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정의와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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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 . 기륭전자

하늘기차 | 2016.07.23 12:51 | 조회 1221

짐승의 시간, '사람'을 만나 행복했어요

[한겨레][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비정규직 노동자 쉼터 ‘꿀잠’ 오석순

“너한테서 썩은 내 나는 거 알아?”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유니폼처럼 검은 바지와 셔츠를 걸친 용역깡패들이 찌푸린 얼굴로 아가씨들을 콕콕 찌르고 다니면서 말했다.

“좀 씻고 다녀라. 더러운 년들!”

그때 오석순(50)은 30대 미혼 여성이었다. 한여름 땡볕 아래 농성하느라 한뎃잠을 자고, 땀에 절어 초췌해진 여성 조합원들에게 돌아온 건, 모멸에 찬 폭언과 폭행이었다.

애당초 많은 걸 바란 것도 아니었다. 2005년 7월5일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합법적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사쪽은 노조와 협상을 거부했다. 8월3일 노동부는 기륭전자가 인력파견업체를 통해 직원을 고용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판정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시정되지 않았다. 회사는 벌금 500만원 물고 그만이었다. 불법파견된 인력으로 공장을 돌리고 휴대전화 문자 한 통으로 직원을 해고하는 일은 죄로 여겨지지 않았다. 불법에 항의하고 협상을 요구하는 사람이 죄인이었다. 조합원 전원은 업무방해혐의로 고소당했고 54억원에 이르는 손해배상소송도 떠맡아야 했다.

“장기투쟁 노동자들한테는 마음의 병이 있거든요. 그런 마음의 병을 치유해줄 곳. 잠시라도 맘 편히 몸 누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요.” 오석순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 조합원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쉼터 ‘꿀잠’ 건립 운동을 벌이는 이유다. 지난 13일 오후 서울 봉천동 기륭전자 분회 사무실에서 만난 오씨가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장기투쟁 노동자들한테는 마음의 병이 있거든요. 그런 마음의 병을 치유해줄 곳. 잠시라도 맘 편히 몸 누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요.” 오석순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 조합원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쉼터 ‘꿀잠’ 건립 운동을 벌이는 이유다. 지난 13일 오후 서울 봉천동 기륭전자 분회 사무실에서 만난 오씨가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대한민국에서 힘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간단히 개돼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11년간 세 명의 대통령을 거치면서도 이들은 복직되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비정규직은 여전히 ‘정규 사람’이 아니다. 아무 때나 쓰고 버릴 수 있는 1회용 인력자판기이다.

후회요? 천만번도 더 했어요!

서울 봉천동의 기륭전자 분회 사무실. 그가 알려준 주소는 6층짜리 원룸 빌라의 2층 셋방이었다. 세 평 남짓한 원룸에는, 컴퓨터 책상 하나와 앉은뱅이 탁자가 놓여 있고 작은 책장에는 각종 노동단체나 인권단체에서 기륭전자에 수여한 상패가 빼곡했다.

“많이 좁지요?”

오석순과 그의 오랜 단짝인 유흥희(46) 기륭전자 분회장이 인사를 건네며 자리를 권했다. 탁자 위에 사진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기륭전자 투쟁을 기록한 정택용의 사진집 <너희는 고립되었다>(2010년 발간)였다.

“여기 내민 손이 저예요.(웃음)”

쑥스러운 미소로 사진집 표지를 가리키며 오석순이 말했다. 회사 정문 밑단의 철창 사이로 간신히 내뻗은 팔 하나가 손가락을 쫙 편 채 바깥을 향하고 있었다. 겨우 한 뼘 남짓한 바닥의 철창 구멍으로 사력을 다해 내뻗은 손바닥 하나로 그는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는 듯했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해주세요!’라고.

사진집에는 그들의 고단한 11년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밤샘농성과 출근투쟁, 삭발, 삼보일배, 고공농성, 장기단식…. 그 거친 시간 속에서 권명희 조합원처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고 지병으로 세상을 뜬 이도 있었다. 처음 노조를 결성할 때 200여명이던 조합원 가운데 단 열명이 남았다. 왜 이들 열명은 싸움을 접지 않았을까? 엄청난 특권이 주어지는 자리도 아니고, 그저 그런, 어디에나 널려 있을 것 같은 공장 생산직에 무슨 미련이 있어서 목숨까지 걸고 매달려왔을까? 11년을 싸우고도 끝내 기륭 조합원들은 돌아갈 직장을 잃었다. 복직을 약속했던 사장은 은밀하게 자산을 매각처분하고 종적을 감췄다. 그럼 이들은 패배한 것일까? 기륭전자 오석순을 만나 묻고 싶었다. 당신에겐 무엇이 남았느냐고, 그렇게 산 것 후회하지 않느냐고.

그런데 막상 얼굴을 대하고 보니 질문을 던지기 망설여졌다. 그는 투병 중이다. 대장암 3기 진단을 받고 3월초에 수술을 받았다. 나는 그의 솔직한 답변을 정말 원하는 걸까? 그가 너무 솔직해질까봐 두려운 건 아닐까? 가슴이 묵직했다. 그의 손을 이끌어 주변의 시원한 찻집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한 건, 좁은 방 안의 후덥지근한 공기 탓만은 아니었다.

2005년 기륭전자 노동자 노조 결성
노동부, 사쪽 불법파견 판정했으나
사쪽, 고작 벌금 500만원 물었을 뿐
휴대전화로 직원에 해고 통고하고
업무방해혐의 들어 54억 손배소

충주 외곽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초등 1학년 때 아버지 여읜 슬픔
주야 교대 일하며 미대 진학 꿈 키워
고된 일 잊으려 풍물강습소 갔더니
회사는 ‘나쁜 사상 물든다’ 권고사직

-차가운 것 드시면 안 되지요?

“전 따뜻한 것 아무거나….”

동행한 유흥희 분회장과 나는 냉커피를, 그는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오늘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몰라요. 얘기하다 힘들면 중단했다가 다음에 하셔도 돼요.

“괜찮아요. 저 내일은 제주에 내려가봐야 해서.”

오석순은 오래전부터 제주에 사는 게 소망이었다. 남편은 그가 암수술을 받은 뒤, 제주로 이주하는 걸 서두르고 있다고 했다. 맑은 공기를 쐬고 마음을 편히 가지는 게 건강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두 부부를 위한 아담한 집 한 채를 지으려는 참이다.

-식사는 잘 하세요?

“식욕을 좀 조절해야 하는데, 예전에 단식(투쟁)한 이후부터 폭식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전에는 군것질을 즐기지 않았거든요. 근데 단식 세 차례 하고 나선, 눈앞에 먹을 게 보이면 습관적으로 자꾸 손이 가요. 단식해서 못 먹은 걸 채우겠다고 아귀아귀 먹는 것 같아요.(웃음)”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2005년에 30일간, 2008년에 47일간, 2010년에 다시 20일간 단식투쟁을 한 바 있다. 2008년 오석순은 긴 단식 끝에 신장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는데, 그 이후로도 김소연 분회장은 단식을 계속하다가 94일 만에 조합원들에 의해 병원으로 강제 이송되기도 했다.

-정말 죽을 수도 있었어요.

“그렇죠…. (생각에 잠겨서) 식구들도 ‘왜 네가 이런 일을 해야 하냐?’고 말렸어요. 나도 외면하고 싶었어요. 할 수만 있다면 이 길을 피해서 다른 길로 가고 싶었어요. 후회도 수천, 수만번은 한 것 같아요.”

-근데 왜….

“노동부에서 불법파견이라는 판정만 내놓으면 이 문제가 곧 해결될 거라고 믿었으니까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노동부에서 불법파견이라고 했으니, ‘이제 다 시정되겠지. 조금만 더 가보자’ 한 거죠. 그게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어요. 정치인도, 행정기관도, 경찰도, 그 누구라도 우리한테 ‘미안하게 되었다. 당장은 해결 못 하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려 달라’고 진정성 있게 말해주었더라면, 저도 ‘외면하고 싶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을 거예요. 근데 그 누구도 진심을 다해서 우리 얘기를 들어주거나 사과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갈수록 억울한 일이 자꾸자꾸 쌓이니까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었어요.”

평범한 여공에서 ‘불온한 빨갱이’로

처음부터 해고노동자가 되기를 작정하는 사람은 없다. 어릴 적부터 투사가 되겠다고 희망하는 사람도 없다. 오석순의 어린 시절 꿈은 미대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미술반 선생님은 그에게 그림에 자질이 있다며 미대에 진학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형편이 허락지 않았다. 오석순은 충주 외곽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6년을 앓다가 “온 동네에 빚을 너울너울 남겨놓고” 석순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근처 담배공장에서 16시간씩 일을 했다. 늦은 일을 끝내고 돌아오다가 길에서 막내를 낳아, 갓난아이를 안고 허청허청 걸어 들어오던 어머니를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오석순이 처음 취직한 곳은 인천의 새한미디어였다. 아침이 되면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나와 무표정하게 일을 하고, 시간이 되면 다시 꾸역꾸역 지쳐서 돌아가는” 생활. 그것이 오석순이 처음 경험한 공장 노동자의 모습이었다. “기계 부속품, 나사못처럼 사는 게 두려워서” 두 달 만에 그만뒀지만, 언제까지 집안에 얹혀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대로 돈을 벌어서 미대를 가자’ 작정하고 다시 취직한 곳이 삼양라면이었다. 그의 나이 스무살 때였다.

-다른 데보다 임금이 높았나요?

“높을 수밖에 없는 게 하루 12시간씩 맞교대를 했으니까요. 보통 1주 단위로 주간과 야간을 번갈아 근무하는데, 교대 없이 야간만 3주 한 적도 있어요. 야간 3주 하고 나면 하늘이 노래지죠.”

-그러면서 미대 갈 준비를 한 거예요?

“처음엔 주야 교대로 일하면서 기숙사 옆에 미술학원을 부지런히 다녔어요. 근데 학원비가 만만치 않잖아요. 수강료 부담 때문에 좀 쉬다가, 우연히 전봇대에 붙은 ‘무료 풍물 교습’ 전단을 보게 됐어요. 회사의 친한 언니, 동생들이랑 같이 다녔는데, 엄청 재밌더라고요. ‘대동놀이’라는 게 혼자 소리로 되는 게 아니고, 마음을 모으고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그런 배움의 과정이 전 너무 행복했어요. 근데 회사에선 그걸 엄청나게 나쁜 일처럼….”

-불온한 일이라고요?

“네, 맞아요. ‘나쁜 사상에 물든다’고 못 하게 했어요. 풍물 배우면서 회사일 힘든 걸 잊을 수 있고, 회사 다니는 원동력을 얻는데 왜 이걸 나쁘게 여길까? 난 이해가 안 갔어요. 다른 사람 배려하고 함께하는 걸 배우는 게 뭐가 위험하냐고요?”

회사는 납득 못 하는 그를 권고사직 형식으로 해고했다. 그게 억울해서 동료들한테 서명운동을 받고 노조에 제출했지만, 노조는 인사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며 그를 외면했다. 노동자를 위한 노조가 아니었다. 그 뒤 취업한 동양트랜스에서는 삼양라면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애’라는 이유로 잘렸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고 했다.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과 연계가 있었나요?

“아뇨. 전혀요. 나중에 회사 운동장에서 아침 조회 하는 걸 들었는데 ‘오석순이란 애가 빨갱이라 해고됐다. 빨갱이는 말을 잘해서 너희가 넘어갈 수 있으니까 걔가 연락해도 절대로 만나지 마라!’ 하더군요. 전 그때까지 빨갱이는 북한에서 내려보낸 사람들인 줄만 알았어요. ‘빨갱이’가 나같이 힘없는 사람을 옥죄기 위해서 쓰일 수 있는 말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지요.”

가지 말라는 풍물교실에 다닌다는 이유로 그는 ‘불온한 노동자’가 되었고, 그것에 불복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그런 해고가 부당하다고 항의했다는 이유로 ‘빨갱이’가 되었다.

오석순씨는 대장암 3기 진단을 받고 3월초에 수술을 받았다. 그는 2005년에 30일간, 2008년에 47일간, 2010년에 다시 20일간 단식투쟁을 한 바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오석순씨는 대장암 3기 진단을 받고 3월초에 수술을 받았다. 그는 2005년에 30일간, 2008년에 47일간, 2010년에 다시 20일간 단식투쟁을 한 바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함께 일손을 놓는 것의 힘

-그러다가 구로공단의 대성전기에 입사한 게 91년이지요? 거기서 노조활동을 하다가 또 해고되셨어요. 20대 중반에 이미 해고 경험이 두번이나 있는데, 또 그런 일에 휘말리는 게 두렵지 않던가요?

“저는 항상 조용히 있으려고 했어요. 대성전기도 입사하고 나니까 동생들이 노조를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더라고요. 나더러 같이 하자고 하는데, ‘난 못 해. 너희들끼리 해’ 할 수가 없었어요.”

-조직적인 노동운동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다면서 어떻게 가는 데마다 그럴 수 있죠?

“글쎄요…. 제가 삼양에 있을 때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어요. 뉴스에 맨날 파업 소식이 나오는데, 우리만 그런 게 없는 거예요. ‘우리 회사에도 똑똑한 위장취업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긴 했어요. 근데 어느 날 수송부 아저씨들이 대형 트럭으로 정문을 딱 막아놓고 ‘기계 끄세요. 파업합니다!’ 하는 거예요. 얼마나 두렵고 떨리던지.(웃음) 그때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어요. ‘다 같이 일손을 놓는 것의 힘이 얼마나 큰지’ 처음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원하는 걸 얻었나요?

“4박5일 파업으로 월급도 꽤 올랐고 상여금도 올랐어요. 우리가 파업을 한 더 큰 이유는 사실, ‘라면 먹기 싫다’는 거였는데 그것도 바꿨지요. 회사에서 점심에 라면을 주는데 정상적인 라면을 주는 게 아니라, 중간에 공장에 전기가 나가서 타거나 덜 익은 라면, 일하다가 떨어뜨려서 깨지고 밟힌 거, 그런 거를 포대 자루에 주워 담으면 식당에 가져와 끓여줬거든요.”

-그걸 사람이 먹어요?

“직원이 3천명인데 그걸 한꺼번에 끓이면 불어터져서 우동처럼 돼요. 라면을 먹을 때면 무슨 개죽을 먹는 느낌. 어릴 때는 라면 다들 좋아하잖아요. 근데 이 라면은 정말 쓰레기 개죽을 받는 것처럼 역겨웠어요. 그러니까 ‘밥을 달라’고 파업을 했죠. 월급이나 상여금 오른 것보다 점심에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했어요. 우리는 ‘밥’을 쟁취한 삼양라면의 ‘전사’들이었어요.(웃음)”

같은 라면이라도 어떤 마음으로 끓여 내느냐에 따라 맛이 다르다. 가난한 어머니가 정성껏 끓여준 라면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만, 노동자 식대를 아끼기 위해 꿀꿀이죽처럼 삶아낸 라면은 인격적 폭력이다. 한 끼 식사에도 예의가 있다. 평범하게 살기 원했던 오석순이 노동현장에서 찾고자 한 것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노동에 대한 존중’. 짐승의 적자생존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을 등급으로 환산하는 이들은 그것이 무언지 알지 못한다.

잘리지 않으려면 시키는 대로 해라

대성전기에서 나온 뒤 오석순은 한동안 새 진로를 모색했다. 보육교사 과정을 수료하고 어린이집 원장으로 아이들을 돌보며 지냈다.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엄마들을 대신해서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은 더없이 행복했으나, 장삿속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다 보니 적자가 누적되어서 더는 유지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새 직장을 알아보다가 기륭전자에 입사한 게 2005년 2월이었다.

기륭전자는 당시 디지털 셋톱박스와 디지털 위성라디오, 내비게이터 등을 생산해서 2005년 1억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할 만큼 바쁘게 돌아가는 공장이었다. 매일 기륭전자 관리자들의 지시를 받아 기륭전자 생산라인에서 일했지만, 오석순의 소속은 기륭전자가 아니라 ‘휴먼닷컴’이라는 인력파견업체였다. 기륭전자 300여명 가운데 250여명이 그런 파견직이었고 정규직은 10명 내외, 계약직은 40~50명에 불과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남긴 교훈
‘다 함께 일손 놓는 것의 힘’ 절감
깨지고 밟힌 라면만 먹으라던 회사
“실은 라면 먹기 싫어서 파업했죠”

‘인간에 대한 예의’ 원했을 뿐
“투쟁하는 노동자들 한뎃잠 자요”
비정규직노동자 위한 쉼터 세울 터
대장암 3기 진단받고 3월엔 수술
치유 위해 제주살이 선택했으나
“제주집 지으면 꿀잠2호점 내줄 것”

-왜 기륭전자에 직접 지원하지 않고 휴먼닷컴을 거친 거죠?

“구인공고가 안 나왔으니까요. 옛날에는 공단마다 ‘어느 회사가 몇명 뽑고 얼마 준다’는 게시판이 있었어요. 근데 그게 없어지고 인력파견회사 구인공고밖에 없는 거죠. 휴먼닷컴에 이력서를 써서 가니까, 기륭은 6개월 넘으면 정규직이 된다고, 그럼 상여금도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선택하셨군요. 근데 왜 정규직이 못 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들어가기 2년쯤 전부터 정규직 전환이 없어졌대요. 파견을 써보니까 편한 거예요. 바로바로 잘라도 그만이고. 그때 우리 월급이 64만1850원이었어요. 최저임금보다 10원 더 받은 거죠.”

-최저시급에서 10원씩 더 줬다고요?

“아니요. 한 달 기본금 총액에서 10원을 더 줬다고요. 최저임금으로 하면 64만1840원인데 10원 더 붙여서 64만1850원.”

-한 달에 10원… 참!

“입사해보니 주위에서 그러더라고요. 여기 정기적으로 사람 자르니까 조심하라고. 그래도 ‘내가 잘릴 리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디 가나 손이 빠르고 일 잘한다고 인정받았던 터라,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를 자르진 않을 거야’ 믿었죠.”

그러나 오산이었다. 입사하고 두 달 반이 되던 어느 토요일, 공장 청소까지 마치고 퇴근한 저녁이었다. ‘낼부터 회사에 출근치 마시고 궁금한 사항은 저한테 전화주세요.--휴먼닷컴.’

해고 통보는 그렇게 휴대전화 문자 한 통으로 날아들었다.

-왜 잘린 거예요?

“나중에 들으니 회사에서 정기적으로 반장들한테 ‘자를 사람 명단 적어 내라’고 했대요. 그때 회사 매출이 연 1700억 할 땐데, 사람을 항상 뽑고, 잔업에 철야까지 시켰어요. 일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자르는 게 아니에요. 회사에서 안 잘리고 다니려면 특근이든 철야든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거지. 그래서 우리들은 아이가 입원하고 수술해도 못 가보고, 제사가 있어도 말 한마디 못 하고, 회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했어요. 잘리지 않기 위해서.”

2005년 7월5일, 기륭전자에 노동조합 분회가 결성되고 뒤이어 8월3일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이 나왔다. 그때 모든 게 바로잡혔다면 오석순과 기륭 조합원들의 인생도 달라졌을 것이다. 싸움은 지루했고 치열했다.

2005년 8월24일 시작된 파업농성은 1865일 만인 2010년 11월2일, 기륭전자 최동열 대표가 국회 귀빈식당에서 노조와 합의문 조인식을 함으로써 마침내 매듭을 짓는 듯 보였다. 사쪽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복직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으로 모두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고 최동열은 2013년 12월30일 밤 회사 집기를 모두 빼돌린 채 종적을 감췄다.

-그럴 걸 왜 국회까지 가서 합의문에 사인을 했을까요?

“국회에서 조인식을 하기로 한 건 회사 쪽이 요구한 거였어요. 사회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었던 거죠.”

-왜요?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서 주식 가격을 확 올리고, 기륭전자 구사옥 부지를 처분하기 용이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을 거란 얘기가 있어요.”

기륭전자 조합원들은 최동열의 자택 앞까지 찾아가 면담을 요구했지만, 주거침입죄로 고소를 당했을 뿐이다. 노동계는 최동열을 배임과 사기혐의로 고발했지만 그는 무혐의로 풀려나왔다. 국가권력은 비정규직의 편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박근혜 정부는 파견 허용 범위를 대폭 확대해서 주조, 금형, 용접 등 ‘뿌리산업’에 대한 인력 파견을 전면 허용하도록, 파견법 개정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임금노동자의 3분의 1이 비정규직인데, 왜 정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변하지 않을까요?

“인수위원회 앞에 피켓 들고 1인시위 하러 가면, 전경들이 나를 둘러싸서 보이지 않게 해요. 거기 가는 목적은, 나 같은 사람이 있다고 보게 하려는 건데. 내가 어떤 적법한 행위를 해도 차단을 해서 날 보이지 않게 해요. 그래서 (고공으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다 막으니까. 저희도 정말 하고 싶지 않아요. 씻지도 못하고 그 좁은 공간에서 허리도 아프고, 내려와선 잘 걷지도 못해요. 자기 몸을 혹사하면서 있는 거예요. 그러지 않고서는 우리 얘기를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우리 얘길 좀 들어달라고.”

-비록 합의가 이행되진 않았지만 기륭전자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복직’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선도적 역할을 했어요. 그런데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바꾼다는 게 현실적 해법이 될 수 있을까요?

“저희는 단 한번도 모든 비정규직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비정규직이 필요한 부분도 있어요. 계절별 성수기가 있는 업체들, 아이스크림 업체는 상시적으로 노동자를 쓰는 게 어렵겠지요. 그런데 상시적이고 지속적으로 사람이 필요한 일에 왜 비정규직을 쓰냐고요?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 ‘꿀잠’에 힘을!

오석순은 기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요즘 그가 가장 관심을 갖는 일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쉼터 건립운동이다. 쉼터의 이름이 ‘꿀잠’이라고 했다.

-좀 편하게 잘 수 있게 하자는 뜻인가요?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한뎃잠을 자요. 거리에 은박지 깔고 어떨 땐 천막도 침낭도 없이. 기업 본사들이 서울에 있다 보니 지방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이 많아요. 길거리에서 자다 보면 경찰도 오고 항의하고 협박하는 사람도 오고, 별별 사람이 많지요. 그런데서 잠깐 벗어나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해요.”

-그런 시설이 지금까지 없었단 말인가요?

“네. 그래서 꼭 필요합니다. 장기투쟁 노동자들한테는 마음의 병이 있거든요. 저도 검은 옷 입은 용역깡패 수십명한테 뭇매를 맞고 한 달간 입원한 적이 있는데 그 뒤로 검은 옷 입은 사람만 보면, 소름이 돋고 머리가 쭈뼛거려서 그 사람 피해 멀리 길을 돌아가곤 해요. 항상 두려움과 공포, 긴장이 꽉 차 있어서 평소에도 무장해제가 잘 안되는 거예요. 그런 마음의 병을 치유해줄 곳. 잠시라도 맘 편히 몸 누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요.”

그는 건립모금운동에 더 열심히 참여하지 못하고 제주로 이주하는 게 못내 아쉽고 미안하다고 했다. 제주에 집을 지으면 다락방을 만들어서 ‘꿀잠 2호점’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한테 개방을 하겠다며 그는 해맑게 웃었다. 나는 아직 그에게 질문 하나가 남아 있었다.

오석순(오른쪽)씨가 사무실 주변의 찻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진순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오석순(오른쪽)씨가 사무실 주변의 찻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진순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지난 30년간 치열하게 노동운동 하고 살아오면서 인간 오석순에게 남은 게 뭡니까?

“내가 이 길을 안 가고 다른 길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스스로 반문을 해볼 때가 있어요. 이 길을 선택해서 많이 힘들었지만, 난 행복했어요. 아이러니죠.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 덕에 굉장히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폐지 줍는 할머니가 우리더러 힘내라고 하고, 팔고 남은 과일 갖다주며 먹으라고 하고. 옛날 생각을 할 때마다 목울대가 막혀서 말하기 힘들 때가 많지만, 나는 불행하진 않았어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시간이었고, 그 해결을 염원하는 시간이었으니까. 따뜻한 세상은 누가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거잖아요.”

녹취 김성희

▶ 이진순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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