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값 하락의 가장 큰 원인은 풍년”이라는 게 농림축산식품부(농식품부)의 입장이다. 하지만 농민들은 쌀값 하락의 주된 이유로 ‘수입쌀의 증가’를 꼽는다.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수입쌀이 들어오게 됐을까. 대한민국 쌀시장 개방의 발자취를 더듬어봤다.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부터…
한국은 1993년 WTO(세계무역기구)와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을 벌였다. 각국의 무역 장벽을 없애고, 관세를 인하하자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쌀 시장 개방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1992년 12월 대선 공약으로 “쌀 시장 개방 불가”를 내놨다. 하지만 임기 첫해인 1993년 12월 협상은 타결됐고, 1995년부터 대한민국 쌀 시장 개방의 역사가 시작됐다.
물론 ‘완전 개방’은 아니었다. 1995년~2004년 10년 간 전면 개방은 유예됐다. 대신 10년 간 의무적으로 쌀을 수입해야만 했다. 매년 2만톤씩 수입량을 늘리는 조건이었다. 1995년 평균 쌀 소비량의 1%(5만1300톤)로 시작해 2004년까지 4%(20만5000톤)로 늘리는 식이었다. 완전 개방을 미루는 대신 10년 동안 ‘의무수입’이라는 족쇄를 차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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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노무현 정부, 밥 짓는 쌀 수입 의무화
한 가지 다행인 건 밥을 짓는 쌀이 아니라 과자나 떡, 주류를 만들 때 쓰는 가공용 쌀만 수입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유예기간이 끝난 2004년, 노무현 정부가 WTO와의 재협상에서 밥쌀용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하기로 했다. 의무 수입량 중 10%는 무조건 밥쌀로 채우고, 그 비중을 2010년까지 30%로 늘려, 2014년까지 유예하는 조건이었다.
2014년 전체 수입쌀 의무수입량은 40만8700톤이었다. 그 중 30%인 12만2600톤을 밥쌀용으로 수입해야 했던 것이다.
밥쌀용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하기로 했던 2005년, 당시 농민들은 11월 15일 여의도에서 농민대회를 열었다. ‘밥쌀 수입’을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집회에 참가했던 전용철, 홍덕표 두 명의 농민이 사망했다. 당시 국가인권위원회는 진상조사를 통해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사고”라고 밝혔다. 인권위는 “전용철씨는 떠밀려 넘어지면서 머리 뒤쪽에 강한 충격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홍덕표씨는 경찰을 피해 달아나던 중 경찰의 방패에 뒷목 등을 가격당해 목뼈 손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