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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영화예술의 장인 임권택

박경장 | 2006.01.06 15:06 | 조회 1552
우리시대 영화예술의 장인 임권택

--욕망의 귀는 항상 밖으로 열려있다--


요즈음 대중 영화는 감독이 만드는 게 아니라 기획사가 만든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감독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기획사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영화가 하나의 예술이기 이전에 엄청난 부를 창출하는 상품으로 철저하게 시장 마케팅 메카니즘 아래서 제작된다는 이유일 것이다. 기획사는 영화의 기획과 배급 판매 프로세스라는 하드웨어 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의 세밀한 소프트웨어까지 관여한다. 이유는 오늘날의 영화라는 것이 배우의 연기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사실적인 영화라 하더라도 촬영의 무대 세트와 필름의 편집과정에서 수많은 컴퓨터 작업과 엄청난 장비와 경비가 소요되는, 말하자면 영화 한편에 하나의 거대한 생산라인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감독의 역할은 예전과 비교해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영화 자체의 세밀한 내용까지도 거대한 기획사의 의도와 간섭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세계영화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헐리우드에서 이런 현상의 분기점을 이룬 감독이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라고 한다. 현대 헐리우드 역사의 흐름을 바꾼 사람이 바로 스필버그인데 1974년 <조스>로 소위 ‘대박’이라는 블록버스터(Blockbuster) 영화산업의 신조어를 만들었다. 영화라는 예술작품을 ‘영화산업’이라는 상품으로 그 성격을 전환시켰다.

소위, 스필버그 이전과 스필버그 이후라는 영화의 근본적인 성격 변화는 한마디로, 감독 중심의 예술영화에서 기획사 중심으로의 상업영화의 변화라고 말 할 수 있다. 스필버그 이전 까지만 하더라도 헐리우드를 지배하던 Coppola, De Palma, Malick 같은 영화감독들의 우상은 그들의 영원한 영웅 Orson Welles 감독으로 대변되는 작가 중심의 걸작 예술영화를 만들었다. 물론 제작사나 스튜디오의 간섭은 거의 없었다. 감독이 영화 제작자이자 기획자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경비를 댄 누구도 감독의 영화제작에 간섭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른바 감독 중심의 ‘작가주의 예술영화’시대였다. 스필버그 전까지 말이다.

판타지가 상업영화의 시장을 거의 석권하다시피 하는 요즘, 영화에 첨단 IT산업이 결합되지 않은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럴수록 영화제작에 감독의 소프트웨어적인 연출의 중요도는 점점 감소할 수밖에 없고, 감독의 고유한 소프트웨어 또한 시장에 영합돼 갈 수밖에 없다. 소위 Box Office라는 관객수가 영화의 승패를 좌우하는 이유인 것이다. 결국 일종의 총감독격으로 기획사의 복잡한 시장 경영마케팅이 영화 제작의 총 과정의 감리 감독으로 자리한다는 말이다.

우리 대중영화계에서도 정도에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할리우드 영화산업 흐름과 거의 같이 간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 시장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그에 따라 제작의 규모 또한 해마다 엄청나게 늘어가는 추세이다. 이미 영화에 IT기술은 필수적인 한 부분처럼 들어와 있은 지 오래다. 그래도 헐리우드 보다는 아직 우리 영화는 기획사보다는 감독의 영향력이 커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독들이 기획사나 스튜디오로부터 간섭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이미 시장의 메카니즘에 영화의 승패가 좌지우지되는 우리 영화판에 감독은 결코 기획사의 의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도는 점점 심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시대 상황을 반영하듯 얼마 전 신문기사에서 우리시대의 슬픈 자화상을 보게 되었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영원한 콤비를 이루었던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이 투자자를 찾지 못해 촬영을 시작하지 못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천박한 자본시장이 영화라는 예술의 영역까지 들어와 장인의 등을 떠미는 모습이 우리시대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우리시대의 독립영화를 제외하고 대중영화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가주의 예술영화감독을 임권택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우리 영화계는 온통 할리우드 일색이었고 그나마 우리나라 영화는 창작물에 대한 사전검열로 소재빈곤에 허덕이고 감독, 배우 인물난에다 촬영기술의 열악한 사정으로 관객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영화의 자존심을 지켜낸 것은 단연 임권택 감독이었다. 내가 임권택이라는 감독을 가슴에 새기게 된 처음 영화는 81년 작 <만다라>였다. 다른 어느 나라의 감독도 흉내 낼 수 없는 한국의 불교를 소재로 불교철학의 깊이를 아름다운 영상으로 풀어냈다. 불교라는 종교와 소설문학과 영화의 만남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것이 김성동 원작소설의 『만다라』와 한승원 원작소설의 『아제아제 바라아제』였다. 이 두 영화는 국내 대종상은 물론 <만다라>는 그 해 세계 삼대 영화제 중에 하나인 베를린 영화제 본선진출을 해 우리영화를 해외에 본격적으로 알린 최초의 영화가 되었다.

86년에는 <씨받이>라는 영화로 강수연이라는 배우를 우리나라 최초로 베니스 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게 했고, 아태영화제 감독상과 최우수 작품상을 휩쓸었다. 이 영화 또한 우리만의 소재를 가지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감정에 호소하는데 성공했다. 헐리우드식 충격이 아니라 아시아의 조그만 반도국가의 역사적 사실물인 대리모라는 낯선 충격으로 세계 영화관객을 사로잡았다.

이어 임 감독은 문민정부들어 창작물에 대한 사전검열이 비교적 자유로워지자 본격적으로 우리 근대사의 문제를 영화로 다루기 시작한다. 그 야심작이 조정래 원작 『태백산맥』이었다. 하지만 원작의 스케일이 너무 컸던 탓일까 두어 시간의 은막에 담기에는 부족했던 것 같은 아쉬운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대하소설은 역시 영화보다는 오히려 TV시리즈물에 더 적합한 것 같았다. 아무튼 임 감독의 작가주의가 식지 않았던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임 감독의 작가주의 예술영화의 백미는 단연코 1993년 <서편제>라는 데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진가는 무엇보다 우리 소리를 영화화 한 최초의 시도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물론 거기에는 이청준의 원작소설이라는 탄탄한 구성과 각본이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임감독의 영화는 새로운 단계로 도약했다는 생각이 든다. 서편제라는 영화는 이미 10여 년 전에 임감독이 이청준의 소설 원작을 읽고 영화로 만들려고 각본과 영화전체에 대한 구상을 이미 끝냈다고 한다. 다만 10여 년을 미루어 왔던 이유는 오로지 이 영화의 주인공 송화역을 맡을 배역을 찾지 못해서였단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무려 10여 년, 그 해도 빠지지 않고 남원에서 열리는 미스 춘향선발대회에 갔었는데, 그 대회에서 김소희 명창 밑에서 서편제 창을 배웠다는 그해 미스 춘향, 오정해를 본 것이다. “그래 저년, 저 목구녕이야” 첫눈에 낙점하고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는 후일담이다. 그의 작가정신이 여실히 들어나는 대목이라 하겠다. 정말이지 이 영화의 주인공은 송화도, 송화 이복 오빠도, 떠돌이 소리꾼 송화아버지 유봉도 아니다. 실제 주인공은 바로 ‘서편제’ 남도 판소리 소리 가락이었던 것이다. 첸카이거가 중국의 전통극 경극을 영화화 해 예술적 상업적 성공을 동시에 거두었듯이, 임감독도 우리 전통음악 남도 소리를 영화화 해 성공을 거둔 것이다.

임감독은 이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완전히 판소리를 주제로 하는 영화를 제작하는데 그 영화가 바로 <춘향전>이다. 이 영화는 보성 중고제의 조상현 명창의 소리가 오히려 주이고 배우들의 액션은 부가적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임감독은 <서편제>라는 실험적 예술영화가 대중적으로 성공하자 2002년 또 하나의 예술 영화 <취화선>을 시도 한다. 이번에는 조선시대 기인 화가 장승업을 주제로 우리나라 동양화를 은막에 옮겨보려는 시도였다. 정말이지 이 영화는 영화라기보다 한 편의 움직이는 동양화였다. 임권택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촬영감독 정일성의 영화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문학적, 드라마적 구성의 탄탄함이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동양화만 바삐 은막을 돌아갈 뿐 서편제와 같은 드라마가 결여된 것 같아 감동이 크지 못했다. 그래도 어쨌든 작가적 도전과 실험정신이 식지 않은 영화였다는 데는 이의가 없는 영화다.

1996년에는 이미 <서편제>에서 호흡을 맞추었고 직접 각본을 써준 소설가 이청준의 원작 『축제』를 영화로 옮긴다. 이번에는 우리의 장례예식을 영화에 주 소재로 올려놓는다. 서양문화에서 장례를 축제라고 한다면 아마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하지만 호상인 경우 장례를 치루고 나면 동내에서 한바탕 잔치를 벌이는 것이 우리 전통장례풍습이었다. 물론 명망 유가집안에서는 아닐 테지만. 우리할머니 돌아가실 때에도 모처럼 집안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인 매우 귀한 자리라, 장례 치루고 나서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한쪽에서는 오랜만에 만난 동네 친구들끼리 회포를 풀고, 또 한쪽에서는 그동안 서운했던 집안 식구들 간의 화해의 장이 펼쳐졌었다. 이상한 것은 처음에는 묵혀두었던 서운함을 털어놓는 과정 중에 고성이 오가며 싸우다가도 결국은 화해하면서 부둥켜안고 운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산사람들을 한데 불러 모아놓고 서로 화해시키며 울고 웃는 한바탕 축제를 벌리는 것이 우리 장례가 지니는 숨은 의미라는 것을 작가 이청준은 소설로, 임감독은 영화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장례절차에 남도 당골들의 구성진 씻김소리는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우리 영화음악의 백미였다.

임권택 감독과 이청준의 만남은 단순히 감독과 소설가와의 만남 이상이었다. 모두 예술이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갖고 있다는 공통점 외에도 이 둘은 전남 장성과 장흥이라는 같은 고향 동년배이다. 이청준의 소설을 두고 귀향소설의 큰 범주로 묶어두기도 하는데, 물론 그런 분류는 이청준 소설의 한 부분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이청준의 문우들이 이청준 어머님 생전에 고향집을 방문해 술도 대접받고 마을도 둘러보고 난 후 “허허 청준이 자내 소설 쓴다며 순전히 어머니, 동내 사람들 기억 팔고 있구만.” 우스게 소리를 했단다. 그만큼 그의 작품에서 고향을 소재로 하는 작품의 비중이 크다는 말이다.

지금 60대 중반에 접어든 남도를 고향에 두고 서울에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에게는 대게 이청준의 소설에서도 끈질기게 어떤 응어리처럼 남아있는 원죄 의식 같은 것이 있다. 말하자면 고향에 대한 '부채의식'이다. 고향을 지키지 못하고 부모 형제들을 고향에 남겨둔 채 저 혼자만 대처로 나와 있는 부채의식하며, 고향사람들 눈에는 이젠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데 고향 발길도 뜸하고 자기를 키워준 고향을 위해 무엇 하나 변변하게 보은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고향에 대한 누추하고 눅눅한 느낌의 부채의식이다. 이런 부채의식으로 인해 고향에 가면 며칠 안돼 견딜 수 없이 답답함을 느끼고 돌아가는 발걸음에도 마치 어떤 “살아있는 늪”처럼 원죄의식 같은 것이 목 뒤 머리채를 잡아당긴다. 그것은 돈이나 물질로 갚을 수 있는 금전적인 원리상환이 아니다.

이청준과 임권택은 이런 고향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금전적인 원리상환 같은 것이 아닌, 어떤 정신적인 부채, 지금의 예술가로서 자기를 있게 해준 상상력의 부채 같은. 그것은 두 사람에게는 단연코 성장기의 자기를 키워준 의식의 부채이다. 고향에 산과 강, 그리고 한을 생명의 젖처럼 짜내며 살아온 남도의 어머니들, 그 어머니들의 한스런 삶을 밭에서 부엌에서 소리가락으로 풀어내던 들노래며 남도 육자배기들, 이야기로 떠도는 학 마을전설, 선학동 전설, 이어도 전설, 파도에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수 많은 여들에 떠다니는 설화들, 비화밀교전설, ,...등등이 그들의 밑바닥 (예술)의식세계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다. 그들의 예술이란 어쩌면 이 밑바닥 고향의식을 길어올려 단지 예술적으로 변용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이런 고향의 자연과 그것들에 얽히고 설혀 사람들 삶에 떠도는 이야기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이 둘에게는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다.

그 부채의식을 갚는 길이란 이청준에게는 글이라는 소설이었고 임권택은 영화라는 예술이었다. 그리고 이 둘의 이런 부채의식이 합쳐져 <서편제>와 <축제>가 탄생하게 되었고, 그리고 임권택의 100번째 작품으로 지금 <천년학>이 기획되고 있는 것이다. 천년학은 서편제의 속편 격으로 이청준의 『남도사람』이라는 단편연작소설의 한 작품인데,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남도소리를 소재로 하는 단편 삼부작 중의 마지막 단편, “선학동 나그네”를 <천년학>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영화화 하는 것이다. “천년학”은 이미 서편제에서 김수철이 대금곡으로 작곡해 타이틀곡으로 사용된 적이 있는 제목이기도 하다. 소리와 소리꾼들의 삶 그리고 그 소리를 탄생케 한 학 마을과 선학동이 서로 얼버무려져 하나의 떠도는 전설, 이야기를 창조해 내는 것이 “선학동 나그네”이다.

이 장인의 작가주의정신이 흥행에 성공할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투자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다는 슬픈 기사를 접했다. 스타배우를 캐스팅하지 않았다고 (<서편제>의 오정해와 <에쿠우스>의 김영민을 남녀 주인공으로 캐스팅 해놓은 상태임) 애써 눈을 피하며 볼맨 소리를 해댄다. 임감독의 <서편제>는 우리나라 대학에서 영화 수업텍스트로 사용되고 있고 서양 영화학과에서는 임권택 강좌가 개설되기까지 한단다. 일본과 프랑스에서는 이미 임권택 주간으로 그만을 위한 작은 영화제를 열 정도이다. 우리영화를 이 정도로 끌어올린 것은 100편의 상업영화가 아니라 임감독 같은 거장의 한 두 편의 예술영화이다. 우리시대의 작가주의 영화의 거장이 투자자를 찾지 못해 촬영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현실은 슬픈 우리시대의 자화상인 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다. 이청준은 내가 문학도가 되도록 인생행로를 바꿔준 작가이고 임권택은 내게 영화라는 표현매체에 새롭게 눈을 돌리도록 한 감독이다. 이 둘의 결합은 어쩌면 우리시대에 문학과 소리와 영화의 작가주의적 만남의 마지막 대중적 자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간절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예술을 사랑하는 인간적인 자본이 생겼으면 하는 바램으로 긴 글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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