살을 살았는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데려가셨다고 기록합니다. 창5장의 에녹의 조상들에대한 족보를 보면 누구를 낳고 얼마를 살다가 죽었다고 반복하여 기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7대손인 에녹에 이르러서는 낳고 죽었다가 아니라, 동행했고 하나님이 데리고 가셨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창5:22절 말씀입니다. 에녹이 아들 무드셀라를 65세에 낳은 뒤에,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65세에 이르러서 동행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전에는 그렇지 않다가 첫 아들을 낳으면서 동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상상을 해 봅니다. 에녹시대는 카인 이후 점점 도시화, 문명화되며 폭력적으로 변해갑니다. 에녹도 도시 문명에 익숙하게 살아 왔을 것입니다. 첫 아들 무두셀라를 낳았습니다. 아들을 폭력에 익숙한 도시문명의 적자로 키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에녹은 아들과 가정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특별이 무엇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에녹은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 살기 위해 애쓰고 수고하며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설교하면서 동행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2학년 가은이가 ‘함께하는 것이요’ 했습니다. 뉘집 딸인지 정말 또록또록 합니다. 또 물었습니다. 함께하는 것이 무엇이지? 아이들이 잠깐 주춤합니다. 이번에는 ‘과천동물원, 에버랜드, , , 가 본 사람?’ 하니까 모두 번쩍 번쩍 손을 들었습니다. 수빈이 정빈이도 손을 들었어요. 그래서 혼자 갔다 온 사람? 하고 물었더니 아무 대답이 없드라구요. 그럼 누구랑? 하니까 아빠 엄마, 선생님, 할머니 줄줄이 나옵니다. 함께 같이 가는 것 그게 바로 동행이야 그랬습니다. 제가 비유를 잘했지요. 제가 유치 아동부, 청소년 설교만 20년 했습니다. 베테랑입니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습니까? 청소년부 예배 때에도 ‘동행’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단 조건을 달았습니다. 최소한 청소년부가 동생들 보다는 교회생활을 더 했는데, 이 말의 뜻을 아동부 어린이 수준으로 대답하면 쪽 팔린다고 하였습니다. 다들 주춤, 주춤 합니다. 그러자 조금 있다가 ‘지아’가 한 마디 하더라구요, ‘질문에 답하는데, 그 답을 존중해 주어야지 무시하면 어떻게 해요’. 내 마음이 우당탕, 쿵탕 하더라구요. 예수님도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셨다는 거에요. ‘지아’가 여간 아닙니다. 그래서 언른 이 때다 하구 말 받아서 주님이 어린이처럼 되라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야 하면서, 말씀을 이어갔습니다. 식은땀 났지요. 그러면서 히브리서를 인용하였습니다.

  히11:5,6은 에녹에대하여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동행하는 삶이구나 하였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지난 해 6월 4번째 주부터 매 주 수요일 이사야서를 읽었습니다. 이 번 주는 60장을 읽을 차례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 ‘예언자적 상상력’이라는 발터 브리지만이라는 신학자의 책을 소개하며 강해를 시작한지 6개월 정도 되었습니다. 이렇게 매 주 수요일 신구약 성경을 한권 한권 읽어 나가다 보니 20여년 동안 신구약 66권을 다 보았고, 어떤 책은 3번 보기도 하였는데, 이 번에 이사야서도 처음 때와 전혀 다른 책으로 저에게 읽혀졌습니다. 제가 고기교회에 와서 이사야서를 읽은 것이 96년 9월부터 였습니다. 딱 20년 전입니다. 그 때는 이사야를 97년 6월 까지 1년 동안 읽었드라구요. 근데 이 번에는 6개월에 마무리를 지어가는데, 이사야를 공부한 노트의 내용이 전혀 틀립니다. 저도 놀랍니다. 보여드릴께요 ㅎ ㅎ. 볼 때 마다 새롭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일상 속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이것이 저의 교회를 섬기는 목회와 신앙의 화두입니다. 저 혼자가 아니라 교회와 함께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의 신앙을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주일의 두 번 의 예배, 수요일의 성경강해 단순하고 밋밋합니다. 그러나 그 모임이 우리 일상 속에 자리를 잡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봅니다.

     동행하면 닮아갑니다. 부부가 닮아간다고 하잖아요. 그게 맞아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 가면서 하나의 향, 맛, 색이 나옵니다. 잘 숙성된 포도주처럼 말입니다. 저와 집 사람이 성격이 틀립니다. 안맞아요. 밀고 당깁니다. 지금도 그래요. 아닌 것은 아니거든요. 근데 조화롭습니다. 티격태격하는게 동행입니다. 티격태격하지 않으면 동행이 아니지요. 하나님과 티격태격 해 보세요. 동행입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과 닮아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서로 묻고, 이야기하고,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근데 여기서 그냥 넘어가지 말아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함께 문제를 풀어나간다고 했는데, 누구의 문제를 풀어 나가나요? 내 문제요? 내 직장? 결혼? 건강? 자녀? 우정? 그러면 하나님은 문제가 하나도 없나요?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다구요? 하나님과 동행해 보세요? 우리 보다 문제가 더 많고, 깊을 걸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은 것을 후회한다고 하면서 괴로워 할 때, 하나님 곁에 누가 있었나요? 노아입니다. 노아의 이름이 위로라는 뜻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위로자라는 것입니다. 노아가 힘들어하는 하나님을 위로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노아가 곁에 있는 것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지난 수요일 이사야서에서 유대종교를 넘어 인류역사와 우주를 향한 비죤을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한 사58장을 함께 읽었습니다. 설교제목 처럼 기뻐하신다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창립 50년•희년을 맞이하는 고기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위해 놓치지 말아야 할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숙지하고, 그 말씀을 위해 기도하고, 그리고 성령이 어떻게 일하시는 지를 보아야 합니다. 예상치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교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며 수요일에 이사야서를 새롭게 읽게 해 주셔서 교회가 어떻게 자기 정체성을 세워야하는지의 단초를 심어주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새삼 놀라며 감사를 드립니다. 늘 깨어서 자기 정체성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선 축복의 말씀을 먼저 같이 읽어 보게겠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

                    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

                    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고 말씀합니다. 이 햇볕같은 축복을 어떻게 맛보며 누릴 수가 있나요? 6, 7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

                   리는 것,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

                   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

                   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말씀은 레25장의 희년을 이사야가 다시 풀어낸 말씀이며, 61장 1-3절에서, 그리고 이사야서 곳곳에 희년을 선포합니다. 어찌보면 이사야는 희년선지자라 할 수 있습니다. 사막에 강이 흐르고, 광야에 백합이 피어나고,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등 곳곳에서 희년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종교와 기득권에 젖어있는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점쟁이요, 창녀요, 음행하는 자라고 신랄하게 퍼붓습니다. 우리교회 역시 여기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58장 5절에 보면 그러한 금식을 어찌 기쁘게 반기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라고 반문합니다. 여기 ‘날’이라 한 것은 희년의 날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고서 6, 7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날을 기뻐할 것인지를 선언하고, 61:1-3에서 확실하게 못을 박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 이후 그리이스와 로마의 시대에 이르러 종교적 폐습이 더 암울하게 고착되어버린 예수님 당시 주께서 친히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가 해석한 이 희년을 선포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고기교회 창립50주년•희년을 맞이하며 이사야서를 읽었다는 것은 우연치 않은 또 다른 기쁨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의 후반부인 59:16을 보면

“압박받는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이 없음을 보시고, 중재자가 없음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놀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것이라 하였는데, 사람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주님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일하셨는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중재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충격에 하나님이 친히 정의를 세우신다는 종말론적인, 묵시적인 희망으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거역하는 모든 적들에대한 최종적 승리를 선언하십니다.

     사람들이 거짓 묵시와, 내세 지향적이며, 현실 도피적인 종말론에 모여듭니다. 홍혜선이라는 거짓 꿈쟁이가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자 적지않은 사람들이 외국으로 떠났던 기억이 납니다. 거짓 정보가 넘쳐나니 사회가 정치, 경제, 종교, 문화, 교육에 이르기 까지 모두 막혀있습니다. 지난 성탄절에 메가처치 중에 하나인 연세중앙교회가 예배당에서 전교인 5천명이 남자는 검은 양복에 나비넥타이, 그리고 여성은 위아래 하얀 옷을 입고 성탄찬양을 하는 동영상을 보았는데, 섬짓했습니다. 차려자세로 한 곳을 향하여 눈동자의 초점을 맞추고, 살짝 미소를 띄우면서 노래하는데, 하나님대신에 히틀러, 김일성 만 넣으면 그대로입니다. 변명할 여지없이 전체주의입니다. 이차대전 당시 독일교회가 그렇게 히틀러에게 넘어가버렸습니다.

     다양성 속에 일치라는 말이 한 때 어느 선교단체가 케치프레이드로 내 걸어 회자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지난 부산장신대 학생들이 우리 교회에 잠시들러 황홍렬교수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주제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다양성 속에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 속에 조화가 맞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황홍렬교수가 학생들을 잘 지도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가 불안하고, 언로와 마음이 경제 등 사회 전반이 막혀있고, 이것은 우리 나라 만이 아닌 전 지구적인 현상으로 전체주의로 회귀하려는 모습이 언듯언듯 보입니다. 두렵습니다.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강남순교수가 얼마 전에 와서 GLOBAL이 아니라 PLANALY라는 말을 소개하였습니다. 글로벌이라는 말은 이제 전 세계를 자본의 체제아래 획일적으로 묶으려는 언어가 되었다고 하면서 플래너리, 즉 행성간의 관계라는, 지구촌 사랑이 아니라 행성간의 평등한, 조화로운, 그래서 평화로운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학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희년,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 변화, 변방에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변화가 변방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에대한 것과 관련한 글을 최근 페이스북에 안희곤이라는 4월의 책 대표분의 글로 대신합니다. 아마도 대만 총통선거에 즈음하여 느낀 생각을 올린 것 같은데, 공감이 갑니다.

              “나는 항상 대만이 부럽더라. 여기는 나라 전체가 주변자다. 중국의

              하나이되, 중국이 아닌, 스스로를 늘 예민하게 자각할 수밖에 없는

              나라. 그래서인지 나라 전체가 뭔가 책 잡히지 않고 더 나아지려는

              일종의 “각성” 상태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사람들은 순하고, 중소기업이 탄탄하고, 자연이 좋다. 개발 강박도

              없어서, 일본 식민지 시절의 유산을 그대로 고쳐 쓴다. 길거리는 허

              름해서 우리나라 70년대 풍경 같지만, 사람들은 훨씬 알차다. 대만

              출판사 친구와 서로 1년 신간 종수를 비교해보았는데, 4만 몇 천

              종으로 비슷하더라. 대만 인구는 한국의 절반 정도... 부끄러웠다.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긴장감을 가지고 변방에 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고기교회 창립50주년•희년을 맞이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을 잘 감당하는 사람에게 주는 축복이 있습니다. 앞에서 읽은 8절 말씀과 함께 축복의 말씀을 한 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

                   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

                   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고기교회가 창립50주년•희년에 새로워져서 이사야선지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축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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